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주식이야기

한국 기업 체력 바닥 제2의 IMF 오나

후암동남산 2013. 11. 20. 06:53

▲ 지난 10월 9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열린 동양 채권자 비상대책위원회 집회. 울부짖는 한 참가자의 표정이 IMF 외환위기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photo 조선일보 DB
한국 경제가 국내외 악재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제2의 IMF’가 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조심스럽게 나온다. 국내 악재는 최근 동양그룹을 비롯한 한진해운·현대상선 등 중견기업들이 잇따라 휘청거리고 있어서다. 지난해 이후 웅진그룹, STX그룹이 부도가 나고 있는 상황이다. 중견기업뿐만 아니라 대기업도 심상치 않다. 재계 순위 3위인 SK도 계열사별로 고강도 구조조정에 전격 돌입했다.

해외 악재는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우려다. 미국의 경기회복이 뚜렷해지면서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금리가 인상되면 해외에 투자돼 있던 자금이 미국으로 이동하게 되고 이 경우 신흥시장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코스피는 지난 11월 13일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에 대한 우려로 전일 대비 31.92포인트 내린 1963.56으로 크게 밀린 채 장을 마감했다.

반면 미국 경제는 활기를 띠고 있다. 11월 13일 뉴욕증시는 미국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에도 기업의 실적 호조를 바탕으로 사상 최고치로 마감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전날보다 70.96포인트(0.45%) 뛴 15,821.63에서 거래를 마쳤다.

올해 글로벌 증시 활황세에도 불구하고 6월부터 급락세로 돌아서 따로 놀던 코스피는 최근 외국인 순매수를 바탕으로 10월에 다시 2000선을 회복했으나 동양사태와 미국 양적완화라는 악재에 부딪혀 다시 2000선을 밑돌고 있다.

경제의 바로미터인 주가가 부진한 것은 그만큼 우리 경제의 체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직접 원인으로는 ‘주가의 거울’인 기업 실적이 악화되고 있다. 실적 발표를 끝낸 50개 주요 기업의 올해 3분기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6.0%와 3.6%가 늘었지만 절대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를 제외할 경우 상황이 반전된다. 영업이익은 11조5000억원에서 10조6000억원으로 8.0%, 순이익은 11조1000억원에서 10조1000억원으로 9.3% 줄어든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양대 축인 스마트폰과 자동차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시장이 포화상태여서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이 주도하는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은 선진국 시장에서 이미 보급률 50%를 넘어 포화상태다. 국내 시장은 지난해 3070만대를 정점으로 올해 2630만대(예상)로 이미 내리막길이다.

현대자동차의 올 상반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5.8% 늘어 44조5505억원을 기록했지만 영업이익은 7.7% 감소했다.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질적인 면에서는 크게 후퇴한 것이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는 올해 글로벌 자동차 판매성장률이 3.1%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이다.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한민국은 지난해까지도 해외 언론들로부터 가장 빨리 위기를 극복한 나라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명박 정부가 이 대목을 국정 홍보의 주요 수단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그랬던 우리 경제가 지금은 왜 활력을 잃었을까.

위기는 2011년부터 시작됐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한국 기업 매출액 증가율은 2010년 17.2%를 기록했지만 이후 연속적인 하락세를 보이면서 지난해 4.3%에 그쳤다. 올해 상반기엔 매출액 증가율이 0%였다. 성장이 정체됐다는 뜻이다. 당기순이익률 추이도 2010년 6.8%에서 지난해 4.2%까지 해마다 하락했으며 올해 상반기에는 3.9%로 줄었다. IMF 외환위기 후 5년간 견조한 실적을 보이며 위기를 극복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위기 발생 후 3년도 안 돼 다시 뒷걸음질했던 것이다.

원인은 우리가 위기를 미봉책으로 넘겼다는 데 있다. 이명박 정부는 환율 정책으로 수출기업을 지원했다. 이것이 부메랑이 됐다. 2008년 1월 이후 1년 만에 원·달러 환율은 45% 급등(원화가치 절하)했다. 해외에서 올린 실적을 원화로 환산하면 그만큼 부풀려진 것이다. 이런 환율 효과를 제거하면 2009년 한국 기업은 4% 마이너스성장을 한 셈이다.


고환율 정책은 장기간 쓸 수가 없다. 다른 나라들의 반격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지금 아베 정권의 고환율 정책이 무한정 지속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기업의 본질적인 경쟁력을 높이는 데 주력했어야 하는데 단기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는 환율 정책에 집착했고 이것이 현재의 경제난을 초래한 주범이 됐다. 수출 대기업들이 환율 정책의 최대 수혜자가 되면서 기업 내에서도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돈 버는 기업들은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사내유보로 쌓아놓고 IMF(국제통화기금) 이전처럼 직원들에게 보너스 등의 형태로 많이 풀지 않아 가계에는 돈이 마르는 현상이 심화됐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최근 수년간 스마트폰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린 덕분에 50조원이 넘는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투자처를 찾지 못한 부동(浮動)자금은 700조원에 달한다. 한국 경제는 ‘일부 기업은 부자지만 대다수 개인은 가난한’ 일본형 경제로 체질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IMF 등 다수의 해외 경제기관들은 한국 정부에 내수를 부양하라고 권고했다. 맞는 말이다.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은 소득격차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도 한계를 드러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가계부채가 너무 많아 개인이 쓸 수 있는 돈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돈이 없다 보니 기업들도 투자 늘리기를 꺼리는 것이다.

이처럼 가계부채는 현재 한국 경제가 직면한 최대 현안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만의 유별난 흐름이 있다. 가계부채가 가파르게 증가한 점이다. 반면 미국, 영국 등 상당수 선진국은 가계부채를 줄이고 피나는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2007년 말 665조원이던 가계부채 잔액은 증가세를 이어 2012년 말 964조원으로 늘었다. 여기에 자영업자 부채 등을 포함하면 사실상 가계부채는 1100조원을 넘어선다. 이명박 정부 5년간(2008~2012년) 가계부채는 그렇게 급증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증가세는 이어지고 있다. 1분기에 962조원으로 줄었으나 2분기에 다시 증가세로 돌아선 모양새다. 4·1부동산대책과 함께 주택담보대출이 급증한 탓이다.

▲ 해운업은 수년째 극심한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 사진은 한진해운 선박. photo 한진해운
같은 기간 미국과 영국의 가계부채 잔액은 줄었다. 위기를 맞아 미국과 영국은 가계의 빚 부담을 줄인 반면 한국은 키운 것이다. 이런 흐름은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로 확인된다. 미국의 경우 2008년 말 132.7%이던 이 비율은 2011년 말 119.6%로 떨어졌다. 위기를 맞아 금융회사 리스크 관리가 강화되면서 디레버리징(부채 감축)이 진행된 결과다. 영국도 2007년 말 174%이던 이 비율이 2012년 말 146%로 떨어졌다.

저성장도 고착화되고 있다. 금융위기 이전 연 5% 안팎을 기록하던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2%에 그쳤다. 올해도 2%에 머무를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설상가상으로 고령화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고 저출산 문제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한국 경제가 ‘가계부채 증가→소비 축소→투자 감소→저성장→실업률 증가→가계부채 증가’라는 악순환의 덫에 걸렸는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인 정부 재정이 나쁘다는 점이다. 한국의 기업부채가 원인이었던 IMF 외환위기나 전 세계를 강타했던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한국 정부의 재정이 건전해서 쓸 수 있는 수단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공공부문 부채를 포함하면 정부부채는 이미 GDP(국내총생산) 대비 80%를 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외에서 한국호에 대한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회사인 맥킨지는 박근혜 정부 초기인 지난 4월 보고서를 내고 “한국 경제는 뜨거워지는 물 속의 개구리와 같다. 북핵보다 경제 성장이 멈춰 버린 게 한국의 진짜 위기”라고 경고했다. 당시만 해도 이 경고는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정권 교체 원년에는 신정부가 각종 경기부양책을 활발하게 펼치기 때문에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국내 최고의 민간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도 맥킨지와 같은 맥락의 경고를 해서 충격을 줬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인 삼성의 연구소가 경보음을 발령한 것이다. 정기영 삼성경제연구소장은 지난 10월 삼성그룹 사장단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기업의 이상징후를 경고하고 나섰다. “기업과 정부·사회의 위기의식으로 극복했던 외환위기와 달리 글로벌 금융위기 5년차 이후 한국 기업의 체력소진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 주택담보대출은 가계부채 증가의 주된 요인이다. 사진은 서울 마포구 아현뉴타운의 아파트 분양 현장. photo 김연정 조선일보 기자
한국 경제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신봉호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는 ‘잡 메이킹 이코노믹스’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신 교수는 “한국 경제를 경제로만 접근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며 “일자리 위기 또한 ‘경제 실패’가 아닌 ‘정치 실패’가 주범이고 과도한 정치 개입이 한국 경제의 왜곡을 가져왔다”고 진단했다. 그는 “신규 일자리 창출 능력을 상실한 대기업과 수출 중심 성장 위주의 경제인 ‘1960년대 체제’를 용도 폐기하고 대신 ‘일자리 다산’ 경제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조업 위주의 성장전략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후 경제가 성장해도 고용이 그만큼 늘지 않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어서다. 한국은행은 경제가 성장하는데도 고용이 덜 증가하는 이유는 고용 유발 효과가 적은 제조업 위주로 성장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0억원을 투입했을 때 얼마나 고용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취업유발계수는 2010년 기준 제조업의 경우 9.3명, 서비스업은 16.6명이다. 서비스업이 고용 효과가 크다는 뜻이다.

기업가 정신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현실을 보면 불투명한 기업환경으로 인해 사업영역 발굴은 점점 위축되고 있다. 신규사업 진출을 검토하는 기업체 비중은 2006년 8.5%에서 2011년 4%로 반토막 났다. 글로벌 진출을 통한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 노력도 급감해 한국 기업의 해외직접투자 연평균 증가율은 2003~2007년 47.2%에서 2008~2012년 -0.8%로 추락했다.

아베 정권 출범 후 전개 중인 ‘원고엔저’ 현상은 우리 기업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도요타처럼 우리보다 비슷한 위기를 먼저 겪고 극복한 기업의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도요타자동차는 2008년 말부터 4년간 이어진 엔화강세와 2010년 수백만대에 달하는 북미시장의 대규모 리콜,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라는 3중고에 직면했다. 그러나 도요타는 이를 딛고 지난해 975만대를 판매하며 불과 2년 만에 세계 1위 자동차 메이커로 복귀했다. 자국 모공장과 자공장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해외 공장에 문제가 생기면 자국 생산량을 조절하는 방식의 ‘글로벌 링크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 성공비결로 분석된다.

최근 한국을 다녀간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한스 파울 뷔르크너 회장은 “고령화로 경제활력이 떨어지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은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외의 숙련된 인재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은 전략”이라고 충고했다.

한국 경제의 대표적 비관론자인 최윤식 한국뉴욕주립대 미래연구원장은 박근혜 정부가 최대 현안인 가계부채와 정면승부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계부채 규모가 1000조원이 넘는다고 하면 피부에 안 와 닿겠지만 주위에 아는 사람한테 돈 빌려 달라고 해보세요. 돈 있다는 사람이 도대체 있는가. 이게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가계부채 문제를 제때 해결하지 못하면 이것이 계기가 돼서 우리 경제가 다시 위기를 겪고 나중에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정부부채 악화로 연결돼 다시 위기를 겪게 된다”고 경고했다. “정부가 당분간 경제 성장을 포기하고 금리를 인상해 소비를 줄여서라도 가계부채를 줄여야 합니다. 그러면 수년 후 소비자들이 여력이 생겨 다시 경제가 돌아갈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정치가 복원돼 국민에게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해법으로 제시된다. 한상춘 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은 “IMF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가 빨리 극복한 것은 정책 당국자가 잘해서라기보다 우리 국민이 마지막으로 금모으기운동을 통해 국제사회에 보여줬던 신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우리 정치권이 보여주는 모습은 이와는 정반대다. 여야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정쟁에만 골몰하고 있고 경제개혁법안은 몇 달째 통과가 안 되고 있다.

한보·기아의 연쇄부도,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큰소리치던 정부 당국자들, 경제개혁법안의 통과 무산….

최윤식 원장은 “요즘 대한민국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상황은 16년 전 IMF 외환위기 때와 비슷하다”며 “그때에 비해 외환보유고만 다소 많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유사시 방파제가 돼줄 거라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외국인 투자자들이 올해가 박근혜 정부 원년이라서 내년과 내후년 정도까지는 단물 빨아먹을 게 있다고 보고 있어서 1~2년 내로 ‘제2의 IMF’가 오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