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함께하는 이야기

역경이 일구어낸 "노동자여 단결하라!"플로라 트리스탕

후암동남산 2012. 9. 13. 07:34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예나 지금이나 멋진 도시다. 1830년에 궤도 합승마차가 운행을 시작하고 곧 열차가 놓이며 개선문과 마들렌 성당이 완공되었다. 멋진 것은 건물과 거리, 미술관만이 아니라 파리 시내 곳곳에 위치한 책방이었다.

 

하지만 파리는 노동으로 점철된 도시였다. 토목공, 석공, 목공, 대리석공, 흑단공(가구나 수공예품을 만드는 장인), 캐비넷 제작공, 철물공, 또 봉제와 의류, 모자, 식품업, 인쇄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곳곳에 퍼져있는 도시가 파리였다. 자연히 여성 노동자들도 많았다. 19세기 내내 여성들은 하녀와 세탁부로, 파리 5구의 시장과 현재 퐁피두 센터 부근인 중앙시장의 상인으로, 온갖 가게, 또 크고 작은 공방의 일꾼으로 일했으며 흔히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감수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배움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플로라 트리스탕은 이러한 여성 노동자들의 고통을 알았고 여성의 교육과 권리를 주장한 프랑스 페미니즘의 한 선구자이고, 초기 산업화의 짐을 걸머진 노동자들의 조건을 바꿔보려 온 힘을 다한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한편 불우한 가정생활을 겪었지만 라틴계의 정열과 예술성을 지녔던 트리스탕의 이름은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외할머니라는 사실로도 기억되고 있다.

 

 

불행한 성장과 결혼, 여성문제에 눈뜨게 하다

그 모든 삶은 우선 플로라 트리스탕(Flora Tristan, 1803~1844)의 출생과 결혼에서 비롯되었다. 스페인 귀족 가문이었던 아버지, 돈 마리아노 데 트리스탕 모스코소는 스페인의 빌바오에서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고 파리로 와서 살았는데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사망했다. 플로라가 4살 때였다. 나폴레옹 전쟁기에 스페인을 침공해 전쟁 중이었던 프랑스는 돈 트리스탕의 사망 후 그의 재산을 몰수했고, 경제적으로 어쩔 도리가 없게 된 모녀는 파리 변두리에서 각박하게 살았다. 10대의 플로라는 인쇄 공장에 다녔으며 어머니는 딸이 일찍 결혼하여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다. 라틴 계열의 큰 눈에 길고 둥근 얼굴, 검은색 긴 머리를 가졌으며 열정이 넘치는 플로라는 18살인 1821년, 어머니의 뜻에 따라 10살 연상인 인쇄업자 앙드레 샤잘과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책을 찾고 저항을 일깨우는 루소, 사회를 비판한 낭만주의 작가들에 탐닉한 플로라는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22세에 두 아들을 두었고 셋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집을 나왔다. 두 아들을 데리고 나온 트리스탕은 많은 여성들이 결혼과 가정, 출산의 늪에서 헤어


나지 못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 후 5년간 생활의 방편으로 상류층 부인들을 수행하며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를 다녔다.

 

플로라는 1833년 4월 대서양 연안의 큰 항구도시 보르도에서 남아메리카로 떠나는 배를 탔다. 큰 아들은 사망했고 둘째 아들은 남편이 데려갔으며 셋째인 딸은 어머니에게 맡긴 상태였다. 플로라의 여행 목적은 페루에 있는 인척을 찾아 친족 증명을 받고 재산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리스탕 가문을 대표하는 페루의 돈 피오는 플로라를 적법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생아, 파리아(pariah: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하층민)로 낙인찍었다.

 

페루의 도시 아레키파(Arequipa)의 풍경. 플로라 트리스탕은 이곳에 머물며 페루의 궁정과 의회, 사탕수수 농장을 돌아보고 여러 계층의 여성들을 만난 후 [파리아의 긴 여행]을 저술했다. <출처: (cc) MapachitoMD at fr.wikipedia.org>

 

 

플로라는 약 일 년 동안 페루에 머물면서 막 독립을 선언한 이 나라를 관찰하고, 5800미터의 엘 미스티 산이 굽어보는 아레키파(Arequipa)에서 [파리아의 긴 여행(Peregrinations of a Pariah)](1838)을 저술했다. 플로라는 이 책에서 광대한 페루의 수도 리마, 유럽인이 이 땅에 도착하기 이전의 유적들, 얼굴을 가리지만 찬란한 의상을 입은 여성들에 대해 묘사했다. 남미 독립운동의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의 생애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플로라는 궁전을 방문하고 상류층 인사들의 초대도 받고 사탕수수 농장도 찾아다니면서 페루의 상층 사회가 부패했고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에 물들었다고 썼다. 400명의 흑인 남성과 300명의 흑인 여성, 200명의 흑인 어린아이들이 일하는 사탕수수 농장을 본 후 플로라는 노예 노동으로 생산되는 설탕을 먹지 말자는 당시 영국 여성협회의 설탕금식 운동에 찬성했다. 한편 페루의 의회, 콩그레스에는 전통 복장인 ‘사야’ 차림으로 방청석에서 정치신문을 읽고 의정을 참관하는 여성들이 보였다.

 

여성 문제는 페루 여행 전에도 후에도 트리스탕을 사로잡았다. 여성론은 사실 시대의 화제였다. 이미 1789년 프랑스 혁명기에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ges, 1748~1793)의 여성인권선언이 나왔으며 일반 민중 여성들도 정치 클럽을 만들었다. 1840년대의 진보성향 작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는 멀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젊은이들이 애독할 정도로 이름난 여성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가들도 여성 문제를 고민했다. 생 시몽(Saint-Simon, 1760~1825)은 너무나 무질서해 보이는 산업사회를 반듯한 조직체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는 과학자, 금융인, 기술자, 근로자 등 모든 종류의 산업자들이 중요하고, 일하지 않고 누리기만 하는 유한자들은 사회에 해롭다고 보았다. 사회개혁가들은 생시몽주의를 지지하면서 여성의 지위가 달라져야 한다고 믿었다. 여성은 사회의 부조화를 제거할 하모니의 화신이었다.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이러한 사상은 너무도 새로워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플로라는 페루로 떠나기 전 파리의 생시몽주의자 집회에 참석했다. 플로라 트리스탕은 ‘신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시몽의 계승자, 앙팡탱(B. P. enfantin)에게 지지를 보냈다. 여성의 교육과 사회 평등을 요구하고 정치에 참여한 또 다른 여성운동가 폴린 롤랑(pauline roland)도 생시몽주의에 찬성했다. 1832년에 창간된 [여성 법정] 신문에도 성적 권리를 옹호하는 생시몽주의자들의 견해가 실렸다. 사회주의의 또 다른 흐름인 푸리에주의도 여성문제에 집중했다.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는 이른바 문명이라고 하는 사회의 억압 기제들을 차단하려면 성의 해방이 필요하다는 사상을 설파했다. 1830년대의 파리 시내에는 ‘여성해방’이라는 강연이 열린다는 벽보가 나붙었으며 남자들은 빳빳한 컬러의 셔츠를, 여성들은 발목이 약간 드러나는 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산업화 영국의 뒤안길을 묘사한 [런던 산책]

플로라 트리스탕은 이 시대의 다른 여성운동가들과 좀 달랐다. 감옥 개혁에 앞장선 영국의 엘리자베스 프라이(Elizabeth Fry)는 영국 정부뿐 아니라 외국 정부의 주목을 받았다. 영국의 안나 휠러(Anna Wheeler)는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과 같은 인사들과 교류하고 1832년 파리에 와서 푸리에를 만났다. 오언은 경쟁이 아닌 협동을 통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상을 실험했으며, 벤담은 인간의 기쁨과 고통을 수학적으로 연구했다. 독일에서 국제적인 문예 살롱을 열고 있던 여성 작가 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은 ‘나는 철두철미 생시몽주의자’라고 자부했다.

 

노동자로 자란 플로라는 이 같은 국제적 네트워크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자기 안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계속 신문에 글을 쓰고, 페루와 영국 등지를 여행하고, 사상가들과 만나면서 플로라는 빈곤과 정치적 억압을 방관하지 않으려는 19세기 운동가들과 뜻을 같이 했다. 그는 유럽 최대의 빈곤층인 아일랜드인들의 처지에 관심을 두었고 러시아와 강대국들의 탄압 아래 있던 폴란드의 민족주의를 지원했다. 그러나 트리스탕의 사생활은 험난했다. 남편은 트리스탕을 추적하던 중 1838년 9월 10일 집 밖으로 나오는 아내를 기다리다가 권총을 쏘았다. 플로라는 왼편 가슴에 총탄을 맞았지만 치명적이지 않았다. 남편 샤잘은 이 사건으로 재판정에 서고 20년 노역형을 선고받았지만, 트리스탕이 신청한 이혼은 증빙 사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판사는 남편 샤잘과 헤어진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트리스탕에게 ‘신체의 분리’만을 허용했다. 1815년 왕정복고 후 풍속과 모럴에 대한 단속이 심한 시대였다.


플로라 트리스탕의 초상화. 작자미상의 19세기 판화 작품으로 파리의 카르나벨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보러가기

 

영국 노동자들은 1838년부터 거의 10년 간 인민헌장(차티즘) 운동으로 불린 대규모의 선거권 운동을 벌였고, 플로라 트리스탕은 때마침 런던을 방문하는 기회에 차티스트 집회를 참관했다. 중간층도 합세한 이 운동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 6개항을 요구하였고, 당시는 실패하였으나 결국 보통선거권의 수립에 크기 기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쓰라린 경험은 트리스탕을 한층 신랄하게 만들었다. 1840년에는 트리스탕의 [런던 산책(Promenades in London)]이 출간되었는데 그는 책의 서문에서 영국의 수도를 찾는 여행자들이 관광명소만 방문하고 실제로 작업장에서 일하는 대다수 주민들은 보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1842년의 런던은 인구 200만 명이 넘는 복잡한 밀집 도시였고 노동자 구역은 험악했다. 런던 변두리의 가스 공장 안에 들어갔던 플로라는 숨이 막히는 독한 공기를 피해 바깥으로 나왔으나 가스와 증기, 석탄, 역청 냄새가 마당에도 가득했고, 시궁창 물에다 오물이 쌓여 있어 청결이란 관념조차 없는 것을 보았다. 트리스탕은 한 영국인의 안내로 인민헌장(차티즘)의 집회도 보았다. 플리트 거리 뒤에 있는 맥주집의 뒷방은 좁고 침침했으며 차티스트들과 함께 한 30~40명의 방청객들은 모두 젊은 노동자들이었다. 트리스탕은 영국의 상하원 의회도 방문하고서는 온 국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하원이 여왕에게 무릎을 꿇고 지시를 받들며, 여성에게는 방청석에 앉을 권리조차 허용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트리스탕은 런던, 버밍엄, 맨체스터와 글라스고의 방직공장, 제사(制絲)공장 노동자들의 상황을 세세히 그렸다. 이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같은 작가와 블레이크(William Blake) 같은 화가들이 거친 산업화에 항의하고 있었다.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은 영국은 “우리 자신의 미래”라고 말했다. 트리스탕은 이렇게 쓰기도 했다.

“나는 영국의 프롤레타리아를 알게 된 후 노예제만이 인간의 최대의 불운으로 보이지 않았다. 노예는 평생 빵은 먹고 아프면 누군가 돌보게 된다. 반면 노동자와 영국의 주인 사이에는 아무런 끈이 없다. 만약 주인이 일감을 주지 않으면 그의 노동자는 굶어 죽는다. 늙거나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면 해고당하고 그러면 체포될까 두려워하면서 구걸에 나선다. 이런 처지를 견디려면 초인적인 용기가 있거나 완전히 무감각해야 한다.”

- 런던 산책

플로라는 거리의 몸 파는 여성들에게도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만약 여성이 남자와 같은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갖는다면 이런 억압과 수치를 견디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여성이 성적 노동에 종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사생아 출산율이 높은 것이 영국이나 프랑스의 현실이었다.

 

 

프랑스를 일주하며 외치다 - "노동자여 단결하라"

1831년의 리옹 봉기 진압장면. 플로라 트리스탕은 잔혹한 진압이 뒤따르는 봉기 이외의 방식으로 노동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노동자동맹]이란 잡지를 만들게 되었다.

 

 

트리스탕은 계속 노동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830년대 후반과 1840년대 초는 리옹 견직공들의 봉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동남부의 리옹(Lyon)은 일찍부터 실크 산업으로 유명했지만 카뉘(견직공)들은 저임금, 장시간의 노동, 누추한 환경에 시달렸다. 1831년 11월 카뉘의 봉기가 일어나자 파리 당국은 3천명의 진압군을 파견했고, 카뉘들은 가가호호 체포되고 살해되었다.

 

1843년 트리스탕이 [노동자동맹(The Workers' Union)]이란 잡지를 발간한 것은 이같은 노동문제를 봉기가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타결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잡지의 창간에는 목공, 철물공, 대장장이 같은 노동자 문인들이 힘을 보탰다. 술집과 공원에서 노동자 시인들이 시를 낭송하고 다니는 시절이었다. 노동자동맹을 위한 첫 번째 회합은 1843년 1월 파리에서 열렸는데 트리스탕은 이렇게 연설했다. “사실상의 불평등과 부정의의 희생자들인 노동자 여러분! 결국 이 지상에서 여자와 남자들 사이의 정의와 전적인 평등을 수립하는 것은 당신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노동계급들 스스로 운동을 지도하여 국제적인 조직을 가져야 합니다.” 트리스탕은 노동자 문제에 대한 중산층의 개입과 배려를 탐탁지 않게 본 것이다. 그러한 [노동자동맹]은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출판하려는 곳이 없었고, 구독 예약금으로 발간해야 했다. 예약자 중에는 익명도 많았지만 하원의원, 지명인사, 조르주 상드, 인기 작가인 외젠 쉬(Eugéne Sue), 또 루이 블랑(Louis Blanc), 콩시데랑(Victor Considérant) 같은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다.

 

트리스탕은 [노동자동맹]을 널리 알리고 동맹을 조직하기 위해 스스로 프랑스를 돌아다니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곳곳을 순회하며 타지의 노동자들과 소식을 주고받는 길드의 관행을 따르는 것이었다. 1843년 가을, 플로라는 겨울철을 피해 4월에서 9월 사이를 선택해 1844년은 남부, 1845년은 북부라고 일정을 잡았다. 1844년 4월 옥세르에서 출발하여 동부의 디종을 거쳐 리옹으로, 그리고 더 내려가 마르세유와 툴루즈를 순방했다. 지방 노동자들의 주소와 연락처는 파리 노동자들이 전해주었다. 사회주의자 빅토르 콩시데랑은 자신의 신문 구독자 명부를 넘겨주었다. 트리스탕은 거의 저녁마다 50명 내지 100명 혹은 그 이상의 노동자들 앞에 섰고, 어디를 가든 감시를 받았다. 프랑스는 1792년의 르샤플리에 법 아래 공식적으로 20명 이상의 결사와 회합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마르세유 회의장에서는 경찰이 와서 공손한 어조였지만, 600명이 넘는 이 집회가 당국의 허가를 받은 것인지 물었다. 트리스탕은 “나는 가는 곳마다 이렇게 집회를 열었다. 파리에서도 리옹에서도 경찰이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트리스탕은 모임에 나가 성공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 노동자들이 집회 장소에 오지 않을지 하는 걱정과 집회에서 받은 실망, 신랄한 심경을 일기에 남겼다. 부유한 상인들이 많은 마르세유에서는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터키인, 아랍인, 유대인 상인들이 자신의 뜻을 방해한다고 쓰기도 했다.

 

지방의 사정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었다. 경제 불황이 깊어가는 이 시기에 파리의 경우보다 더 열악한 노동자들이 많았고 “극단적인 착취를 당하면 항의하기보다 꼼작할 수 없는 것도” 목격되었다. 리옹과 생테티엔 같은 공업도시는 사정이 달랐지만 소도시들에는 공장 노동자가 드물었다. 의식이 깨인 동부 도시들에서는 어린이들은 물론 노동자들의 딸도 상층의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다녔다. 이렇게 작성된 트리스탕의 [프랑스 일주기(Flora Tristan’s Diary: The Tour of France)] (1843-1844)에는 남성과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남부 도시 님에서는 300명에서 400명의 세탁부 여성들이 빨래 일을 하고 있었다. 19세기의 풍속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가 그린 세탁부들의 실제 모습이었다. 그 여자들은 거의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속에 몸을 담그고 빨래를 했다. 비누, 잿물, 표백제를 풀어놓아 해독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술직 여성들이 많이 일하는 직종은 인쇄업이었다. 인쇄소 여성들은 이미 프랑스 혁명기에 직업교육을 진정했지만, 다음 세대도 아직 남성 임금의 절반을 받을 뿐이었다. 앞으로 한 세기가 더 걸릴 일이지만, 트리스탕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동등노동, 동등임금’은 다름 아닌 사회정의라고 지적했다.

 

플로라는 노동자들에게는 25상팀, 부르주아들에게는 그보다 열 배인 2프랑을 받고 자신의 소책자를 판매했다. 그가 프랑스를 일주하는 사이에 이 책자의 2판, 3판이 각각 1만부씩 인쇄되었다. 인쇄비용은 노동자들이 충당했다. 트리스탕은 마지막 순방지가 된 보르도에서 경찰서에 나가 책에 관해 진술했으며 [노동자동맹]을 출판 창고에서 받아주지 않아 노동자들과 함께 직접 책을 나르기도 했다. 이 책에 관심을 보인 것은 오히려 보르도의 성직자들이었다. 트리스탕은 신은 권세를 부리는 성직자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며 교회를 비판했지만, 어떤 성직자들은 이를 수용했다. 강행군 끝에 보르도에 도착했던 플로라 트리스탕은 열병이 심해져 1844년 11월 14일 뇌수축으로 사망했다. 이틀 후에 노동자들이 장례를 지냈으며, 1848년 2월 혁명기에 노동자들은 다시 보르도를 찾아 트리스탕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트리스탕의 딸 알린의 아들 폴 고갱이 1848년 그 해에 태어났다.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의 빨래하는 여인(La blanchisseuse). 19세기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하녀와 세탁부로 일했다. '삼등열차'로 잘 알려진 화가 도미에는 여성 노동자들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이 그림처럼 빈곤에도 불구하고 내면적인 깊이를 지닌 여성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보러가기

 

트리스탕의 글을 보면 사회 비판의 어조가 때로 너무 격정적이도 하다. 그러나 그 세심한 관찰과 기록은 동시대의 노동자와 여성들을 살려냈다. 직종과 계급, 국가의 벽을 넘자는 노동자동맹론은 아직 막연하지만 동맹을 기대하는 노동자들의 바람을 전하였으며, 여성 노동자도 어엿한 인간이라는 여성주의는 초기 산업화에 종군한 수없는 이름 없는 여성들을 대변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