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50代 "가난속에 듣던 잘 살아보세 구호, 우리에겐 찡한게 있어"
[투표로 뭉친 50대들] [2] 우리가 이 후보를 찍은 이유표심 움직인 '박정희·북한·경제' 키워드… 50대는 다 겪어봐
"새마을 노래 유행가처럼 불러, 묘한 향수 있다"
"무장공비때 정말 살벌, NLL포기 세력은 안돼"
"등록금 치솟던 기억 생생… 경제살릴 후보 찍어" 조선일보 안준용 기자 입력 2012.12.22 03:12 수정 2012.12.22 11:38
' 박정희 , 북한 , 경제'.
제18대 대선에서 50대 표심(票心)을 가른 키워드는 세 단어였다. 50대는 학창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시대를 직접 경험했고, 남북 대치 속에 안보를 최우선으로 삼는 국가 교육을 받았다. 또 지금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식을 부양하면서 퇴직 전 막바지 경제활동에 나서고 있다. 50대가 공유하는 이 같은 상황이 대통령 후보를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을 만들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 지난 19일 방송 3사의 대선 출구조사에선 50대 3명 중 2명이 박근혜 당선인을, 1명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가 20일∼21일 50대 7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심층 인터뷰 결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정희와 유신
대전에 사는 주부 도모(55)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 당시를 '활기 넘친 사회'로 기억했다. 도씨는 "자고 일어나면 시골집 토담이 벽돌 담장으로 바뀌었고, 중학교 때 처음 전기가 들어올 땐 마을 잔치까지 했다"면서 "새마을노래를 유행가처럼 따라부르던 그 시절의 묘한 향수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독재다 뭐다 말이 많지만 요즘 사람들은 60∼70년대 가난을 상상도 못 해요. 내가 살던 서울 성북구만 해도 노점 해서 그날 번 돈으로 쌀도 못 사고 수제비 타 먹는 집이 수두룩했어. 박 대통령 때의 '잘살아보자'는 구호에 대해 우리 50대는 찡한 뭔가가 있어요." 서울 서초구에 사는 정모(59)씨의 얘기다. 유신 시대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50대도 있었다. 택시기사 이모(58)씨는 "데모는커녕 정부를 조금 비판하는 얘기만 해도 잡혀가던 그 세상이 다시 올까 봐 투표장으로 갔다"고 말했다.
◇북한과 안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친북·종북세력이 활개치는 건 도저히 볼 수 없었어요." 최근 직장에서 명예퇴직한 박모(54)씨의 얘기다. 1952∼62년 태어난 50대 대부분이 6·25 전쟁을 직접 겪진 않았지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북한은 주적'이라는 안보 교육을 받았다. 경기도 광주에 사는 김모(55)씨는 "6·25 피란 때 발바닥이 다 까져 피가 철철 흐르는 채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날 며칠을 걸었다는 아버지 얘기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북한 관련 사건도 이들이 북한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
경북 포항에 사는 김모(56)씨는 "무장공비 침투 때는 어른들이 낮에도 아이들을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할 정도로 살벌했다"면서 "북한이 미사일을 쏜 마당에 NLL 포기 발언까지 했다는 세력들이 당선되도록 놔둘 수 없어 80 된 노모까지 모시고 투표하러 갔다"고 말했다.
◇경제·생활
경기도 고양에서 직원 50명 규모의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김모(51)씨는 "이번 대선 기간 내내 가슴을 졸였다"고 했다. 지난 2003년 참여 정부 출범 첫해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경기가 너무 나빠지면서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은행에서 10억을 대출받아 직원들 월급을 줬어요. 실은 이번에 야당 후보 당선에 대비해서 미리 10억 정도를 모아뒀는데, 직원들 보너스라도 더 주려고요."
주부 이모(52)씨는 "참여 정부 때 하루가 멀다 하고 집값과 등록금이 올라 심지어 아들 대학 등록금은 4년 만에 100만원이 올랐다"면서 "경제 살리겠다고 한 후보를 믿고 남편과 함께 투표장으로 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전에 사는 이모(56)씨는 "1998년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는데, IMF가 찾아온 것도 결국 보수 정권 때였다"면서 "MB 정부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누가 되든 경제는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해 경제 공약은 투표할 때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문조 교수는 "50대는 6·25 이후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전 과정을 겪었고, 지금은 가정과 직장, 사회 모두에서 중심"이라며 "경제·복지·안보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성향이 있다"고 말했다.
1952년생 金씨가 겪은 현대사
1952년생 김모씨는 한 살 때 6·25 휴전(休戰·사진 왼쪽)과 함께 걸음마를 시작했다. 학교에 들어갈 무렵인 여덟 살 때 4·19 혁명을 목도했고, 그 다음해 5·16쿠데타를 겪었다. 13세 때 국군 장병들이 월남으로 파병(派兵)되는 모습을 봤고, 같은 해 한·일협정 체결을 접했다. 18세 때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됐고, 20세 때는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을 봤다<사진 가운데>. 그가 25세 되던 해 대한민국은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했다. 27세 때인 1979년은 10·26 사태와 12·12 쿠데타, 이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20대 후반 정치적 격변기를 거친 김씨는 35세가 되던 1987년 군사독재 종언을 알리는 6·29 민주화운동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세계 속에 한국이 부각되는 모습을 보면서 김씨는 벅찬 감정을 맛봤고, 43세 되던 해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돌파했다. 2년 뒤 닥친 IMF 경제 위기<사진 오른쪽>로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50세인 5년 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즐겼다. 그가 52세 되던 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당했고, 58세이던 2년 전 김씨는 천안함이 폭침되고 연평도가 포격당하는 장면을 바라봐야 했다.
제18대 대선에서 50대 표심(票心)을 가른 키워드는 세 단어였다. 50대는 학창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시대를 직접 경험했고, 남북 대치 속에 안보를 최우선으로 삼는 국가 교육을 받았다. 또 지금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식을 부양하면서 퇴직 전 막바지 경제활동에 나서고 있다. 50대가 공유하는 이 같은 상황이 대통령 후보를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을 만들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 지난 19일 방송 3사의 대선 출구조사에선 50대 3명 중 2명이 박근혜 당선인을, 1명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가 20일∼21일 50대 7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심층 인터뷰 결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조선일보]
↑ [조선일보]
대전에 사는 주부 도모(55)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 당시를 '활기 넘친 사회'로 기억했다. 도씨는 "자고 일어나면 시골집 토담이 벽돌 담장으로 바뀌었고, 중학교 때 처음 전기가 들어올 땐 마을 잔치까지 했다"면서 "새마을노래를 유행가처럼 따라부르던 그 시절의 묘한 향수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독재다 뭐다 말이 많지만 요즘 사람들은 60∼70년대 가난을 상상도 못 해요. 내가 살던 서울 성북구만 해도 노점 해서 그날 번 돈으로 쌀도 못 사고 수제비 타 먹는 집이 수두룩했어. 박 대통령 때의 '잘살아보자'는 구호에 대해 우리 50대는 찡한 뭔가가 있어요." 서울 서초구에 사는 정모(59)씨의 얘기다. 유신 시대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50대도 있었다. 택시기사 이모(58)씨는 "데모는커녕 정부를 조금 비판하는 얘기만 해도 잡혀가던 그 세상이 다시 올까 봐 투표장으로 갔다"고 말했다.
◇북한과 안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친북·종북세력이 활개치는 건 도저히 볼 수 없었어요." 최근 직장에서 명예퇴직한 박모(54)씨의 얘기다. 1952∼62년 태어난 50대 대부분이 6·25 전쟁을 직접 겪진 않았지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북한은 주적'이라는 안보 교육을 받았다. 경기도 광주에 사는 김모(55)씨는 "6·25 피란 때 발바닥이 다 까져 피가 철철 흐르는 채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날 며칠을 걸었다는 아버지 얘기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북한 관련 사건도 이들이 북한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
경북 포항에 사는 김모(56)씨는 "무장공비 침투 때는 어른들이 낮에도 아이들을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할 정도로 살벌했다"면서 "북한이 미사일을 쏜 마당에 NLL 포기 발언까지 했다는 세력들이 당선되도록 놔둘 수 없어 80 된 노모까지 모시고 투표하러 갔다"고 말했다.
◇경제·생활
경기도 고양에서 직원 50명 규모의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김모(51)씨는 "이번 대선 기간 내내 가슴을 졸였다"고 했다. 지난 2003년 참여 정부 출범 첫해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경기가 너무 나빠지면서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은행에서 10억을 대출받아 직원들 월급을 줬어요. 실은 이번에 야당 후보 당선에 대비해서 미리 10억 정도를 모아뒀는데, 직원들 보너스라도 더 주려고요."
주부 이모(52)씨는 "참여 정부 때 하루가 멀다 하고 집값과 등록금이 올라 심지어 아들 대학 등록금은 4년 만에 100만원이 올랐다"면서 "경제 살리겠다고 한 후보를 믿고 남편과 함께 투표장으로 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전에 사는 이모(56)씨는 "1998년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는데, IMF가 찾아온 것도 결국 보수 정권 때였다"면서 "MB 정부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누가 되든 경제는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해 경제 공약은 투표할 때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문조 교수는 "50대는 6·25 이후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전 과정을 겪었고, 지금은 가정과 직장, 사회 모두에서 중심"이라며 "경제·복지·안보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성향이 있다"고 말했다.
1952년생 金씨가 겪은 현대사
1952년생 김모씨는 한 살 때 6·25 휴전(休戰·사진 왼쪽)과 함께 걸음마를 시작했다. 학교에 들어갈 무렵인 여덟 살 때 4·19 혁명을 목도했고, 그 다음해 5·16쿠데타를 겪었다. 13세 때 국군 장병들이 월남으로 파병(派兵)되는 모습을 봤고, 같은 해 한·일협정 체결을 접했다. 18세 때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됐고, 20세 때는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을 봤다<사진 가운데>. 그가 25세 되던 해 대한민국은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했다. 27세 때인 1979년은 10·26 사태와 12·12 쿠데타, 이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20대 후반 정치적 격변기를 거친 김씨는 35세가 되던 1987년 군사독재 종언을 알리는 6·29 민주화운동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세계 속에 한국이 부각되는 모습을 보면서 김씨는 벅찬 감정을 맛봤고, 43세 되던 해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돌파했다. 2년 뒤 닥친 IMF 경제 위기<사진 오른쪽>로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50세인 5년 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즐겼다. 그가 52세 되던 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당했고, 58세이던 2년 전 김씨는 천안함이 폭침되고 연평도가 포격당하는 장면을 바라봐야 했다.
'사는 이야기 > 함께하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년 결혼,이혼에 대한 인식... (0) | 2012.12.22 |
---|---|
다음 대선땐 50대 이상 240만명 더 늘어난다 (0) | 2012.12.22 |
"안정적 변화 추구… 2030 행태에 우려" (0) | 2012.12.22 |
부모와 자녀을 가깝게 하는 13가지 지혜 (0) | 2012.12.17 |
기업별 보며 출근 밥먹듯 야근… 100명 중 1명 21년 걸려 ‘별’ 승진 (0) | 2012.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