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수학사전

수학의 역사

후암동남산 2012. 8. 16. 20:04

수학의 역사

 

1.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이집트의 나일강, 바벨로니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양강, 인디아의 갠지스강, 중국의 황하 등의 유역에서 문명은 흥하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나일강은 정기적으로 범람하므로 그 피해를 막기 위하여 통치자는 이것을 정확히 예견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정확히 정기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天空에 눈을 돌려서 그 결과 曆을 만들어 냈으며, 이집트인은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전에 이미 1년이 365일과 1/4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또 당시의 지배자는 국민이 입은 피해의 정도에 맞추어 그 세금을 절감해야 했으므로 이로 인하여 수의 계산기술도 상당히 진보되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세계최고의 수학서는 대영 박물관의 Rhind 수집품 중에 있는 아메스의 파피루스이다. Rhind 는 1858년에 이것을 구입했다. 이 파피루스에 기재된 고문서는 1877년 독일의 고고학자 아이젠로올에 의하여 현대어로 번역되었다. 아메스의 파피루스에 의하면 이집트 사람들은 이론적인 성과를 몰랐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 증거로 거기에는 定理가 없음을 들 수 있으며 일반법칙도 거의 없었다. 대개가 같은 종류의 문제를 몇 개고 계속 풀고 있는 것이다. 이 작업에서 귀납적으로 쉽게 일반법칙을 발견할 수 있겠으나 그것을 하지 않고 있다.
아메스의 파피루스에는 神官문자로 분수의 계산을 표기하고 있고, 또한 1개의 미지수를 가지는 1차방정식 및 2차방정식에 귀속되는 문제도 다루고 있다. 조잡한 경험적 기하학의 시초는 계산법과 마찬가지로 먼 옛날임이 틀림없을 것 같다.
또 아메스의 파피루스에는 여러 가지 기하문제 등이 있고, 원주율 π로서는 (16/9)
2 = 3.1604… 를 이용하고 있다. 또한 원과 동면적인 정 4각형의 존재도 인정했던 흔적도 있다. 이집트의 고문서에는 등차급수, 등비급수 등에 해당되는 예를 볼 수 있다. 아메스의 파피루스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아마도 기하학적 지식을 표시하고 있는 최고의 증거품일 것이다. 고대의 과학은 미신과 결부되어 있다. 바벨로니아의 기하학적 도형이 길흉을 점치는 데에 사용되었던 증거도 있다. 그들의 도형 중에는 평행선, 정 4 각형, 오목각을 포함하는 도형 등이 있다. 바빌로니아의 기호 *는 원의 6등분과 60진법의 기원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여기서 6개의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바벨로니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마차의 살이 6개로 되어 있었다는 고서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1차방정식, 2차방정식도 풀고 있었다.

2. 그리스의 수학
이오니아란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소아시아의 서안지방의 고대지명이다. 그리스 최초의 철학파인 이오니아 학파의 창시자는 탈레스(B.C. 640- 546)이다. 기하학을 그리스에 소개한 것도 탈레스이며 또한 그는 피라미드의 그림자를 측정하여 그 실제의 높이를 재어 아마시스 왕을 경탄시켰다고 한다. 탈레스는 그 본질에 있어서 추상적인 직선과 각의 기하학을 창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이집트 사람들은 주로 실험적 성질을 갖는 면적과 입체의 기하학을 취급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탈레스가 발견한 정리로는 다음과 같다.

  • 두 직선이 만날 때 그  맞꼭지각은 같다.
  • 이등변삼각형의 밑각은 같다.
  • 두 개의 삼각형에 있어서 두 변의 길이와 그 끼인각이 같으면 두 삼각형은 합동 이다.
  • 두 개의 삼각형에 있어서 그 두 내각과 끼인 변의 길이가 각각 같으면 두 삼각형은 합동이다.
  • 반원에 내접하는 각은 직각이다.
  •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다.
  • 두 개의 삼각형에 있어서 대응하는 변이 모두 평행 되게 놓여 있으면 두 삼각형은 서로 닮음이다.

탈레스는 위의 정리들에 엄밀한 증명도 붙였고 또한 이들을 실용적으로 응용한 제 1인자이었다고 한다. 예컨대 삼각형의 합동에 관한 정리를 이용하여 해상에 떠 있는 배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 등이었다.
탈레스의 학문을 이어받은 것은 피타고라스(B.C. 580 - 500 ? )이었다. 그는 사모스섬에서 출생하여 이집트에 유학했고 남부 이탈리아의 크로톤에 학교를 세웠으며 그 곳에서 이오니아 학파의 합리주의를 더욱 더 철저히 했고 우주의 조화, 합리성의 이상으로서의 수학을 목표로 하여 「만물은 수이다. 」라는 근본원리를 주장하였다. 수학이라는 말도 이 학파가 창시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법칙으로 그들이 배워야 할 것으로서 기하학, 산술, 천문학 및 음악을 들었다. 또한 그들은 비밀결사를 만들었으며 그들의 교재는 비법이었고 외부로의 누출이 금지되었다.

 (1) 피타고라스 학파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 학파의 독특한 방법은 기하학과 산수와의 연락을 꾀한 것이다. 즉 산수적 사항을 기하학 중에 유사한 형으로 포함되어 있고, 역으로 기하학적 사항은 산수 중에서 유사한 형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피타고라스는 그의 정리와 연락해서 직각 삼각형의 변의 길이를 나타내는 정수를 발견하는 법칙을 연구했다.
피타고라스의 학파들이 발견한 정리는 다음과 같다.

  • 직각 삼각형에 관한 피타고라스의 정리
  • 평행선의 이론으로부터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 직각이라는 정리.
  • 정오각형의 작도법의 발견
  • 무리수의 발견

무리수의 존재는 눈으로 암시되는 어떠한 기하학적 도형에도 없다. 그것은 순수한 추상적 사색에서가 아니면 발견할 수가 없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무리수를 말할 수 없는 것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 조화수열의 발견
    1, 2/3, 1/2 이  3 음의 가장 잘 조화된 음정이라고 하였다.
  • 삼각수와 사각수의 관계 발견
     삼각수 : 1 3 6 10 15 21
     사각수 : 1 4 9 16 25 36 (삼각수의 두 인접수의 합은 사각수이다.)
  • 정다면체가 5 종류만이라는 발견

 (2) 소피스트 일파
기원전 480년에 살라미스만의 대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고 에게해에서 페니키아 사람을 추방하고부터 그리스의 상권은 날이 갈수록 융성하게 되었다. 아테네는 큰 세력을 얻었고 학자들이 몰려드는 중심지가 되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도 이곳에 모였고, 아낙사고라스도 아테네에 이오니아 철학을 이식했다. 이 아테네의 시민들 중 일상의 일은 노예에게 맡기고 소피스트 즉, 智者라고 불리어진 직업적인 가정교사로 이루어진 무리가 출현했었다. 소피아는 智를 뜻하므로 소피스트란 智者의 의미나 이들이 변론의 術을 주로 하게 되었으므로 후에는 궤변가라고 불리어졌다.
원에 대한 기하학은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제외된 것이었는데 이제야 그 시초가 열렸다. 소피스트들의 연구에서는 다음의 유명한 세 문제가 그 초점이 되었는데 어느 것이나 모두 눈금 없는 자와 컴파스만을 사용해서 작도하는 문제였다.

  (i)임의의 각 또는 원호를 3등분할 것.

  (ii)정육면체의 배적문제. 즉, 주어진 정육면체의 2배의 체적을 가진 정육면체를 만 드는 것.

위의 두 문제의 초등기하작도가 불가능하다는 증명은 1837년에 Wantzel P.L. (France, 1814 - 1848)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니 소피스트들로부터 2000년 이상이 지나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iii)員積문제. 즉, 주어진 원의 면적과 똑같은 면적을 가진 정사각형.

이 문제의 초등기하작도가 불가능하다는 증명은 1882년에 Lindemann F. (Deutschland, 1852-1938)의 「 π가 초월수라는 연구 」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 제논(B.C. 495-435)의 역설◑

  • 兩分 : 1 개의 선분상의 모든 점들을 유한의 시간 안에 통과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 아킬레스와 거북이와의 경주

         *거리를 무한히 많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는 가정은 틀린 것이라는 역설임.

 (3) 플라톤 학파
소크라테스(B.C. 469-399)의 제자인 플라톤은 수학을 輕蔑한 소크라테스의 사후에 데오도로스로부터 기하학을 배웠고 이탈리아에서는 피타고라스 학파와 교제하였다. B.C. 389년에 플라톤은 아테네에 학교(Academy)를 열어서 평생교육과 저작에 종사하였다. 이 학교의 현관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출입을 금함」이라고 大書한 일화는 유명하다.
스승 소크라테스와는 반대로 플라톤은 정신 개발상 수학의 가치를 크게 인정하였다. 플라톤은 전문적인 수학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수학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는 거의 없지만, 수학의 연구를 고무하고 기하학에 사용되는 방법의 개선을 시사했다. 그는 이제까지 기하학자들이 본능적으로 사용한 논리를 의식적으로 불안이 없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그와 더불어 용의 주도한 정의와 공준, 공리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4) 알렉산드리아 학파
유클리드(B.C. 330 - 257?)의 생애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그의 저서인ㅒ「원본(Elements)」 13권을 저술한 것은 그가 35세 - 40세 때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내용은 대체로 플라톤 학파의 테아이테토스나 에우독소스 및 그 이외의 학자들이 얻은 결과에 자기 자신이 얻은 결과들을 병합하여 집대성한 것이고 이것을 플라톤 학파의 교리에 따라서 공리, 공준, 정의, 정리의 형으로 배열하고 정리에는 엄밀한 증명을 붙인 것이다.

◐ 유클리드의 공준 ◑

  1. 한 점으로부터 다른 한점으로 직선을 그을 수 있다.
  2. 선분은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다.
  3. 주어진 점을 중심으로 하고 주어진 반지름을 갖는 원을 그릴 수 있다.
  4. 직각은 서로 같다.
  5. 한 직선이 다른 두 직선과 맞나서 어느 한 쪽에서의 두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은 두 내각을 이루면, 그들 두 직선을 한없이 연장시킬 때 그들의 내각이 있는 쪽에서 그들(두 직선)이 반드시 만난다.

지식의 어떤 부분을 둘러보아도 고대의 저술가 가운데 초등기하학에 있어서 유클리드만큼 근대 교육에 권위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유클리드에게 "「원본(Elements)」에 의하지 않고 기하학을 배울 지름길은 없을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유클리드는 즉석에서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유클리드는 기하학을 배워서 무엇에 쓰느냐고 묻는 청년한테 "돈 3 펜스를 갖다 주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르키메데스(B.C. 287- 212)는 당시의 수학자인 동시에 물리학자이었고 그 광범한 여러 가지 실용문제에 응용했다. 특히 대중탕에서 순금의 비중에 관한 발견을 이루고 나체로 시가를 구보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르키메데스는 주로 원과 구에 대한 결과를 얻었는데 다음과 같다.

  • (구의 표면적 )=(대원의 면적의 4배)
  • (구의 체적) = (반경의 3 자승의 4π/3 배)
  • 30/71 < π< 3/7 : 이 결과는 정다각형의 변의 수를 점차 증가시켜감으로써 얻어진 것이라고 한다.
  • 구의 체적 및 표면적은 각각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체적 및 표면적의 2/3이다.

II. 중세의 수학 

알렉산드리아가 오랫동안 경제와 학문, 문화의 중심지이었던데 대하여 로마는 정치의 중심지였으므로 로마에서는 이렇다할 수학의 발전이 없었다. 다만 로마시대에는 여러 가지 算板이 있었음이 특징이다. 그리고 로마의 특유한 것은 12진법의 분수이다.
1881년에 서부 인도의 바그샤리에서 땅속에 묻혀 있었던 산술서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저자를 알 수 없는 산수책인데, 적혀 있는 시문의 특색으로 그리이스 기원 후 3,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도의 최초의 천문학자 아리아바타(476-553)는 2차방정식 부정방정식 마방진 등을 저술했고, 정수의 평방, 입방의 합의 공식도 알았고 π로서 3.1416이라 하였다. 바라마굽타(598-660)은 1차부정방정식    ax + by =c( a,b,c는 정수)의 일반해를 구하고 2차방정식 ax
2 +bx +c =0 (a≠0)의 근의 공식을 얻은 최초의 사람이다.
인도수학의 최대의 공적은 기수법에 있어서의 공헌일 것이다. 즉 0인 수의 사용과 10진법의 자리잡이로 나타내는 습관은 이 나라에서는 그 예로부터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아라비아를 지나서 유럽에 전입되어 결국은 전세계에 유포되게 되었다. 이것에 의하면 0 이외의 9개의 문자만 있으면 어떤 자연수이라도 모두 표시할 수 있게 되고, 이 9개의 숫자 1,2,3, ..., 9는 아라비아 숫자라고 불리어지고 있기는 하나 이것의 원형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III. 근대의 수학 

근대의 수학은 프랑스의 데카르트(1596-1650)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는 페르마와 더불어 소위 해석기하학의 발견자이다. 데카르트에 의하여 시작된 근대수학을 완전히 개화시킨 것은 미분적분학이다. 이 미분적분학에의 가교역할을 한 것은 페르마, 카발리에리, 파스칼이었다.
페르마(프랑스, 1601-1665)는 수론 창시자의 한사람으로 자기의 연구성과를 책으로 저술하지 않았고, 자기가 얻은 결과를 서신에 의하여 친구들에게 전하거나 자기가 읽은 책의 여백에 기입해 놓거나 하였다. 페르마의 서신은 그것이 바로 그의 연구논문인 것이었다. 페르마의 수론에 관한 다음 3가지의 명제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 p가 素數이고 a와 p가 서로 소이면 ap-1≡1(mod p)
  2. a가  4n+1 의 형의 소수이면 a=x2+y2 (x, y는 정수)로 표시되고 이 표시는 유일하다.

xn+yn=zn (n=3,4,...)은 자연수 해를 갖지 않는다.
이것을 페르마의 문제 또는 페르마의 대정리라고 부르고 있다.
n=3,4인 경우에 대하여 페르마 자신이 해결하였다고는 하나 페르마는 증명을 남기지 않았다.
그 후 많은 수학자들이 이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명쾌한 증명을 얻지못하였다. 와일즈(프린스턴대) 교수가 1993년 6월 영국 뉴우턴 연구소에서 페르마정리의 해법을 발표하였다는 1993년 8월 31일 조선일보의 보도로 페르마정리는 우리나라의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기되었다. 와일즈 교수는 당해 10월 석학 6명에게 논문의 검토를 부탁하였는데, 당해 12월 심사위원 1명으로부터 논리의 비약이 있음을 통보받고 테일러(켐브리지대)교수와 공동으로 연구하여 1994년 10월 논문발표을 발표하였다.

1. 미적분학의 발견
미분학은 곡선에의 접선을 긋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적분학은 곡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의 면적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것들은 그리스 시대에도 논해지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한 접선이란 예컨대 원에 대해서는 원과 한 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이외의 점을 공유하지 않는 직선이란 의미이고 이 정의는 말하자면 정적이었다. 이 접선의 개념은 데스카르트와 페르마에 의해서 진일보되기는 했으나 정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이 정적인 생각을 넘어서서 동적으로 생각하여 움직이는 수학이라 할 수 있는 미분적분학을 건설한 것은 영국의 뉴톤(1642-1727)과 독일의 라이프니지(1646-1716)이었다. 미분적분학에 관한 계산법에 관해서는 라이프니지와의 사이에 그 선취권에 관한 논쟁이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발표는 라이프니지 쪽이 앞섰지만, 실은 이미 그 10여년전에 뉴톤이 발표, 연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후대에 와서 밝혀지기도 했다.
라이프니지는 1673년경에 4분원의 면적을 π/4=1-1/3+1/5-1/7+1/9- …로 구했다.

 

2. 19세기 수학의 개막
19세기의 수학은 그 이전의 수학사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대 비약을 이루었고 20세기의 수학, 즉 현대수학으로 이어져 간다. 그 주원인으로서 다음의 것이 생각되어진다. 첫째, 유럽의 대도시에서는 과학의 연구를 추진하기 위한 특수한 제도로서의 과학 아카테미가 정부의 원조를 얻게 되었고, 고등교육기관은 정비되고, 또한 사회적으로 직업적인 학자의 층이 증가하여 이들 학자의 주임무가 연구와 교육에 집중되어 학자 층도 여러 계층으로 넓혀져 갔다. 많은 수학자들이 협력하여 연구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기관으로서의 학회나 정기간행물도 순차적으로 정비되어 갔다. 둘째, 사상적으로는 인간해방의 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고로 진행되고 이것이 수학계에도 크게 반영되어서 자유롭게 생각하는 기반이 형성되어 갔다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수학상의 개념도입이나 과거의 성과에 대한 재편성은 그 첫 30년간에 이루어졌고 이때의 집대성 자로서는 독일 출신 가우스(1777-1855)를 들 수 있다는 것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10세에 1에서 100까지의 자연수의 합을 5050(101 × 50)이라고 답하여서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1795년 게팅겐 대학 2학년때에 정 17각형이 초등기하적으로 작도가 가능함을 증명하여 수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가우스는 수학의 모든 분야에 손을 뻗쳐서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업적을 남긴 학자이고, 그 질과 더불어 양에 있어서도 가우스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이룩한 학자는 그의 이전에도 그의 이후에도 아직 출현되지 않고 있다.

3. 해석학의 기초
무한소해석학의 엄밀한 기초는 프랑스의 코오시(1789-1857)에 의하여 진일보되었다. 그는 평생에 800여편의 논문을 남겼고 그의 논문은 대부분이 장대한 것이었다. 그는 실수와 복소수의 여러 함수, 급수의 수렴과 발산, 방정식의 해법, 유리함수에의 분해 등을 논하고, 함수의 연속성을 정의하였다. 코오시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에는 소위 ε-δ법이 저술되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그는 상극한, 하극한을 도입하고, 수렴에 관한 코오시 조건을 유도했다. 함수항을 갖는 무한급수의 연구에 있어서 코오시는 함수를 테일러 급수로 전개했을 때의 수렴성과 그 급수가 주어진 함수에 수렴하느냐라는 문제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아벨은(1802-1829)은 연속함수항의 급수의 합이 일반적으로는 연속함수가 되지 않음을 보였으며 이러한 연구들은 해석학의 그 후의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우스에 의하여 연구되기 시작한 타원함수는 야코비(1804-1851)와 리우빌리(1809-1882)에 의하여 열심히 연구되어 타원함수론으로 전개되어갔다. 그리고 독일의 바이어스트라스(1815-1897)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바이어스트라스의 많은 업적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의 업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해석학의 기초를 엄밀히 재구성하고 복소함수론에 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4. 현대 대수학의 시작
대수학의 분야에서는 18세기말의 르잔드리의 數論試論에 연이어서 가우스의 수론이 1801년에 출판된 후 수론위 체계가 수립되어갔다. 1820년에 가우스와 코오시가 복소수를 α+iβ로 도입했고 이로 인하여 복소수는 대수학에 있어서 획기적인 작업이 아벨과 갈로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아벨(1802-1829)은 아벨리안 그룹으로 유명한 노르웨이 출신의 학자이며, 1824년에 5차이상의 대수방정식이 일반적으로는 풀리지 않는다고 증명한 것이 유명하다.
갈로아 이론으로 유명한 프랑스 출신인 갈로아(1811-1832)의 업적은 대수방정식의 해법에 관한 것, 즉 방정식의 해법의 연구를 군의 연구로 바꾸어 이론을 전개하는 등 많은 이론을 발표하였다. 갈로아의 이론은 그 당시에는 쉽게 이해되지 못했고, 1870년대에 와서 비로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5.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
기하학에 있어서도 1820년대에 대변혁이 발생했다. 1826년 2월 러시아의 로바체프스키(1793-1856)가 유클리드의 평행선의 공리를 부정하고 [평면상의 직선ℓ밖의 1점을 지나서 이 평면내의 주어진 직선 ℓ과 만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직선을 그을 수 있다.]라는 공리를 설정하더라도 한 기하학이 성립한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다. 한편 프랑스의 폰첼레트(1788-1867)는 포로수용소의 창으로부터 투입되는 빛으로부터 착안하여 [도형의 사영적 성질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1822년에 완성하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소위 사영기하학에 있어서의 쌍대의 원리를 밝혔고 이 논문은 현재의 사영기하학의 한 기초를 이루었다.

IV. 현대의 수학

20세기의 새로운 수학은 독일의 힐버트(1862-1943)의 연구가 모두 그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20세기의 수학은 힐버트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힐버트의 중요한 연구업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884-1892, 불변식론 연구
  • 1892-1898, 대수적 수체의 이론 연구
  • 1898-1899, 기하학기초론의 연구

1900년 8월 8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2회 국제수학자회의에서 [수학의 미래의 문제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통하여 23개의 기본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수학연구의 목표를 설정.

  • 1902-1910, 적분방정식론의 연구
  • 1910-1922, 물리수학의 연구
  • 1922 - 수학기초론의 연구

힐버트가 있었던 괴팅겐 대학은 가우스나 리이만 이후의 수학과 이론물리학이 협력하여 연구되어온 전통이 있는 대학이고 1905년에 아인슈타인(1879-1955)이 특수상대성이론과 광양자설 및 브라운 운동이라는 현대물리학의 개시를 발표했을 때도 가장 빠르게 반응을 보인 것도 괴팅겐 대학이었다. 그 당시 이 대학에 와있던 힐버트의 친구인 민코우스키(1864-1909)는 특수상대성이론을 4차원 리이만 공간의 기하학으로 고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4차원공간은 현재 민코우스키 공간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힐버트의 스펙트럼 이론과 더불어 20세기의 해석학의 또 하나의 흐름은 파리학파에 의해서도 준비되고 있었다. 총서가 출판되기 시작된 것은 전세기의 말이고 그 흐름 속에 르베크(1875-1941)의 적분론이 탄생되었다. 그것은 힐버트의 공간의 실체적 構築을 유도하고 함수공간론으로 전개되었다.
1899년에 힐버트가 발간한 [기하학의 기초론]은 유크리드의 공리계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해서 완전한 기하학 체계를 이룩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유클리드의 시대는 물론, 그 후에도 기하학은 오직 하나 [유클리드 기하학]이 있을 뿐이었다. 공간이 하나만 있듯이 그것을 설명하는 기하학도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이르러 또 하나의 기하학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발견되었으며, 힐버트의 시대에는 이미 이 수학은 당당히 기하학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힐버트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기하학이었다. [기하학의 기초론]의 의의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단지 이론적으로 다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이 무수히 많을 수 있음을 보여준 데 있다. 그는 공리를 새로이 정함으로써 이 무수히 많은 기하학의 하나로 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들어 보인 것이다. [기초론]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기하학 중에는 이전 같으면 도저히 기하학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들이 있다. 유한 개의 점만으로 된 유한 기하학도 그 하나의 예이다. 이 새로운 이론이 수학계에 미친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미 말했듯이 근대 수학의 주된 경향은 자연을 충실히 복사하는 일이었지만, [기초론]은 그러한 낡은 시각을 철저히 부정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까지 기하학이라면 객관적인 외부 세계에 기초를 둔 것이었는데, 이제는 외부와의 상관없는 엉뚱한 것까지도 기하학이라고 불러야 했다. 그 때문에 수학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힐버트가 의도한 것은 자연 속에서 수학을 찾는 일이 아니라 사고의 세계에서 인위적으로 수학을 구성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자연 속에 원형이 있어야 할 필요는 물론 없다. 힐버트의 이 구성적 방법을 공리주의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유클리드의 공리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 신공리주의라고 부른다. 공리는 유클리드에서는 다른 명제를 연역적으로 이끄는 기본 명제였다. 그러나 이제 힐버트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뜻으로 탈바꿈하였다. 힐버트는 공리를 단지 가설로 간주해 공리주의 수학을 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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