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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서 장사하던 대학생, 1700억 `시계왕` 등극

후암동남산 2012. 3. 7. 11:17

동대문서 장사하던 대학생, 1700억 `시계왕` 등극

인물탐구 - 김윤호 우림FMG 사장

대학생 때 사업 수완
45일간 점포 얻어 카드 팔아…'반짝 장사'로 600만원 남겨

위기는 기회 '역발상 투자'
외환위기 때 빚더미 앉아…아르마니 등 판권 잇따라 확보, 자체 브랜드로 세계시장 공략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딱 45일만 고생하자고. 손님이 까탈스럽게 굴어도 밝고 친절하게 응대해야 해. 넉넉하게 보상해줄 테니 열심히 일하자고.”

1980년 11월 초 서울 동대문에 있는 A의류상가. 330㎡(100평)짜리 점포에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 앳된 얼굴의 고교생 7명과 마주 앉아 ‘작당’을 벌이고 있다. 대화의 주제는 크리스마스 카드. “연말에 할 만한 ‘반짝 장사’로는 카드만한 게 없다”는 정보를 우연한 기회에 접한 청년이 기어코 일을 낸 것이었다.

일반 대학생이었다면 ‘그런가보다’하며 웃어 넘길 정보였지만, 그는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발품을 팔아가며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확신이 선 뒤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지인들로부터 70여만원을 빌린 뒤 동대문 상가에 장기간 비어 있는 점포를 찾아 45일간 임차한 것. 그리곤 수많은 문구사들과 접촉해 카드를 납품받았다. 믿고 맡길 ‘임시 직원’으론 동생 친구들을 점찍었다. ‘45일짜리 대학생 사장님’의 첫 사업 도전은 ‘대박’이었다. 모든 비용을 제하고도 당시 돈으로 600만원이나 남겼다.

그 청년의 이름은 김윤호(51). ‘야당 거물 정치인(김상현 전 민주당 6선 국회의원)의 장남’이란 꼬리표 때문에 주변에선 그가 ‘엘리트 정치인 코스’를 밟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돈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던 청년에겐 정치보다 장사가 더 맞았다. 그리곤 시계 한 분야만 파고들었다. 그렇게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한 해에 시계를 30만개씩 판매하는 ‘한국의 시계왕’이 됐다.

○‘야당 투사’의 아들

어린 시절 김윤호 우림FMG 사장에게 아버지는 ‘손님’ 같은 존재였다.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던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나랏일’이었다. 늦은 밤 집에 ‘잠시’ 들러 이른 새벽에 출타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김 사장은 “아버지는 TV나 신문에서 더 자주 보는 사람이었다”며 “어쩌다 함께 있으면 손님을 대할 때처럼 어색했다”고 말했다.

가족을 먹여살리는 일은 온전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평생 20개가 넘는 직업을 거쳤다. 누에를 치고 돼지를 키웠다. 나무를 팔고 가스배달업도 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의 상당 부분은 아버지의 정치자금으로 빠져나갔지만,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의 정치활동을 지지했다.

김 사장은 그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아간, 또 어머니를 힘들게 한 정치가 싫었다. 앞에 나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건 체질적으로도 맞지 않았다. 아버지를 탄압한 군사정권 시절에 대학(경희대 영문과 80학번)에 들어갔지만, 늘 시위대의 뒷자리에 섰다. 김 사장은 “당시 나는 시위에 참여한 1만명의 학생 중 한 명일 뿐이었다”며 “정치인이 되기엔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걸 통감했다”고 말했다.

○“나의 적성은 장사”

대학생이 된 뒤에도 어머니에게 기댈 수는 없었던 터. 김 사장은 돈이 궁했다. 학기 중에는 ‘음악다방 DJ’로 일했고, 방학이 되면 각종 사업 아이템을 찾아 헤맸다. 다행히 장사에는 소질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카드 판매로 대박을 치더니 군 제대 직후인 1983년에는 아예 이화여대 주변에 15㎡짜리 수입잡화점 ‘메이퀸’을 열었다. ‘알음알음’으로 접촉한 스튜어디스들을 통해 구입한 해외 패션소품과 시계 등으로 채운 그의 매장은 당시 패션 리더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첫 직장은 서울마케팅서비스. 창업 전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산 계열 광고대행사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2년가량 몸담으며 ‘일하는 법’과 마케팅·광고 실무를 익힌 김 사장은 종잣돈 1500만원을 들고 1989년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사업 아이템은 시계. 머지않아 시계도 패션 아이템이 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메이퀸에서 판매했던 세네르를 시작으로 보시니, 던롭, 라코스테, 인터크루 등 10만원짜리 중저가 시계 브랜드의 국내 판권을 따냈다.

저렴한 가격에 ‘폼’도 나는 그의 시계에 사람들은 빠져들었다. 보시니는 전 세계를 통틀어 한국이 매출 1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김 사장은 “예물시계와 전자시계가 양분하던 시장에 새로운 스타일의 시계를 들여놓자 곧바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위기 그리고 재기

1997년 말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잘나가던 김 사장을 코너로 몰아넣었다. 청구·태화 등 지방 백화점들이 차례차례 부도가 나면서 그가 가진 어음은 휴지조각이 됐다. 1000원 안팎이던 달러당 원화 환율이 2000원까지 치솟자 ‘수입업자’인 김 사장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제 코가 석 자’였던 은행들이 중소 수입업체에 대출을 해줄 리는 만무했던 상황. 김 사장이 기댈 곳은 친구들밖에 없었다. 머뭇거리던 친구들은 “나를 못 믿겠느냐. 그동안 내가 ‘신뢰’ 하나로 먹고 살아온 것, 잘 알지 않느냐”는 김 사장의 설득에 총 10억원을 내놓았다.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승부사’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은 당장 급한 빚만 갚고, 나머지는 신규 브랜드를 들여오는 데 ‘투자’했다. 외환위기 여파로 모두들 보유하고 있던 브랜드를 내놓던 시절에 오히려 확장에 나선 것이었다.

덕분에 김 사장은 훗날 최고의 패션시계 브랜드가 된 엠포리오 아르마니를 아무런 경쟁 없이 손에 넣게 됐다. 김 사장은 “위기가 끝나면 패션시계 시장이 분명히 열릴 것이고, 아르마니는 그 중심에 설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의 예견은 적중했다. 경제가 살아나면서 패션시계 시장이 활짝 열린 것이다. 예상대로 아르마니는 대박을 쳤다. ‘아르마니 후광’으로 김 사장은 펜디 휴고보스 베르사체 돌체앤가바나(D&G) 등 수많은 브랜드들을 추가로 얻게 됐다. 1998년 말 25억원에 달했던 빚은 3년여 만에 ‘제로’가 됐다.

이후론 승승장구였다. 2009년 아르마니 브랜드를 보유한 미국 파슬이 ‘한국 직진출’을 선언하며 국내 판권을 회수해갔지만, 미리 대비한 덕분에 별다른 타격은 받지 않았다. 폴스미스, 로즈몽 등을 추가로 확보하는 동시에 ‘명품 시계’ 분야로 영역을 넓혔던 것이다. 우림FMG는 명품 시계·보석 브랜드 쇼파드에 이어 작년에는 ‘세계 최고의 시계’로 꼽히는 파텍필립의 서울 강남지역 딜러로도 선정됐다.

○한국시계로 세계 무대 도전장

김 사장은 시계 판매만 놓고 보면 이미 ‘그랜드 슬램’을 이뤘다. 매출(연간 1700억원), 보유 브랜드 수(30여개), 시계 판매량(연간 30만개), 유통망(100여개) 등에서 단연 국내 1위이기 때문이다.

그의 다음 목표는 판매를 넘어 직접 제조에 나서는 것이다. 연습 게임은 끝마친 상태. 김 사장은 자신이 만든 주얼리 브랜드인 ‘스톤헨지’에 우림FMG가 직접 제작한 시계를 지난해 처음 넣은 데 이어 얼마 전부터는 ‘루이까또즈’ 본사로부터 라이선스권을 따내 루이까또즈 시계도 만들고 있다. 다음달에는 LG패션 브랜드인 ‘헤지스’ 시계도 내놓는다.

지금은 마치 패션업체처럼 우림FMG가 상품 기획 및 디자인만 맡고, 생산은 시계줄 문자판 케이스 무브먼트(동력장치)별로 국내외 전문업체에 외주를 주는 방식으로 만들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무브먼트 등 핵심 부품은 우림FMG가 직접 맡는다는 구상이다.

“1970~1980년대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시계 부문 상을 휩쓴 나라가 어디인지 아세요? 바로 한국입니다. 지금은 한국 시계가 끝났다고들 하지만, 그 손기술이 어디 가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한번 도전해 보려는 겁니다. 그동안 시계를 300만개 넘게 팔면서 ‘될 만한 시계를 구분해내는 눈’은 제가 갖고 있거든요. 안목 있겠다, 손재주 있겠다…. 한국이 못할 게 뭐가 있나요. 국내 중소 시계 부품업체들과 손잡고 ‘메이드 인 코리아’ 시계로 세계시장에 도전할 겁니다.”


출생-1961년 서울 가족-부인과 1남1녀 학력-영동고, 경희대 영문과

경력-수입잡화점 메이퀸 오픈(1983년), 패션전문회사 우림T&C 설립(1989년), 우림FMG(패션마케팅그룹)로 사명 변경(2007년), 면세점사업 시작·더가브리엘 레스토랑 설립(2008년), 모범납세기업상 수상(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