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탕은 계속 노동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830년대 후반과 1840년대 초는 리옹 견직공들의 봉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동남부의 리옹(Lyon)은 일찍부터 실크 산업으로 유명했지만 카뉘(견직공)들은 저임금, 장시간의 노동, 누추한 환경에 시달렸다. 1831년 11월 카뉘의 봉기가 일어나자 파리 당국은 3천명의 진압군을 파견했고, 카뉘들은 가가호호 체포되고 살해되었다.
1843년 트리스탕이 [노동자동맹(The Workers' Union)]이란 잡지를 발간한 것은 이같은 노동문제를 봉기가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타결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잡지의 창간에는 목공, 철물공, 대장장이 같은 노동자 문인들이 힘을 보탰다. 술집과 공원에서 노동자 시인들이 시를 낭송하고 다니는 시절이었다. 노동자동맹을 위한 첫 번째 회합은 1843년 1월 파리에서 열렸는데 트리스탕은 이렇게 연설했다. “사실상의 불평등과 부정의의 희생자들인 노동자 여러분! 결국 이 지상에서 여자와 남자들 사이의 정의와 전적인 평등을 수립하는 것은 당신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노동계급들 스스로 운동을 지도하여 국제적인 조직을 가져야 합니다.” 트리스탕은 노동자 문제에 대한 중산층의 개입과 배려를 탐탁지 않게 본 것이다. 그러한 [노동자동맹]은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출판하려는 곳이 없었고, 구독 예약금으로 발간해야 했다. 예약자 중에는 익명도 많았지만 하원의원, 지명인사, 조르주 상드, 인기 작가인 외젠 쉬(Eugéne Sue), 또 루이 블랑(Louis Blanc), 콩시데랑(Victor Considérant) 같은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다.
트리스탕은 [노동자동맹]을 널리 알리고 동맹을 조직하기 위해 스스로 프랑스를 돌아다니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곳곳을 순회하며 타지의 노동자들과 소식을 주고받는 길드의 관행을 따르는 것이었다. 1843년 가을, 플로라는 겨울철을 피해 4월에서 9월 사이를 선택해 1844년은 남부, 1845년은 북부라고 일정을 잡았다. 1844년 4월 옥세르에서 출발하여 동부의 디종을 거쳐 리옹으로, 그리고 더 내려가 마르세유와 툴루즈를 순방했다. 지방 노동자들의 주소와 연락처는 파리 노동자들이 전해주었다. 사회주의자 빅토르 콩시데랑은 자신의 신문 구독자 명부를 넘겨주었다. 트리스탕은 거의 저녁마다 50명 내지 100명 혹은 그 이상의 노동자들 앞에 섰고, 어디를 가든 감시를 받았다. 프랑스는 1792년의 르샤플리에 법 아래 공식적으로 20명 이상의 결사와 회합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마르세유 회의장에서는 경찰이 와서 공손한 어조였지만, 600명이 넘는 이 집회가 당국의 허가를 받은 것인지 물었다. 트리스탕은 “나는 가는 곳마다 이렇게 집회를 열었다. 파리에서도 리옹에서도 경찰이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트리스탕은 모임에 나가 성공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 노동자들이 집회 장소에 오지 않을지 하는 걱정과 집회에서 받은 실망, 신랄한 심경을 일기에 남겼다. 부유한 상인들이 많은 마르세유에서는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터키인, 아랍인, 유대인 상인들이 자신의 뜻을 방해한다고 쓰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