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지요. 이 말의 목적어는 당연히 ‘돈’일 것입니다. 돈을 개같이 번다는 것은 ‘힘들고 어렵게’를 뜻하는 것이고, 정승같이 쓴다는 것은 ‘값지고 훌륭하게’라는 뜻이 숨어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돈을 벌고 모으는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쓰려고 모으는 것 아닌가요? 허리띠 졸라매고서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악착같이 모으고 또 모아서 통장잔액을 표시하는 숫자가 커지는 데에서만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돈을 ‘쓰기 위해서’ 법니다. 집도 사고, 자동차도 사고, 아이들 교육도 시키고, 친구들과 술자리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도 사고, 나중에 돈을 못 벌 때를 대비해서 미리 모아놓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쓰는 것을 정승같이 쓰는 거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쓰는 것을 일컬어 정승같이 쓴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필자는 씀씀이에 나눔의 미학이 스며 있을 때 정승 같다는 표현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14세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이라는 지루한 싸움을 했습니다. 당시에 프랑스의 ‘칼레’라는 해안도시는 영국군에 대항해서 1년간 끈질긴 저항을 했지만 힘이 부쳐 결국에는 영국군에게 점령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칼레의 시민들은 점령군에게 자비를 구했지만 점령군은 그 동안의 항거에 대한 책임을 물어 칼레시민 중 6명을 대표로 처형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칼레시민들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누구를 대표로 뽑을 것인가에 대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때 홀연히 스스로 대표가 되겠다고 자청한 사람은 다름아닌 칼레시(市) 최고의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라는 사람이었고 이어서 시장, 법률가 등 다섯 명의 귀족들이 시민들을 구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습니다. 누구도 나서기 꺼려하는, 그야말로 죽음의 길에 자신의 몸을 던지고자 한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존경 받고 가진 것 많은 이들이 이런 결정을 하기까지에는 엄청난 고뇌가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 나라로 치자면 대통령, 대법원장, 국회의장, 이건희 회장 같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말이 되겠죠. 근데요… 만약 우리 나라가 칼레시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면 이 분들이 과연 국민을 대표해서 나서 주실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머리 속에 물음표가 2백만 개쯤 떠도는 느낌이 듭니다. 이야기를 계속 하자면, 영국의 왕비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크게 감동을 했답니다. 그래서 왕비가 왕에게 간청하여 칼레시민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결말이죠? 이들 부자와 귀족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후세에 오귀스트 로뎅은 ‘칼레의 시민’이라는 조각을 칼레시에 남겼고,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규 카이저는 이 일화를 바탕으로 한 희곡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이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을 가장 잘 나타내는 사례로 알려져 있는데, 필자는 이것을 현재의 상황에 빗대서 한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가 그 근간이고, 자본주의체제에서 가장 큰 권력은 ‘돈’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돈을 많이 가진 자, 즉 부자가 노블리스라고 해도 괜찮겠지요? 자본주의는 장점이 참 많은 경제체제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단점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단점은 ‘부의 편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부의 재분배’를 위해서 여러 가지 제도를 두고 있는데 세금과 사회보험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금과 사회보험은 소득이 많을수록 더 많이 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노블리스들은 세금과 사회보험을 성실히 납부하는 것만으로도 오블리주를 실천한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워렌 버핏은 본인을 비롯한 미국의 슈퍼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말했고, 로레알 회장을 비롯한 프랑스의 부자들이 부자증세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부자들은 어떤가요? 대한민국의 노블리스들은 과연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상속세만 따져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삼성을 창업한 고(故) 이병철 회장이 작고했을 때 상속인들이 낸 세금은 176억 원이었고, 현대를 창업한 고(故) 정주영 회장의 상속인들은 300억 원을 상속세로 납부했습니다. 반면에 교보생명을 창업한 고(故) 신용호 회장의 상속인들은 1,340억 원을 상속세로 납부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고민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상속세율은 대충 말해서 재산이 30억 원 이상이면 50%가 적용됩니다. 교보의 1,340억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삼성의 176억, 현대의 300억은 납득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니, 대한민국의 1, 2위를 다투던 부자들의 재산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요?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부자? 그까이꺼 대~충 한 1,000억 원만 개같이 벌면 대한민국에서 일등 할 수 있는 거 아녀? 삼성, 현대 제끼면 일등이잖아~’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본주의의 노블리스는 부자들입니다. 노블리스에게는 오블리주가 필연적으로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노블리스들은 안타깝게도 오블리주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땅블리스 돈블리주’라고 비꼬는 말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불편한 진실입니다. 얼마 전에 기사가 난 강호동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MC인데 세금탈루나 투기 의혹은 무척이나 아쉽다. 강호동씨가 노블리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사람이라면 좀 더 스스로를 살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죽을 죄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오블리주를 잠시 망각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합당한 결과가 나길 바랍니다.
이제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기존과는 다르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노블리스들에게 오블리주를 강요하지 않는 대신에,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람을 노블리스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요? 필자의 생각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노블리스입니다. 여러분은 건강보험을 성실히 납부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노블리스입니다. 혹시 한 달에 만원이라도 어딘가에 기부를 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베오베(best of best) 노블리스입니다. 왜냐하면 세금, 건강보험, 기부는 모두 부를 재분배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나눔의 미학이 깃들어 있는 것이고 정승같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히’ 노블리스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영원히 나의 소유인 것도 없습니다. 재테크 열심히 해서, 개같이 벌어서 그거 뭐 할 건가요? 저승에 가져갈 것도 아닙니다. 무작정 모으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모아진 것들을 어떻게 쓸 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노랫말처럼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지 않나요? 필자가 아는 어떤 부자는 가진 거 죽기 전에 다 쓰는 게 목표랍니다. 배부른 소리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일면으론 합리적이란 생각도 듭니다. 씁시다. 단, 정승같이… 그게 나누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