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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역사 이야기]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정당했는가?

후암동남산 2012. 7. 1. 06:37

 

[우리역사 이야기]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정당했는가?

고려 말 우왕과 최영 장군이 주도한 명나라 원정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다.
이에 대해 반역이라는 견해와 불가파힌 선택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명 원정의 성공 가능성 여부가 어느 쪽 견해가 옳은지 판단하는 주요한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

1. 고려와 명의 줄다리기

공민왕 암살이라는 비상사태를 신속히 수습하여 우왕이 즉위하였어도 근본적으로 안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고려는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북원(명에 의해 몽고 초원으로 쫓겨간 이후 몽고 제국을을 이르는 말)은 고려의 도움을 얻으려 애썼고 고려는 북원, 명과 동시 통교하며 시세를 관측했다. 명은 고려를 의심하여 조선 건국까지 고려와 명의 대치관계는 지속되었다.


고려가 북원과 통교하자 불안을 느낀 명은 우왕 2년(1376) 3월 정요위에 파견된 고려 사신 김용(金龍)에게 고가노(高家奴)가 쓴 형식으로 경고의 글을 전달했다. 고가노는 원이 쇠퇴하자 고려 여자와 혼인하는 등 고려에 의지하였으나 홍무 5년(1372) 명에 귀순하여 정요위의 지휘(指揮)가 되었다.

김용은 6월에 개경에 돌아와 명의 국서를 전달하였는데 대략의 내용은 머지않아 명의 대군이 나하추를 칠 것이며 코코 테무르와 나하추가 합세하여도 가망이 없을 것, 고려는 명에 복종하여 고려로 넘어간 요동 지방의 백성을 송환하고 조공하기로 약속한 말을 속히 보내는 것이 국익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10월에는 북원의 병부상서가 와서 중서 우승상 코코 테무르의 글을 전했다. 톡토 부카를 고려왕으로 책봉한 것은 공민왕이 후사가 없는 줄 알고 한 일이며 명이 반드시 고려를 집어 삼킬 것이니 중국을 수복하려는 원과 연합하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명사』에는 코코 테무르가 홍무 8년(1375) 8월 기유일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북원의 사정은 그리 밝은 전망을 기대할 수 없었다. 원나라 말기에 극심했던 지배층의 내분이 초원에서도 계속되었다. 한의 권위는 실추되고 유목민 군대를 이끄는 장군들이 실권을 장악하여 대립하였다. 우왕 3년(1377) 7월 북원의 선휘원사(宣徽院使)가 고려에 와서 정요위 협공을 제의하고, 9월에도 나하추가 사신을 보내어 역시 정요위 협공을 요청했어도 거절한 것은 북원의 국세를 고려가 파악한 때문일 것이다.【고려는 사신 이외에도 정보원을 북원과 명에 보내어 정보 수집에 열중하였다.】

선광(宣光) 8년(1378, 우왕 4년, 홍무 11년) 4월 북원의 소종은 41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아우(아들이라고도 전한다)인 토구스 테무르(脫古思帖木兒, 豆叱仇帖木兒)가 즉위했다. 7월 원의 사신이 고려에 와서 토구스 테무르의 즉위를 통보하였다.



우왕 5년(1379) 3월 하정사 심덕부(沈德符) 등이 귀국하면서 명 태조가 친필로 쓴 조서를 가져 왔다. 조공을 명의 요구대로 바치지 않으면 정벌하겠다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너희들이 온 것은 간사한 자의 간계를 받아 부득이 와서 짐을 속이려 하는 것이다. 이제너희들을 돌려보내는 명을 내리니 너희들은 고려의 우두머리 우(禑)에게 짐의 말을 전하라.

(고려는) 죄 없는 우리 사신을 죽인 원수이니 집정 대신(執政大臣)이 와서 조회하고 약조대로 세공(歲貢)을 바치지 않는다면 뒷날에 정벌을 면치 못하리라.

창해(滄海)를 너희들만 가지고 있는 줄 아느냐. 내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수천 척의 함대와 수십만의 정병을 인솔하고 돛을 달고 동으로 가서 우리 사신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때 그 무리를 다 죽이지 못한다 해도 태반을 포로로 잡지 못하겠는가. 너희들이 감히 가벼이 볼 수 있는가.




심덕부 일행은 명 태조가 홍무 10년(1377) 12월 중서성에 하달한 칙유(勅諭)도 필사하여 가지고 왔다. 중서성에 내린 칙유이지만 내용은 고려에 대한 요구 사항이다. 이 부분은 다음과 같다.




중서성에서 사람을 보내어 저들에게 가서 뒤를 이은 왕이 어떠한지 정령(政令)이 시행되고 있는지 물어보라. 정령이 여전하고 뒤를 이은 왕이 감금되어 있지 않으면 전왕이 언약한 바대로 금년에는 말 1천 필을 공납하되 집정 대신의 절반이 내조하게 하라. 명년부터는 금 100근, 은 1만 량, 양마(良馬) 100필, 세포(細布) 1만 필을 매년 상례로 바치게 하라.

그곳에 구속된 요동의 백성들은 몇 만 명이던 간에 있는 대로 모두 돌려보내야만 뒤를 이은 왕이 확실히 왕위에 있고 정령이 시행된다는 것을 짐이 의심하지 않겠다.




이 칙유 역시 고려에 대한 원정을 협박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는 반드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이 저지른 짓이니 후일 반드시 여러 가지 간계를 부려 우리 변경을 소란하게 할 뿐 아니라 고려 백성들에게도 큰 재난을 끼칠 것이다.

짐이 보건대 이 간악한 자들은 (고려가) 바다로 둘러싸이고 겹겹이 험한 산이 있음을 믿고 흉계를 부리며 날뛰면서 우리 조정에서 한나라, 당나라와 같이 군사를 동원하려는지 보고 있다.

한나라나, 당나라의 장수들은 말 타고 활 쏘는 데는 능숙했으나 배를 조종하는 데는 서툴러 바다를 건너기 어려웠다. 짐은 전 중국을 평정하고 오랑캐들을 물리치면서 수전, 육전을 다 거쳤으니 (짐의) 장수들을 어찌 한나라, 당나라 장수에 비하랴. 그러나 다시 사신을 보내어 뒤를 이은 왕의 안부를 묻노니 칙령대로 시행하라.




이처럼 명 태조는 고려에 대해 노골적인 전쟁 협박으로 전략물자인 말을 얻고 병력 확충을 위해 고려로 도피해간 민호(民戶)를 송환받겠다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였다. 고려가 명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힘으로 위압하는 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전면전을 무릅쓰고 이를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도평의사사에서는 명의 요구를 상당 부분 들어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심덕부 일행을 따라 온 명의 사신 소루(邵壘)와 조진(趙振)은 도중에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러 고려에서 문천식(文天式)과 오계남을 사신으로 북원에 보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들은 “고려에서 옛날에도 사신을 죽였고 지금 또 딴 마음을 품으니 내가 고려에 가서 죽느니 차라리 우리나라에서 죽겠다” 라며 돌아갔다.

6월에는 북원의 사신이 와서 연호를 천원(天元)으로 고쳤다고 알렸고 나하추의 아들 문하라부카도 친선을 도모하러 왔다. 요동 도사(都司 ; 도지휘사사의 약칭)가 이를 알고는 8월에 고려의 도평의사사에 강력히 항의하는 자문을 보내왔다. 10월 고려 조정은 문하평리 이무방(李茂方), 밀직사 배언(裵彦) 등을 보내어 세공으로 금 31근 4냥, 은 1천 냥, 백세포(白細布) 5백 필, 흑세포(黑細布) 5백 필, 잡색마(雜色馬) 2백 필을 가져가게 하였으나 명이 수량이 약속과 다르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역시 고려가 북원과 통교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후 우왕 8년(1382) 11월 정몽주의 사행까지 명은 고려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무 14년(1381, 우왕 7년) 9월 명 태조는 부우덕을 남정장군, 남옥(藍玉)과 목영(沐英)을 부장군으로 임명하여 몽고 제국의 황족인 운남(雲南)의 양왕(梁王)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 원정에 27만 군사와 군마 22만 필이 동원되었다. 12월 백석강(白石江)에서 대패한 양왕은 자결하였고 이듬해 정월 명은 운남을 완전히 평정하였다.



명과의 긴장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우왕 8년(1382) 2월 고려는 정요위의 침공에 대비하여 문하평리 한방언을 서북면 도체찰사 겸 안주도 상원수로, 김용휘(金用輝)를 도안무사(都按撫使) 겸 안주도 부원수로 임명하였다.

4월 명 태조는 양왕의 가솔을 고려의 제주도로 보내어 살게 하였는데 7월 명의 사신이 이들을 인솔하여 고려에 왔다. 이로서 고려는 명의 운남 평정을 알게 되었는데 명이 다음 차례로 고려를 칠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우왕 9년(1383) 정월 계축일 나하추의 아들인 문하라부카(文哈剌不花)가 사신으로 정조사로 고려에 왔다. 그를 통해 나하추는 옛날과 같은 우호를 이루자고 청하였다. 명과 고려는 서로 정보원을 많이 파견하고 있었는데 나하추의 사신이 고려에 와서 후대 받고 있는 것이 즉시 요동 도사에 알려졌다. 요동 도사는 곧장 고려의 도평의사사에 위협하는 자문을 보내왔다.




고려는 대명(大明)을 섬기므로 나하추와 통호(通好)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듣건대 나하추가 문하라부카를 파견하여 우호 관계를 청한데 대해 고려는 후대하여 위로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대명을 섬기는 뜻인가. 죄를 면하고 싶거든 문하라부카를 이곳으로 압송하여 성의를 표시하라. 그렇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말라.




이후 요동 도사 소속의 명군이 고려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명의 침략 가능성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고려는 화전 양면으로 대응하였다.

8월 문하찬성사 조인벽을 동북면 도체찰사, 판 개성부사 한방언을 상원수, 문하찬성사 김용휘를 서북면 도순찰사, 전 판도판서 안사조(安思祖)를 강계 만호로 임명하였다. 또한 같은 달 문하찬성사 김유(金庾)와 밀직부사 이자용(李子庸)을 명에 파견하여 우왕의 책봉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명 태조가 우왕을 책봉하는 것은 고려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공인하는 의미가 있었으므로 고려는 우왕 즉위 초부터 이를 요청했다. 명 태조는 여러 이유를 들어 거부했는데 이는 언제라도 고려를 적으로 간주해 침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고려로서는 우왕의 책봉이 절실한 과제였다.

명 태조는 해로로 명에 들어간 이들 고려 사신을 투옥하고는 고려의 통사(通事) 최연(崔涓)과 장백(張伯)에게 그가 예부에 내린 자문을 갖고 귀국하게 하여 그의 의사를 전달했다.

10월 니성 만호(泥城萬戶) 조민수가 병마사 박바얀(朴伯顔)을 요동으로 정찰을 보냈는데 그가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안산(鞍山) 백호(百戶) 정송(鄭松)의 말입니다.

요동 총병관이 명 황제에게 “타타르(韃韃 ; 몽고)가 문하라부카를 고려로 보내어 더불어 요동을 공격하려 하니 원병을 파견해 구해주시기를 청합니다” 라고 아뢰어 명 황제가 손 도독(孫 都督) 등에게 전함 8,900척을 이끌고 고려를 정복하라고 명령했다. 손 도독이 요동에 도착하여 요동의 명군을 셋으로 나누어 고려를 향하여 출발했다. 그때 마침 타타르가 혼하구자(渾河口子)를 공격하여 관군(官軍 ; 명군)을 모두 죽이고 혼하(渾河)에 둔병(屯兵)하고 있었는데 손 도독의 군사가 교전하여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우왕은 이 보고를 듣고 도평의사사에 국경 방어 대책을 논의하게 하였다.

11월 최연과 장백이 돌아와 자문을 고려 조정에 전하였는데 5년간 밀린 세공(歲貢)으로 금 5백 근, 은 5만 냥, 포 5만 필, 말 5천 필을 보내라는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고려에 군사원정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명이 고려에 공물로 요구한 수량은 고려에 큰 부담을 주는 막대한 것이었다. 이처럼 명 태조는 고려에 대해 ‘전쟁이냐 조공을 통한 평화냐’ 하며 줄기차게 협박하였다. 이는 고려와 명 양측에서 보아도 벼랑 끝 외교 술책이었는데 이때는 유화책을 펴는 측이 손해 보기 마련이다. 당시 고려에서 명과의 일전을 불사하는 견해를 가진 위정자는 소수로 우왕과 최영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최영은 고려군을 정비하고 조련하는 총책임자로 군 육성과 왜구 퇴치에 여념이 없었다. 최영은 우왕 3년 3월에 육도도통사(六道都統使)가 되었고 같은 해 승도(僧徒) 2천, 선장(船匠) 100여 명을 동원하여 800척의 전함을 만들어 고려 수군을 재건하였다. 우왕 6년 4월부터는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도 겸하였으며 우왕 8년에는 다시 승려를 동원, 거함 130여 척을 만들어 전국의 요충지에 배치하였다. 그는 문하시중이나 수문하시중 자리를 맡으면 직접 출전을 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중앙의 최고위 관직을 맡기를 꺼려했다. 도평의사사에서의 발언권도 크지 않았다.

12월 도평의사사의 회의에서 참석자 거의 모두가 주원장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공물을 마련하기 위해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이라는 특별 관청이 설립되었고 문무백관들이 재물을 내놓는 등 모든 고려인에게 그 부담이 돌아갔다.



우왕 10년(1384) 윤 10월 연산군(連山君) 이원굉(李元紘)이 공물을 가지고 명으로 갔다. 우왕은 출발하는 이원굉에게 친히 술을 주면서 “국가의 안위가 경(卿)의 이번 길에 달려 있

으니 경은 매사를 신중히 하여 국가의 수치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북원과도 계속 통교하였고 이를 위해 명에 대한 군사 작전도 벌였다. 이원굉은 요동에 도착하자 요동 도사가 하라쌍성(哈剌雙城)에 군사를 파견하여 돌아가는 북원 사신을 체포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고려 조정에 알렸다. 도평의사사에서 만호(萬戶) 김득경(金得卿)에게 통보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11월 요동 도사의 명을 받은 여진족 천호 백파파산(白把把山)이 70여 기병을 인솔하고 북청주(北靑州)를 기습하였다. 김득경은 거짓 후퇴하였다가 어둔 밤에 반격하여 적의 병영을 불사르고 40여 명을 베었다.



우왕 11년(1385) 2월 요동 도사는 백호 정여(程與)를 파견하여 김득경이 명군을 살해한 것을 추궁하고 김득경 압송을 요구하였다. 고려 조정은 이원굉의 사행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므로 부득이 김득경을 체포하여 명으로 보내었다. 또한 장자온을 시켜 뇌물로 정여에게 금 50냥을, 수행원 3명에게는 은 50냥 씩을 주었다.

김득경이 떠날 때에 도평의사사에서는 “북청주의 사건은 네가 그 책임을 지고 나라에는 누를 끼치지 마라” 고 하니 김득경은 “다만 도당의 통첩을 받들어서 행하였을 뿐이니 상국에서 만일 묻는다면 감히 끝내 숨기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김득경이 떠난 후 문하시중 임견미가 걱정하니 밀직제학 하륜(河崙)이 도적을 위장하여 죽이라고 권하였다. 김득경은 철주(鐵州)에서 ‘도적’에게 살해되었다.




공물이 명에 도착하자 명 태조는 그동안 억류하거나 대리(大理 ; 토번)로 유배한 고려 사신들을 바로 방환하였다. 이들 가운데 김유 등 5인이 우왕 11년(1385) 4월 귀국하자 우왕은 이들을 불러 술을 주며 위로하기를, “경들이 사명을 받들어 2만 8천리의 절역(絶域)에 귀양 갔다가 3년 만에 살아 왔으니 내가 매우 민망히 여긴다” 하였다.

고려는 5월에 문하평리 윤호(尹虎)와 밀직부사 등을 보내어 책봉을 요청하였다. 7월 선지철(宣之哲) 등 억류되었던 사신 38인이 귀국하였으며 명 태조는 우왕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하였다. 9월 명의 책봉사 장부(張溥)와 주탁(周倬)이 개경에 도착하였다. 고려 위정자들은 이로서 명과의 전쟁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기뻐했다. 책봉을 받은 우왕은 이를 태묘(太廟)에 고하였다.

그러나 명 태조는 ‘성인의 면과 호걸의 풍과 도적의 성(性)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가 우왕을 책봉한 것은 기만 술책이었다.

나하추는 북으로 북원과 연결하고 남으로는 고려와도 교통하여 명군이 북원을 원정하는데도 큰 장애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하추 세력을 소멸시키지 못하면 명의 안정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명 태조는 나하추를 공략하기에 앞서 압록강․동가강․휘발하 상류 일대를 경략하여 고려와의 연결을 차단하였다. 또한 몽고의 잔여 세력과 여진족 각 부족을 회유하여 나하추를 고립시키는데 힘썼다.



홍무 18년(1385, 우왕 11년)부터 명은 대대적으로 나하추 토벌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고려와 나하추가 연합할 가능성에 대비하여야 했다. 우왕 책봉은 계략이었다. 명의 침략을 받을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고려가 믿어야 명이 나하추를 토벌할 때 고려가 나하추의 구원 요구를 거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8월에는 풍승, 부우덕(傅友德), 남옥(藍玉)으로 하여 북평을 수비하게 하였다.

우왕 12년(1386, 홍무 19년) 2월 고려에서는 명에 정몽주를 파견하여 세공의 삭감을 청원하였고 명 태조는 흔쾌히 받아들여 ‘3년에 1회 조공, 공마(貢馬) 50필’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나하추 토벌을 위해 명은 다시 말 5천 필을 요구하였다. 이는 11월에 성절사로 갔다가 귀국한 안익(安翊)에 의해 고려 조정에 전해졌다. 비록 段子 1만 필, 錦布 4만 필이라는 대가를 지불한다고 하였으나 지난번 5년 치 세공으로 마필이 많이 빠져나간 다음이므로 무리한 요구였다. 고려는 12월 전객령(典客令) 곽해룡(郭海龍)을 명에 보내어 “말의 산출이 풍부하지 못하고 품종이 왜소하여 대가를 받을 수 없으나 힘써 변통하겠다”는 말을 전달하였다.



홍무 20년(1387, 우왕 13년) 정월 계축일 명 태조는 풍승을 정로대장군으로, 부우덕과 남옥을 부장군에 임명하여 20만 대군을 이끌고 나하추를 토벌하게 했다. 또한 곽해룡에게 고려 사신의 요동 내왕을 금지한다고 통보했다. “이미 일단 왕래를 허락하였으나 내왕이 오래 가면 쟁단이 이로부터 생겨 백성이 화를 입게 되니 이제부터 내왕을 금절한다.”고 하였으나 고려와 나하추와의 접촉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달에 고려에서는 그동안의 무리한 조공으로 광흥창(廣興倉)이 비는 사태가 일어나 문무백관의 녹봉을 줄여 지급하였다.

2월 곽해룡이 돌아와 명의 요동 폐쇄를 전했는데 이는 명이 고려를 경계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므로 고려 조정에 충격을 주었다.

3월 신해일 명군은 만리장성을 나와 4개의 성을 쌓기 시작했다. 나하추와 북원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6월 경자일 임강후(臨江侯) 진용(陳鏞)의 부대는 나하추 군의 기습에 전몰하였으나 풍승의 부대는 계묘일 나하추의 근거지인 금산(金山)에 이르러 포위하였다. 협상이 벌어져 정미일 나하추는 그 무리 20만을 이끌고 명에 항복하였다. 이로서 만주 일대의 몽고 잔여 세력은 무너졌으며, 명과 고려 사이에 완충 지대는 사라졌다.



고려는 3월에서 6월까지 말 5천 필을 다섯 차례에 걸쳐 요동으로 보내었다. 명의 요동 도지휘사사는 첫 번째 마필이 도착하였을 때에 노약․왜소한 말을 골라서 돌려보냈으며 다섯 번째 운송된 마필 1천은 전부 돌려보냈다. 말은 3등급으로 분류되어 상등은 단자 2필과 포 8필, 중등은 단자 1필과 포 6필, 하등은 단자 1필과 포 4필로 환산하여 모두 단자 2,670필에 포 30,186필이 대가로 고려에 지급되었다. 단자가 예상 수량보다 많이 적어진 것은 상등마보다 하등마가 많았기 때문이며 이는 그만큼 부족한 말을 무리하여 변통했음을 의미한다.



계속되는 명의 횡포에 고려의 조야에서는 반감이 쌓여가고 있었고 조공으로 평화를 사는 화평 정책에 대한 회의가 커가고 있었다. 특히 최영이 이러한 화평 정책에 반대하였다. 이전부터 고려에서는 명이 사방을 평정한 후 고려를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견해가 적지 않았고 우왕은 이에 동조하여 군사 훈련에 열심이었다. 고려의 화평 정책이 수정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는데 이때 와서 가시화되었다.

우왕 대에 오랫동안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해 조공에 의한 화평책이 추진된 것은 미약한 왕권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우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데다가 외가가 미천하여 의지할 만한 곳이 없었다. 우왕 초기에는 이인임과 최영이 보필하고 명덕 태후가 왕실의 최고 웃어른으로 정국을 이끌었다. 우왕 6년 명덕태후가 별세한 이후 우왕은 신하들에게 휘둘리자 매우 낙담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우왕 8년 이후로는 임견미와 염흥방이 권신이 되어 국정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무사안일을 꾀했으므로 대외 관계에서 고식적인 화평책을 폈고 과거를 통해 관로에 오른 유생들도 명에 대한 사대를 당연시하여 이를 지지했다.

조공을 통한 화평책을 혐오한 우왕과 최영이 합심하여 권신들을 제거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2. 고려의 요동 원정




나하추를 제거한 여세를 몰아 주원장은 북원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다. 홍무 20년(1387) 9월 정미일 남옥을 정로대장군에 임명하고 15만 대군을 이끌고 토구스 테무르의 본거지를 공격하게 하였다.

11월 요동 도사에서 보낸 세작(細作 ; 정보원)들이 고려에 횡행하자 우왕은 서북면 도순무사 정희계(鄭熙啓),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 니성, 강계, 의주의 만호들에게 비단 한 필씩을 주어 격려하였다. 또 사전(寺田)의 조세 절반을 군량미로 저장하게 하였으며 각 도 안렴사들에게는 장수들의 능력과 수령의 근무 성적을 매 월말에 도당에 보고하게 하였다.

나하추 평정을 축하하러 보냈던 지문하부사 장방평(張方平)이 요동도사의 입국 거절로 돌아왔다. 우왕 책봉이 허구임이 분명해졌다. 좌시중 반익순(潘益淳)은 최영에게 이 일을 알리고는 말하였다. “공(公)은 선왕이 의지하고 중히 여기었으며 온 나라가 촉망합니다. 이제 나라가 위태하게 되었는데 왜 힘껏 도모하지 않습니까.”

최영은 탄식하며 말하였다. “집정(執政)한 자들이 이익을 좋아하고 악한 짓을 하여 스스로 화를 부르니 늙은이가 어찌하겠소.”

원로대신들이 회의를 열어 한양(漢陽)에 산성을 수축할 것과 전함을 수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때 요동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 도평의사사에 고하기를, “명 황제가 앞으로 처녀, 수재 및 환자(宦者) 각 1천 명과 마소 각 1천 필을 요구할 것이다” 하였다.

최영은 도평의사사에 나가 “그렇다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야 할 것이다” 라고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12월 경오일 명 태조는 요동에 기존의 요동도지휘사사에 추가로 삼만위지휘사사(三萬衛指揮使司)를 설치하라는 령을 내렸다. 이틀 후인 임신일에는 호부(戶部)에 명하여 고려왕에게 철령(鐵嶺) 이북․이동․이서의 땅은 개원(開元)에 속하며 이 지역의 토착군민과 여진인, 몽고인, 고려인 등은 요동도사의 관할하에 둔다는 자문을 보내게 하였다.




한편 같은 달 고려에서는 정국을 급변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우왕은 도당으로 하여금 국가와 왕실의 토지나 그에 속한 노비 및 일반 백성을 침탈한 자들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때에 권신 염흥방의 가노(家奴)가 전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땅을 빼앗다가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 밀직부사 조반이 염흥방의 가노 이광(李光)을 배주(白州)에서 베었다. 처음에 이광이 조반의 토지를 뺏으니 조반이 염흥방에게 애걸하여 돌려받았다. 이광이 또 그 땅을 뺏고 능욕하니, 조반이 이광에게 애청하였는데 이광은 더욱 포악하게 굴었다.

조반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수십 명의 말 탄 사람으로 포위하여 이광을 베고 그 집을 불태우고는 서울로 와서 염흥방에게 말하려 하였다. 염흥방이 이 일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조반을 모반했다고 무고하여 순군(巡軍)으로 하여 조반의 어머니와 처를 잡아들이도록 하고 400여 명의 기병을 배주에 보내 조반을 잡도록 하였다. 기병이 벽란도(碧瀾島)에 이르자, 뱃사공이 “조반은 이미 5명의 말 탄 사람과 함께 서울로 갔다”고 하였다.

(『高麗史節要』,禑王 13年 12月)




이광은 전국에 산재한 염흥방의 농장을 관리하는 관리인의 하나였다. 이광의 횡포는 염흥방이 어떠한 방식으로 토지를 늘렸는지 잘 보여준다.



우왕 14년(1388) 정월 초하루 염흥방은 우왕에게 강권하여 조반을 수배하였다. 체포된 조반은 순군옥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6, 7 명의 탐욕스러운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놓아 남의 노비와 토지를 빼앗고 백성들을 해치며 학대하니 이들이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돕고 백성을 해치는 도적을 제거하려 한 것인데, 어찌 반란을 꾀한다고 하느냐.” 라고 항변하였다. 염흥방은 고문을 통해 기어코 반역 사건으로 몰려 했다.

5일 우왕은 최영의 집을 방문하여 좌우를 물리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사전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있던 우왕과 최영은 조반의 옥을 계기로 무력으로 이 시기 사전 겸병으로 악명 높은 염흥방․임견미 등의 권신들을 무력으로 제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즉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7일 우왕은 조반과 그의 모친, 아내를 석방시키면서 “재상들이 이미 부유하니 봉록을 주는 것을 중지하고 먼저 먹을 것이 없는 병졸에게 주어라” 라는 령을 내렸다(7일은 고려에서 관리들에게 봉록을 주는 날이었다). 이날 염흥방이 체포되어 순군옥에 갇혔다.

8일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에 명하여 병력을 동원, 왕궁을 숙위하게 하고 영삼사사 임견미, 찬성사 도길부(都吉敷) 체포령을 내렸다. 임견미는 “7일 만에 녹을 주는 것은 옛 제도이다. 지금 까닭 없이 폐지하니 어찌 임금된 도리인가. 옛부터 임금이 그릇된 것을 신하로서 바로 잡은 자가 있다”고 하며 무력으로 맞서려 하였다.

임견미는 사람을 보내 그의 도당이 모이게 하려했으나 이미 갑옷 입은 기병이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임견미의 집은 남산 북쪽에 있었는데 조금 뒤에 남산을 쳐다보니 기병이 열을 지어 포진하고 있었다. 임견미는 전의를 잃고 순순히 붙들렸는데 탄식하며 말했다. “광평군(廣平君 ; 이인임)이 나를 그르쳤도다.”

이전에 임견미와 염흥방이 병권을 쥔 최영을 꺼리어 항상 해치려 하였으나 이인임이 굳이 말렸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10일에는 우시중 이성림(李成林 ; 염흥방의 異父兄), 찬성사 반복해(潘福海), 대사헌 염정수, 지밀직 김영진(金永珍 ; 임견미의 사위), 밀직부사 임치(林㮹) 등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11일 염흥방, 임견미, 도길부, 이성림, 염정수, 반복해, 김영진, 임치를 베어 죽이고 그 족당(族黨)인 찬성사 김용휘, 삼사우사 이존성(李存性 ; 이인복의 손자로 이성림의 사위), 판개성 임제미(林齊味 ; 임견미의 아우), 밀직 홍징(洪徵 ; 염흥방의 매부), 밀직 임헌(任獻), 전법판서 이송(李竦), 임헌의 세 아들 임공위(任公緯), 임공약(任公約), 임공진(任公縝), 반덕해(潘德海 ; 반복해의 형), 개성윤 정각(鄭慤 ; 반복해의 매부), 임견미의 문객인 박인귀(朴仁貴), 이희번(李希蕃), 우시중 반익순(潘益淳 ; 반복해의 부친), 우사의대부 신권(辛權 ; 임견미의 조카사위), 대호군 신봉생(辛鳳生 ; 도길부의 사위), 집의(執義) 이미생(李美生 ; 임견미의 族子), 홍징의 세 아들 홍상연(洪尙淵), 홍상빈(洪尙淵), 홍상부(洪尙淵), 임견미의 가신 김만흥(金萬興) 등을 참수했다. 또한 임견미 등의 집을 몰수하였다.

우왕은 이어 환관 김량(金亮)과 김완(金完)을 경기 좌우도 찰방(察訪) 겸 제창고 전민사(諸倉庫田民使)로 임명하여 보내어 권신들이 탈점한 토지와 백성을 조사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15일에 우왕은 인사 발령을 하여 최영을 문하시중, 이성계를 수문하시중, 이색을 판삼사사, 우현보(禹玄寶)․윤진(尹珍)․안종원(安宗源)을 문하찬성사, 문달한(文達漢)․송광미(宋光美)․안소(安沼)를 문하평리, 성석린을 정당문학, 왕흥(王興)을 지문하사, 인원보(印原寶)를 판밀직사사로 임명하였다.

18일 다시 이미 처형당한 자들의 족당 50여 명을 참수했다. 서성군(瑞城君) 염국보(廉國寶 ; 염흥방의 형), 염치중(廉致中 ; 염국보의 아들), 안조동(安祖同 ; 염국보의 사위), 성균제주(成均祭酒) 윤전(尹琠 ; 염흥방의 사위), 호군 최지(崔遲 ; 염흥방의 사위), 대호군 김함(金涵 ; 반복해의 매부), 호군 임맹양(林孟陽 ; 임제미의 아들) 등이다.

19일 비로소 관리들에게 녹봉을 주었다.

곧 이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세가들이 탈점한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고 안무사를 각 도에 파견하여 권세가들의 수족이 되어 불법 탈점을 자행한 가신과 노복을 잡아 베어 죽였는데 그 수가 1천여 명에 달했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은 우왕의 탐학한 권세가 숙청을 찬양하여 시를 지었다.




의를 떨쳐 인을 베풀고 새로이 호령하니 奮義施仁號令新

개연한 영단(英斷)에 천신(天神)이 감동하네. 慨然英斷動天神

날뛰던 무리들을 하루아침에 다 소탕하니 一朝淸掃白拈賊

나라에 헐벗은 백성이 모두 없어졌네. 四海渾無赤脫民

늠름한 위엄이 강포한 무리들을 치니 凜凜威加强暴類

화목한 즐거움이 곤궁한 이들에게 흘러넘치네. 凞凞樂洽困窮倫

우러러 북두칠성 별빛이 환히 빛남을 보니 仰看星斗文章煥

나라의 터전이 억만년 봄인 줄 비로소 깨달았네. 方覺皇基億萬春







순 임금이 사흉(四兇)을 제거한 것과 똑같이 正似虞時去四兇

사방 백성들이 세상이 변함을 모두 기뻐하네. 四方咸樂變時雍

온 나라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하고 率濱民俗應安業

권세 떨치던 못된 것들 벌써 자취를 감추었네. 當道豺狼已絶蹤

물결 고요하고 바람 잠잠하니 바다 빛 너그럽고 浪靜風恬寬海色

구름 걷히고 해 떠오르니 하늘 얼굴도 숙연하네. 雲收日杲肅天容

이제부터 성한 덕이 먼 곳까지 흘러가 自今盛德流諸遠

화하(華夏)와 만이(蠻夷)가 다 함께 복종하리. 華夏蠻夷盡服從







벼슬 바다에 뜨고 가라앉는 것도 반드시 원인이 있으니 宦海浮沉必有因

밝고 밝은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네. 明明頭上在蒼旻

가련하구나! 간사한 권력배와 토호 무리들 可憐比儻權豪輩

망령되게도 사직의 충량한 신하라고 자처하다니. 妄謂忠良社稷臣

영화로운 이름 얻고도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우니 旣得榮名難保命

많은 이익 탐내다가 자기 몸을 잊었구나. 專征厚利頓忘身

토지가 바로 집을 망치는 화근이니 土田眞是侯家崇

남의 땅을 빼앗자마자 사람을 빠트리네. 纔得兼倂卽陷人





하늘이 이 백성을 마음대로 살게 하려면 天使斯民得意居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모두 처형해야 하리. 姦凶儻輩盡登車

예전에는 노략질하는 구름 속의 송골매였지만 昔爲標掠雲間鶻

지금은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부러워하네. 今羨潛游水底魚

하루아침에 심신이 취해 어리어리하니 一朝心神醉兀兀

백년의 영화와 부귀가 한낱 꿈이구나. 百年榮貴夢遽遽

헐뜯고 기리는 것이 隱士의 庭園에는 미치지 못하니 毁譽不到林泉下

두어 자 되는 낚싯대와 한 상자의 책뿐일세. 數尺漁竿一笈書







돌고 도는 것이 하늘의 운수인데 循環是天運

이 이치 헤아리기 참으로 어렵네. 此理固難量

상제께서 형감(衡鑒)을 여시고 上帝開衡鑒

우리 임금께서는 기강을 펼치시니 吾王布紀綱

강퍅한 무리들은 모두 죄를 받고 豪强皆伏罪

백성들은 함께 빛을 보네. 黎庶共瞻光

다른 나라까지 위풍이 떨치고 異域威風振

동방에 교화의 날이 길어지니 東方化日長

가시 숲에는 묵은 독기가 걷히고 棘林收瘴毒

난초 밭에는 아름다운 향기 퍼지네. 蘭圃播馨香

포악한 자를 막으니 나라의 운이 영원하고 禁暴謀猶遠

쓰러진 곳을 바로잡으니 도업이 번창하네. 扶顚道業昌

아아! 늙고 병든 이 몸도 嗚呼抱衰疾

강개한 마음으로 충성되기를 사모하니 慷慨慕忠良

태평곡을 한가롭게 부르며 閑放太平曲

임금께 장수 비는 술잔을 올리네. 祝君擎壽觴




원천석(元天錫, 1330~)


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隱士).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정용별장을 지낸

원열(元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을 지낸 원윤적(元允迪)의 아들로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권세가의 횡포를 개탄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일찍이 이방원을 가르친 일이 있어 그가 즉위 후 기용하려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방원이 집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耘谷詩史』에 실려 있는 회고시 등을 통해 그가 끝내 조선왕조에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씨조선 성립의 진실을 쓴 야사(野史)

6권을 저술했으나 증손 대에 불태워졌다.






2월 초 최영은 여러 재상들과 함께 요동을 공격하느냐 화친을 청하느냐 가부를 의논하였는데 모두 화친하자는 견해였다. 그러나 이때 요동도사가 파견한 이사경(李思敬)이 압록강을 건너와 철령(鐵嶺) 이북․이동․이서가 명의 영토라는 방문을 붙였다.

이어 설장수(偰長壽 ; 설손의 장남)가 남경으로부터 돌아와 구두로 주원장의 교시를 전하였다. 고려가 보낸 말이 쓸모없다는 것과 철령 이북을 요동에 귀속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철령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池內宏은 압록강 연안의 황성(皇城)으로 보았고 和田淸은 지금의 강원도와 함경남도 사이에 있는 철령으로 보았다. 연구자의 견해가 차이가 나는 것은 고려와 명이 인식하는 철령이 다른 것에 기인하는 듯 하다.】

우왕은 5도에 성을 수축하라 명하였고 여러 원수(元帥)들을 서북면에 보내어 명의 침략에 대비하게 하였다. 최영이 문무백관을 소집하여 철령 이북 할양 여부를 물으니 모두 불가하다 하였다. 우왕은 최영과 요동 원정을 밀의하고는 개경의 방리군(坊里軍)을 동원하여 한양에 중흥성(重興城)을 수축하게 하였다.

우선 외교적 해결을 위해 2월 하순 밀직제학 박의중을 밀직제사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철령위 설치 철회를 요청하는 표문을 전하게 하였다.

3월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서북면의 상황을 보고 하였다.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지휘(指揮) 두 사람을 보내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강계에 이르러 철령(鐵嶺)에 위(衛)를 세우려 하는데 명 황제가 이 위를 설치하기 위하여 진무(鎭撫) 등의 무관들을 미리 임명하였고 그들이 모두 요동에 도착하였습니다. 앞으로 요동으로부터 철령위까지 70개의 역참(驛站)을 설치하고 역참마다 백호(百戶)를 두려 합니다.




이 보고를 들은 우왕은 동강(東江)에서 돌아오면서 말 위에서 울며 한탄했다.

“여러 신하들이 나의 요동 공격 계획을 듣지 않더니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철령위와 역참 설치는 앞으로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역사적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중국을 통일한 왕조가 한반도로 침략하는 일은 흔히 있어온 터라 고려는 국운을 걸고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우왕은 전국 8도의 정병을 징발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명을 치겠다고 공언하였다. 재추들은 곧 올 명의 사신을 기다려 명의 진의를 알자고 하여 왕이 이에 따랐다. 명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 ; 명의 군 통솔기관인 오군도독부의 하나)에서 보낸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이 개경에 도착하자 우왕은 나가지 않고 판삼사사 이색이 백관을 영솔하고 맞이하였다. 왕득명은 철령위 설치를 정식 통보하였다.

이색이 돌아가 황제에게 고려의 시정을 잘 전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왕득명은 “천자의 처분에 달린 일로 나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를 들은 최영은 크게 노하여 왕에게 아뢰어 방문을 가지고 서북면과 동북면에 온 명의군사를 죽이게 하였다. 명의 군사 21명이 살해되었고 이사경 등 5명은 구금하였다.

명의 사신이 돌아가자 우왕은 국내의 죄수들을 모두 사면하고 문하찬성사 우현보에게 명하여 개성을 지키게 하고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우왕은 포부가 큰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권신들의 횡포에 시달렸으면서도 꾸준히 국왕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조반의 옥사를 기회로 하여 일거에 권신들을 숙청할 정도로 과단성이 있었다. 우왕은 일찍부터 요동 원정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어느 날 신우가 정몽주의 집에 가니 마침 정몽주가 기로(耆老)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최영이 술잔을 들어 권하니 신우가 말하기를 “내가 술을 마시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부왕 때의 늙은 재상들이 모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부왕을 보는 듯하여 온 것이다”하고 또 말하기를 “나무가 먹줄을 쫓으면 곧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들으면 현명해진다고 들었다. 경은 나라의 이해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가. 음주는 진정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최영이 갓을 벗고 감사의 말을 하기를 “전하의 이 말은 국가의 복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항상 이 말을 잊지 말 것이며 또한 신이 앞서 바친 편지에 있는 바를 실행하시기를 비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꿈에 경과 대적하여 싸워 이기고 나서 내가 탄 말을 본즉 나귀였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라고 말하였다. 윤환(尹桓)․이인임(李仁任)․홍영통(洪永通)․조민수(曺敏修)․ 이성림(李成林)․이색(李穡) 등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옛적에 원 세조는 꿈에 나귀를 보면 길하다 하여 항상 뜰에 나귀를 매여다 두고 꿈을 꾸려 하였으나 꾸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전하는 꿈에 나타났으니 그 얼마나 상서로운 일입니까. 태평성세를 눈앞에 바랄 수 있습니다. 다만 신들은 늙어 미처 보지 못할 것이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신우가 매우 기뻐하여 통음하고 최영에게 활을 주고 말하기를 “경과 함께 사방을 평정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때 최영과 우리 태조(이성계)는 이름을 떨쳐 상국(上國)의 조정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상국의) 사신 장부(張傅)와 주탁(周倬) 등이 국경에 이르러 우리 태조와 이색에 대해 물었다. 신우는 최영을 내보내어 교외에 머물게 하고 우리 태조는 동북면 도원수로 임명하여 장부 등이 보지 못하게 하였다.

(『高麗史』, 券113,「崔瑩 列傳」)




이는 우왕 11년(1385)에 있었던 일이다. 동년 7월 무인일에 지진이 나니 그 소리가 말이 떼로 달아나는 듯하였고 담장과 집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모두 나와 피하였고 송악 서쪽 고개의 바위가 무너졌다. 우왕은 “이 지진은 바로 하늘이 요동을 함몰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우왕이 요동 원정을 갈망하였음을 잘 드러내는 일화이다.




4월 1일 우왕이 봉주(鳳州)에 머물면서 최영과 이성계를 “과인이 요양(遼陽)을 치려하니 경들이 힘을 다하시오” 라고 당부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성계는 이른바 4불가론을 내세워 출정을 반대하였다.




지금 군사를 지금 출사하는 것은 네 가지 불가한 것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니 첫째 불가한 것이오, (농사철인) 여름에 군사를 발하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온 나라를 들어 원정을 하면 왜구가 그 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니 세 번째 불가한 것이오, 때가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이므로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는 것과 대군이 전염병에 거릴 것이 네 번째 불가한 이유입니다.




2일 우왕은 원정 강행 의사를 밝혔다. 이성계는 다시 원정 연기를 권했다.




전하께서 꼭 대계를 이루려면 서경에 머물러 가을을 기다려 출사하십시오. 곡식이 들을 덮을 때이니 대군의 식량이 풍족하여 북을 울리며 진군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때가 좋지 않으므로 비록 요동의 성 하나를 함락시킨다 해도 한창 비가 오니 군사가 전진할 수 없고 지치게 되며 양식이 떨어져 화만 초래할 뿐입니다.




최영은 원정 강행을 고집하였고 우왕도 마음을 굳혔다. 이성계의 말도 일리가 있었으나 이때 남옥이 지휘하는 명의 주력군 15만이 몽고 방면으로 출정 중이었고 요동에 주둔하는 명군도 대거 참전하였으므로 요동에 배치된 명군은 소수였다. 게다가 한족 출신보다 고려 여진 계통 병사가 많았던 것도 문제였다. 이들은 힘써 전투를 하지 않을 것이며 순순히 투항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공민왕 시절 고려의 원정군이 어렵지 않게 목적을 이룬 것도 이러한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최영이 원정을 서두른 것은 이를 노린 때문이었다. 실제로 고려의 출병 소식을 보고 받은 주원장은 크게 당황하여 친히 종묘에 나아가 전쟁의 길흉 여부를 점치기까지 하였다.

【조선 성종 18년(1487) 제주도에서 서울로 귀환하다가 풍랑으로 명의 강남에 표류하였던 조선 관인 최부(崔溥)는 이듬해 귀국길에 요동을 지나게 되었다. 5월 24일 그곳에서 조선인 승려 계면(戒勉)이 찾아왔는데 그가 말한 요동 지역의 군사 상황은 이랬다.




소승은 본디 조선 사람인데, 소승의 할아버지가 이곳으로 도망 온 지 지금 벌써 3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우리나라(本國)의 경계와 가까운 까닭에 왕래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많습니다. 중국인은 겁이 많고 용맹스럽지 못하여 도적(역주 ; 요동을 습격하는 여진족이나 몽고족을 뜻함)을 만나면 모두 창을 던지고 도망해 숨어 버리며, 또 활을 잘 쏘는 사람도 없어 반드시 우리나라 사람으로 귀화한 사람을 뽑아서 정병(精兵)이라 부르며 선봉으로 삼으니,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이 중국인 열 명, 백 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지방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인데 중국에 빼앗긴지 천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고구려의 옛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서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공경하게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이는 뿌리를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략)




명이 요동을 통치한 지 1백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이 정도였으니 고려 말의 상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3일 우왕은 서경에 머물면서 군사를 징집하였고 압록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승병을 징발하여 병력을 보강하였다.

12일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아 원정군을 총지휘하게 하고 그 아래 좌․우군을 편성하였다.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임명하였다. 좌군과 우군을 합쳐 38,830명이었고 지원 인원이 11,634명, 전마가 21,682필이었다. 조민수 휘하의 좌군은 서경과 양광도(楊廣道)․경상도․전라도 등지에서 징발한 부대로 편성하였고 이성계가 거느린 우군은 안주도(安州道)와 동북면, 강원도에서 모병하였다.

좌․우군도통사 휘하에는 도원수, 상원수, 조전원수(助戰元帥) 등 28명의 원수(元帥)가 각각 휘하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날 남옥은 포어아해(捕魚兒海)에서 토구스 테무르를 격파하였다. 토구스 테무르의 2자를 비롯하여 많은 귀족들이 생포되고 군대는 궤멸하였다. 명군은 남녀 7만 7천을 포로로 잡았고 말, 낙타, 소, 양 등 가축 15만 필을 노획하였다. 최영은 원과 협공하려 배후(裵厚)를 원에 보내었으나 이로서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남옥이 지휘하는 명군도 원정에 지쳐 고려군의 진격을 막으려 요동 방면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몸을 피한 토구스 테무르는 이듬해 툴라 강 부근에서 아릭 부케의 후손인 예수데르(也速失兒)에게 피살되었다.

대도를 빼앗긴 후 명군의 공세에 몽고족들이 끈질긴 무력 항쟁을 시도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몽고족들이 중국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서는 일단 초원으로 돌아가 유목 생활로 복귀하는 일이 바람직하였다. 그러나 성곽을 근거지로 삼고 있다가 명의 대군이 박두해오면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거나 심지어 자발적으로 집단 투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몽고족의 패퇴는 명군의 군사력 우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정착 생활에 젖어 있던 몽고족이 다시 유목 생활로 복귀하기 어려웠고 중국사회와의 경제적 의존 관계가 끊어지자 자기 붕괴의 길을 걸은 것으로 볼 수 있다.】




4월 19일 조민수와 이성계가 각각 좌․우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출발하였다. 이날 명 태조는 예부상서 이원명(李原明)에게 고려의 원정에 대한 대책을 말했다. 그는 영토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원명에게 말하고는 고려왕에게 안분(安分)을 지켜 흔단(釁端)을 일으키지 말 것을 당부하는 자문을 보내게 하였다. 주원장이 이처럼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 것은 명이 고려의 원정에 군사 대응을 할 여력이 없었던 탓이다.




우왕은 총사령관인 최영을 서경에 머무르게 하였다. 공민왕이 장수들의 제주도 원정 때에 암살당한 것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는데 이는 원정군의 사병적 성격을 모르는 치명적 실책이었다. 원정군은 28원수의 단위 부대를 기간으로 하고 있었다. 비록 팔도도통사인 최영이 총사령관이었으나 그 실체는 각각 원수들에게 절대적 통수권이 부여된 인적 관계 위에 형성되어 있었다. 즉 원정군의 편성은 각 원수의 명령에 임의적으로 조종될 수 있었다.

원수는 공민왕 대까지 재추들이 군을 지휘하여 출정할 때 맡는 임시장수 직위였다. 우왕 대에 이르러 재추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크게 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장수 경력이 있었다. 이들은 자기 집을 방비할 정도의 반당(伴倘 ; 호위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같은 배경 속에 우왕 대에 명의 위협과 왜구의 준동으로 전시상태가 지속되자 재추의 지위에 오른 관리들이 본래의 관직을 띤 채로 각 도의 시위군(侍衛軍)․개경의 5부 방리군과 해도수군 등의 원수를 겸직하는 일이 정착되었다. 각 원수는 군사를 지휘하기 위한 기구로 도진무(都鎭撫 ; 종 2품의 무관 벼슬)와 진무(鎭撫 ; 정 3품의 무관 벼슬)들로 구성되는 진무소(鎭撫所)를 갖추고 있었으며 고위 장수들의 하급 장수들이 맡고 있었다. 원수들이 출전할 때 거느리는 하급 장수들은 대개 병마사․지병마사 등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원수는 그 지위에 따라 도원수․상원수․부원수로 구분되었다. 이 3종의 원수는 8도와 서북면에 모두 임명되었다. 각 도의 3원수 가운데 중앙에서 시위군을 관할하는 이는 도원수와 상원수이고 관할 도에 내려가 외적을 막는 것은 대개 부원수였다. 권력의 핵심에 가까울수록 현지에 파견되기보다는 중앙에 남아 특정 도의 시위군을 장기간 분관하면서 유사시에 조전원수나 도체찰사, 도순찰사 등의 직함을 띠고 출전하였다. 각 도의 원수가 시위군을 장기간 관할하게 되자 패기(牌記 ; 시위군의 명단)도 원수가 직접 관장하게 되어 임의로 군사를 뽑아 휘하에 두는 것이 가능해졌다. 병졸의 선발과 징발은 지방행정조직의 업무였으나 전시상황이 지속되었으므로 원수는 주․군(州郡)의 수령에 공문을 보내 스스로 병사를 충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각 도의 군사력이 원수에게 사적으로 예속되는 양상이 심해졌다. 이중 이성계가 관할하는 동북면의 군사력이 가장 사적 성격이 강했다. 원수들이 집단적으로 군 통수권자인 국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이성계가 거느린 우군은 이성계의 영향력이 큰 동북면과 강원도, 안주도에서 징발하였고 휘하 원수들 가운데도 이원계, 이화(李和 ; 이성계의 이복동생), 이지란 등 그의 사적 통제를 받는 자들이 상당수였다. 그러므로 원정에 반대하는 이성계가 회군의 주동자가 될 수 있었다.




이화(李和, ?~1408)


조선 초기의 공신으로 이성계의 이복동생. 1388년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회군공신에 봉해졌다. 1392년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하는데 가담했으며 이성계를 추대한

공으로 개국공신 1등, 의안군(義安君)에 봉해졌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400년 2차 왕자의 난에 다시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2등에 서훈되었다. 4차례에 걸쳐 공신이 되어 조선 초기 공신 중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20일 니성(泥城)에서 정보원이 와서 명의 요동 방어가 취약한 것을 최영에게 보고하였다.

“근자에 요동에 갔는데 요동 군사가 모두 몽고를 치러 가고 성 안에는 다만 지휘(指揮)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니 만일 대군이 이르면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받을 것입니다.”

최영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물건을 후히 주었다.

5월 7일 압록강에 다다른 고려 원정군은 압록강 가운데 있는 섬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렀다.

11일 니성(泥城) 원수 홍인계(洪仁桂)와 강계 원수 이의(李薿)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들어가 명군을 살육하고 물자를 노략하고 돌아왔다. 우왕은 기뻐하며 이들에게 금정아(金頂兒)와 비단을 주었다.







3. 위화도 회군



5월 13일 이성계와 조민수는 회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건의문을 우왕에게 보냈다. 이들이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앞으로 요동성까지는 하천이 많고 빗물이 넘쳐 건너기가 어렵다.

②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다.

③ 명에 보낸 사신 박의중이 아직 귀국하기도 전에 큰 나라를 침범하는 것은 사직과 백성을 보호하는 길이 아니다.

④ 지금 장마로 활이 풀리고 갑옷이 무거워 군사와 말이 모두 곤핍한데 이러한 군사를 몰아 견고한 성을 치면 이기기 어렵다.

⑤ 만약 군량까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한다면 진퇴난곡에 빠질 것이다.




우왕은 회군을 허락하지 않고 환관 김완(金完)을 과섭찰리사(過涉察理使)로 임명하여 보내어 진군을 독촉하였다. 김완은 금, 비단, 마필을 좌우 도통사와 원수들에게 나누어 주며 진군을 재촉하였으나 군중에 억류되었다.

22일 다시 조민수, 이성계가 최영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을 허락하기를 청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았다. 이날 이성계가 친병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소문이 돌아서 위화도의 고려군은 동요하였다. 이성계는 여러 원수들을 설득했다.



만일 上國의 영토를 범하여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사와 생민에게 화가 곧 이를 것이오. 내가 옳고 그른 것을 가려서 글을 올려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최영이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어찌 그대들과 함께 돌아가서 왕을 뵈옵고 친히 화와 복을 진달하고 왕 옆의 악한 사람을 제거하여 생령(生靈)을 편안히 하지 않으랴.




원수들은 모두 동의하여 모든 부대는 위화도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당시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木子得國]’ 이라는 아이들의 노래가 널리 불려졌는데 이는 이성계 일당의 배후 공작이 치밀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종실 가운데 한 사람을 옹립할 생각이었는데 회군 도중에 조민수에게 그 뜻을 말하여 동의를 얻어 내었다.

24일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이 우왕에게 원정군의 회군 소식을 급보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서둘러 돌아가 29일 개경에 도착하였다.




당시 식자들은 요동 원정의 성공 여부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원천석은 요동 원정에 큰 기대를 걸었으나 이성계가 주도하여 회군이 이뤄지자 이를 한탄하는 시를 지었다.




병든 사내는 즐거움이 적으니 病夫少歡趣

풀이나 나무같이 썩어가는 몸일세. 衰朽同草水

봄부터 여름이 끝날 때까지 自春至夏末

끙끙 앓으면서 외로움을 지켜왔네. 呻吟守幽獨

요즘 들으니 조정에서 영을 내려 近聞有朝旨

명의 연호를 없애고 의복도 고쳤다더니 除年號開服

장정 숫자대로 군사를 다 뽑아 抽兵盡丁數

위아래가 모두 바쁘게 뛰어 달리며 上下事馳逐

비휴 같이 용맹한 병사 10여 만이 貔貅十餘萬

압록강을 건너려 한다네. 欲渡鴨綠江

이제 요해(遼海 ; 요하)를 건너면 方期遼海路

씩씩한 기운으로 깃발을 날리고 壯氣浮旗纛

범 같은 위엄이 중원에 떨칠 것이니 虎威振中原

두려워 엎드리지 않을 자 누구인가. 誰敢不畏伏

응당 개선하는 날이 오리니 應當凱旋日

사방 오랑캐가 다 귀속하고 四夷皆附屬

성스런 임금께서 무궁한 수명 누리시어 聖王壽無疆

주 무왕의 행적을 이어 밟으시리라. 繼踐周武躅

내 비록 늙은 데다 병까지 들었지만 我雖老且病

함께 태평곡을 부르려 하였는데, 與唱太平曲

어찌하여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奈何不渡江

갑자기 말고삐를 돌리나. 奮然回㘘速

서도(西都 ; 서경)에 계시던 임금님 수레도 翠華在西都

어이 그리도 급히 돌아오시나. 反駕何跼促

안타깝구나! 우리 도통공이시여! 可憐都統公

홀로 서서 원망을 듣게 되었네. 獨立招怨讟

기둥과 주춧돌이 이미 기울어 위태하니 柱石旣傾危

크나큰 집을 장차 어이 지탱하랴. 將何支廈屋

처음과 끝이 한결같지 않으니 終始不如一

부끄러워 볼 면목도 없겠네. 靦然無面目

머리 위에 푸르고 푸른 하늘이 있건만 頭上有蒼蒼

화(禍)와 복(福)을 어찌 알랴. 焉知禍與福




6월 1일 회군한 원정군이 개경 교외에 도착했다. 이성계를 비롯한 무장들은 최영을 내치라는 상소를 국왕에게 전달하였다.




우리 현릉(玄陵 ; 공민왕의 능호)은 지성으로 대국을 섬겼으며 천자가 일찍이 우리를 칠 뜻이 없었는데 이제 최영이 집정 대신이 되어 조종(祖宗)의 대국을 섬기는 뜻을 받들지 않고 먼저 상국을 침범하고자 하여 이 무더운 여름철에 뭇 사람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국의 농사가 폐농이 되고 또 왜적들이 빈틈을 타서 깊이 침입하여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나라의 창고들을 불태웠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양으로 천도하여 전국의 인심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지금 최영을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말 것입니다.




다음날 우왕은 전 밀직부사 진평중(陳平仲)을 보내어 회군한 장수들을 꾸짖는 교서를 전했다.




명을 받고 국외로 출정하였다가 이미 절제(節制)를 위반하고 병력을 이끌고 대궐로 향하였으며 또 강상(綱常)을 위반하여 이런 사단을 일으켰으니 이는 나의 탓이다. 그러나 군신의 대의는 고금의 통칙인데 경들은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거늘 어찌 이것을 모르는가?

하물며 나라의 강토는 조상에게서 받은 것이거늘 어찌 쉽사리 남에게 주겠는가? 군사를 일으켜 싸우는 것만 같지 못 하기 때문에 내가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였더니 모두 可라고 말하였다. 지금 와서 어찌 다를 수 있는가?

비록 최영을 지적하여 구실을 붙이나 최영이 나를 보위하는 것은 경들이 아는 일이오, 우리 왕실을 위하여 충실한 것도 경들이 다 아는 바이다.

이 교서를 받는 날로 그릇됨을 버리고 허물을 다 고쳐서 부귀를 함께 누리도록 힘쓰라. 나는 진실로 이것을 바란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왕은 또한 설장수를 보내어 장수들에게 어주(御酒)를 주고 그 의도를 탐지하게 하였다. 이날 회군한 장수들은 더 전진하여 도성 밖에 주둔하였다. 또한 동북면의 주민과 여진족 1천여 명이 이성계의 정변을 도우러 개경에 도착하였다.

3일 이성계는 숭인문 밖 산대암(山臺巖)에 진주하고 지문하사 유만수(柳曼殊)에게 좌우군을 이끌고 도성으로 진입하도록 하였다. 우군은 숭인문으로 좌군은 선인문으로 진공하였는데 최영은 적은 병력으로 모두 물리쳤다. 이성계가 스스로 부대를 이끌고 숭인문으로 진격하였다. 황룡대기를 든 이성계 부대가 선죽교로부터 남산(南山 ; 개경의 동쪽)으로 향하니 먼지가 하늘에 자욱하고 북소리가 땅을 울리는 등 기세가 성하였다. 남산에 주둔한 최영 휘하 안소(安沼)의 부대는 이를 보고 궤주하였다. 최영은 전세를 뒤집을 수 없음을 깨닫고 궁중의 화원으로 달려가 국왕, 영비(寧妃)와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머물렀다.【영비(寧妃)는 최영의 여식으로 이해 3월 초 우왕이 최영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비로 삼았다.】

이성계의 군사가 화원을 겹겹이 포위하고 최영을 내보내라고 크게 외쳤다. 담을 허물고 반군이 들어오자 최영은 우왕에게 작별하고 나왔다. 이성계는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으로 귀양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사변은 나의 본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원정은) 대의를 거역하였고 국가가 평안하지 못하며 인민이 피로하여 원성이 하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한 것이니 잘 가십시오.




일찍이 이성계의 야심을 꿰뚫어 본 이인임은 최영에게 “이 판삼사사(이성계)가 반드시 국왕이 될 것이다” 라며 경계할 것을 권했는데 최영은 이를 모함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와서 최영은 “이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다.” 고 말하며 탄식하였다.

조민수는 좌시중, 이성계는 우시중이 되고 최영의 휘하인 안소와 정승가(鄭承可)를 비롯하여 인원보(印原寶)․안주(安柱)․김약채(金若采)․정희계(鄭熙啓) 등은 체포되어 먼 곳으로 귀양을 갔다.




6일 밤 우왕은 회군 주동자 이성계, 조민수, 변안열을 죽이고자 환관 80여 명에게 무장을 시키고 이들의 집으로 갔으나 모두 군을 이끌고 야외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여러 장수들은 숭인문에 모여 회의하여 궁궐의 무기를 압수하기로 결정했다. 이화(李和)․조인벽․심덕부․왕안덕(王安德)이 궁중에 들어가 병장기와 안마(鞍馬)를 모두 내어 놓았다.

8일 장수들이 다시 영비를 내어 놓으라 강청하였다. 왕은 “만일 이 妃를 나가게 한다면 나도 같이 나가리라” 하면서 극력 거절하였다. 이에 이성계를 비롯한 여러 원수들은 군을 이끌고 궁궐을 포위하고는 왕에게 강화도로 갈 것을 요구하였다. 우왕은 채찍을 들고 말을 타며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다” 고 하였으나 이성계는 당일로 출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우왕은 영비와 함께 강화도로 향하였다.

이어 신왕 옹립 단계에 들어갔는데 이성계는 우왕의 친자인 왕창(王昌)를 세우기를 꺼려하여 종실 가운데 선택하려 하였으나 조민수는 우왕의 친자를 세우려 하였다. 당시의 명유(名儒)인 이색이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여 9세의 왕창이 즉위하였다. 이때는 36명의 원수가 건재한 때였으므로 이성계가 신왕 옹립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창왕이 즉위하자 조민수는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 도통사, 이성계는 동북면․삭방․강릉 도통사가 되어 군 통수권을 양분하였다.

창왕이 즉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박의중이 명의 예부 자문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 국서에서 명 태조는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영토 문제는 상세히 살핀 후 결정될 것이라 하였다. 이는 사실상 고려의 요구를 수용한 완곡한 표현이다. 중도에 그쳤으나 고려의 요동 원정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7월 조민수가 창녕으로 유배되었다.『고려사』에는 조준의 탄핵에 의한 것으로 간략히 기록되어 있으나 이성계와 군 통수권을 양분한 조민수의 실각이 이렇게 간단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민수 제거로 홀로 도통사 직위를 보유하게 된 이성계가 원수들을 제거하기가 용이해졌다.

8월 이색은 문하시중, 이성계는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이성계는 7남 이방번(李芳蕃)을 종실인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女와 혼인시켰다. 왕우는 신종(神宗)의 7대손이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며 종실을 추대하려 했는데 창왕의 즉위로 일단 좌절되었다. 그 직후 불과 8세의 이방번을 종실과 혼인시킨 것으로 이는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할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성계와 인척인 종실을 왕으로 추대하는 것은 찬탈로 가는 한 과정으로 기획되었다. 요동 원정에 조전원수로 참전하였으며 위화도 회군에 반대하였던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는 아우의 찬탈 의사를 확인하고 10월 23일 음독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절명시가 전한다.




삼한고국에 이 몸 둘 곳 어디이뇨 三韓故國身何在

지하에 가 태백 중옹을 좇아 놀고 싶구나. 地下願從伯仲流

같은 처지에 처신함이 다르다 마오, 同處休云裁處異

형만 가는 바다에 뗏목을 띄울 필요도 없으리. 荊蠻不必海浮桴




이원계는 이자춘의 첫 번째 처인 한산 이씨의 소생이었다. 이원계는 홍건군 격퇴에 공을 세워 수복경성공신과 기해격주홍적공신이 되었다. 우왕 7년(1381)의 황산대첩(荒山大捷)에 공을 세워 추충절의보리공신(推忠節義輔理功臣) 칭호를 받고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판개성부사, 문하시랑평장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제 1처는 문익점의 女이고, 제 2처는 김용의 女이다. 공민왕의 아낌을 받아 김용의 반역 때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성계의 창왕 폐위 의도를 감지한 문하시중 이색은 고심 끝에 명의 힘을 빌기로 하였다. 10월 이색은 첨서밀직사사 이숭인, 동지밀직 김사안(金士安)과 더불어 하정사로 떠났다. 처음 이색이 늙고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청하여 사신으로 가려하자 창왕을 비롯하여 모든 관료들이 만류하였다. 이색은 어린 왕에게 그의 의지를 밝혔다.




신은 포의(布衣 ; 평민)로 벼슬이 최고위에 달하였으므로 언제나 죽음으로 이에 보답하려 하였습니다. 이제 죽을 곳을 얻게 되었습니다. 설사 길에서 죽을지라도 시체를 가지고 중간 역할을 하여 나라에서 위임된 바가 천자에게 전달될 수만 있다면 비록 죽어도 오히려 산 것입니다.



이색은 그가 없는 동안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시킬까 두려워 이성계에게 아들 하나를 동행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이방원이 서장관으로 이색을 수행하였다. 이색은 명에 입경하여 남경으로 가는 길에 명의 고위 관리를 만났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의 나라 최영은 정병 10만을 거느렸으나 이성계가 그를 파리 잡듯이 쉽게 잡았으니 그대의 나라 백성들은 이성계의 망극(罔極)한 덕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이는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해야 마땅하다는 견해이다.

이색은 명 태조를 알현하고 명에서 고려에 관리를 보내 감국(監國)할 것을 요청하였다. 명의 관리가 고려의 국정을 감독하면 이성계가 찬탈을 할 수가 없으리란 계산이었다. 이성계의 무력에 대항할 방도가 없어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명 태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에는 밀직사 강회백(姜淮伯)이 명으로 파견되었고 부사로는 이방우가 수행했다. 강회백은 창왕의 조근(朝覲)을 요청하는 표문을 가지고 갔다. 창왕이 조근한다는 것은 명에 가서 명 태조를 배알하여 고려왕으로 인정을 받겠다는 것이다. 조근이 행해진다면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시키기는 것은 중국 천자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시키기 어렵게 된다.

12월 이색이 없는 동안 이성계는 서둘러 최영을 참형에 처하였다.










4. 명 태조 주원장은 고려의 요동 원정에 어떻게 반응하였나




주원장은 신하의 왕위 찬탈을 극악한 범죄로 인식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맹자의 제사를 금지한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홍무 3년(1370) 주원장은 처음으로『맹자』를 읽고 크게 분노하였다. 맹자는 군주가 천명(天命)을 위반할 때는 방벌(放伐)해도 좋다는 역성혁명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주원장은 맹자를 공자의 정배(亭配)로부터 빼도록 하면서 만일 이를 간(諫)하는 자가 있다면 불경죄로 다스린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 조서에도 불구하고 형부상서 전당(錢唐)이 항소하다가 화살형을 당하였다. 전당은 수레를 끌면서 가슴에 화살을 맞고 “신이 맹가(孟軻 ; 맹자의 이름)를 위하여 죽으면 오히려 영광입니다” 라고 외쳤다. 이에 감동한 주원장은 전당을 치료하게 하고 맹자의 제사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후『맹자』에 나오는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방벌에 대한 대목은 모두 삭제한『맹자절요』를 간행하여 일반에 읽게 하였다.

주원장은 주변 국가의 역성혁명에 대해서도 철저히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홍무 24년(1391) 점성국(占城國)에서 왕위 찬탈이 발생하자 주원장은 점성국의 조공을 거부하였다. 홍무 26년(1393) 베트남에서 신하인 레뀌리(黎季犛)가 진씨(陳氏) 왕조를 무너뜨리자 주원장은 조공을 금지하였으며 다음해 다른 경로로 온 조공도 거절하였다. 명의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1424)는 레뀌리의 찬탈을 구실로 1406년 겨울 20여 만의 군대를 동원, 베트남을 정복하고 명 제국의 일부로 통치하였다.




점성국(占城國, Champa)


참족이 베트남 남부 지방에 세운 나라. 2세기 말 후한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건국하였으며

제2 왕조 시대에는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10세기에 독립한 베트남이 남진하자 격렬한

항쟁을 하였으나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고 17세기 말 멸망하였다. 현재 참족은 베트남 남부에서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이러한 주원장이 이성계의 찬탈을 순순히 승인한 것은 이성계가 요동 원정에 반대하여 회군한 때문이었다. 요동을 자국 영토로 인식하는 왕조, 명에 대한 무력 대응을 불사하는 왕조, 훗날 몽고가 다시 세력을 키울 경우 그와 동맹할 가능성이 있는 왕조인 고려 왕조의 존속은 잠재적으로 명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었다. 고려 왕조는 명의 안녕을 위하여 소멸되어야 했다. 그러기 때문에 주원장은 이씨 조선의 성립을 천명론으로 합리화하였다. 주원장이 홍무 28년(1395) 4월 신미일에 한 발언에 그의 우려가 잘 드러난다.




근자에 고려가 표문을 상주하는 데 언사가 많이 부실하여 짐이 이미 유사(有司)에 이를 규명하도록 명하였다. 듣자하니 그들은 국도(國都)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요충지에 비축하는 군량이 매 驛마다 1․2만석 혹은 7․8만 석, 10수 만석에 이르고 사람을 보내 동녕부의 여진을 유인하여 국경을 넘어오게 하고 있으니, 이는 그 뜻에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는 것이다. … 지금 요동은 군량이 모자라 군사들이 굶주리고 고단한데, 만약 즉시 사령창(沙嶺倉)의 식량을 내어 그들을 진제(賑濟)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려로 하여금 도망병을 꾀어 들이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만일 고려가 20만 군대를 내어 쳐들어오면 여러 부대는 어떻게 막겠는가. 이제 건축과 보수를 잠시 정지하고 임시 막사를 지어 10년 후에 거주한 후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라. 옛 사람의 말에 사람이 수고로우면 화란의 근원을 막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깊이 음미해 볼 일이다.

(『태조고황제실록』권 338 홍무 28년 4월 신미)




홍무 30년(1397) 3월 예문춘추관학사 권근(權近)이 명 태조의 칙위조서(勅慰詔書), 선유성지(宣諭聖旨), 어제시(御製詩)와 예부의 자문 2통을 받아 귀국하였다. 선유성지에 명 태조가 이성계의 찬탈을 승인한 이유가 명백히 나온다.




조선국왕이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홍무 21년(1388)에 너희 조그만 나라 군마(軍馬)가 압록강에 이르러 장차 이 중국을 치려하였다. 그 때에 이성계가 단번에 회군하여 지금과 같이 왕위를 얻었고 고려는 국호를 조선이라 고쳤으니 자연(自然)의 천도(天道)이다. 조선국왕은 정성이 지극한데 지금 두 나라 사이에 수재(秀才 ; 정도전을 말함)가 매양 농간을 부려 곧지 않고 바르지 못하다.…

(『태조실록』권 11, 6년 3월 신유)



주원장은 고려에 무리한 조공 요구를 하다가 고려의 요동 원정을 자초하였다.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로 명이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사태였다. 주원장은 고려와 북방 초원으로 축출된 몽고와의 연합을 가장 경계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가 연합하기 어려운 사정을 알고는 고려의 경제가 파탄지경에 놓일 정도로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전쟁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다수 신료들의 의견을 따라 공물 요구에 응하였다. 공물요구가 거듭되다가 영토 문제마저 일어나자 기습적으로 요동 원정을 한 것인데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원장은 이미 몽고 방면에 15만 원정군을 보낸 상태였고 요동에 주둔하는 명군도 대거 참전하였으므로 요동에 배치된 명군은 소수였다. 요동을 지킬 예비 병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는 운하가 막힌 상태여서 군량을 많이 운반할 수 없어 명이 대외 원정에 보낼 수 있는 병력은 15만이 한계였다. 중국하면 언제나 백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라는 대단히 잘못된 인식이 한국인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도 올바른 사고를 하는데 큰 장애가 된다.

게다가 요동에는 한족 출신보다 고려 여진 계통 병사가 많았던 것도 문제였다. 이들은 힘써 전투를 하지 않을 것이며 순순히 투항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공민왕 시절 고려의 원정군이 어렵지 않게 목적을 이룬 것도 이러한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최영이 원정을 서두른 것은 이를 노린 때문이었다.












5. 위화도 회군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평가







이씨 조선이 성립하면서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가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三韓百姓이 魚肉의 밥’이 되는 위기상황에 처했으므로 국가와 민족을 구하려는 일념에서 행한 영웅적 擧事로 찬양받았다. 그리고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 후에 정치경제 개혁으로 백성을 구했고 그 결과 조선왕조가 천명을 받아 세워진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조선건국세력의 공식사관은『高麗史』와『龍飛御天歌』에 잘 묘사되어 있다.

고려 말을 살아보지 못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믿었으나 계유정란을 통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성계의 역성혁명과 위화도 회군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퇴계는 원천석의 설을 믿으며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제자에게 편지로 밝혔다.



숙종 때 지식인 사이에서 위화도 회군에 관한 역사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西人이 老論과 小論으로 갈라진 이유 중의 하나가 위화도 회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차이였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은 조선개국 300주년을 맞이해 “태조가 개국한지 300년에 굳은 大業이 실상 위화도 회군으로 시작되어 大義를 日月같이 밝혔으니 昭義正論으로 시호를 올리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상소하였다.

이에 소론의 윤증, 박세채는 반대했다. 박세채는 위화도 회군은 화가위국(化家爲國 ; 신하가 임금이 되는 것)을 위한 것이지 결코 大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여 송시열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송시열은 박세채를 ‘先君을 깎아 말하는 자’로 비난했고 박세채는 송시열을 ‘今世의 王雱’이라고 하여 간사하고 음특한 자로 규정하였다.

소론의 평가는 조선왕조 성립 이래의 역사해석을 뒤집는 것이었다. 권력에 의한 공식사관도 300년이 지나자 객관적인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출처 : 낙동민속보존회
글쓴이 : 靑明 김학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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