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수십명 구조' 김홍경씨 인터뷰
▶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구출한 뒤 배가 바닷물에 잠기기 직전 탈출한 김홍경씨 이야기는 사고 직후 언론보도로 많이 소개됐습니다. 김씨는 의인입니다. 그런데 김씨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김씨는 사고 초기 출동한 해경의 구조작전을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입니다. 김씨는 한겨레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를 만나러 제주도를 찾았습니다. 언딘의 주검 수습 지연 의혹을 풀기 위해 인천에서 잠수사도 만났습니다.
하늘에 낮게 깔린 먹장구름은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을 쏟아낼 듯 슬픔을 머금고 제주도를 감싸고 있었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려던 그 제주도다. 김홍경(58)씨는 28일 저녁 제주도 서귀포시의 한 거리에서 검은 구름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수십명의 아이들을 구출했다. 선장과 승무원, 많은 어른들이 제 살 길을 찾아 분주할 때 그는 최대한 아이들을 구하다 마지막으로 배를 빠져나왔다. 수십명밖에 구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더 크다. 기자가 김씨를 만났을 때 방송에서는 '살려달라는 단원고 학생의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 발신 시각은 오전 10시17분으로 확인됐다'는 검경합동수사본부의 발표를 전하고 있었다.
사고 충격이 상당하지만 그는 진도에서 서울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직장이 있는 제주도로 왔다. 휴가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배관 설비 기술자인 김씨는 사고 당일 제주도의 한 업체에 취업해 첫 출근을 하던 길이었다. 제주도 공사 현장에서 쓸 차량을 끌고 가야 해서 사고 당일 인천에서 배를 탔다. 그게 세월호였다.
김씨는 4월16일 사고 신고 접수 뒤 진도 앞바다로 출동한 해양경찰청 해양구조대가 너무나 어설프게 대응해 더 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커튼과 소방호스를 밧줄로 삼아 아이들을 끌어올리는 동안 구조대원들은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만 보았다는 것이다. 선실 안에 남아 있던 승객들에게 바깥으로 나오라고 해경이 방송을 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해경 구조대원들의 "직무유기"
진도체육관서 방송사 기자에게
말했지만 전혀 전파 타지 않아
실수 반복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에 인터뷰 응하게 된 것
빌라촌 배관설계를 맡게 되어
제주 첫 직장 출근하러 가던 길
사고 직후 커튼과 소방호스로
학생 수십명 구한 뒤에 탈출
밤마다 침몰 때 떠올라 괴로워
시간이 없어 더 끌어올리지 못하던 그 순간
4월28일 해경은 뒤늦게 세월호 출동 현장 영상을 공개했다. 해경 선박은 선체 주변만 맴돌았고 선실 창문을 깨는 작업도 뒤늦게 했다. 학생들이 다수 있었던 세월호 4·5층에 신속히 구조대원들을 투입해 학생들을 구조했다면 더 많은 생존자가 나올 수 있었다는 여론의 비판이 나왔다.
김씨의 증언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배에 올라탄 일부 해경 구조대원들조차도 선내에 있는 승객들을 구출하러 들어가지 않고 배 바깥으로 나온 승객들만 구조선으로 옮겼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고 직후 저를 인터뷰하러 온 방송사 기자들에게 이런 말들을 했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말만 편집해버리더군요. 제가 휴대전화로 찍은 사고 당시의 영상만 가져갔어요." 세월호에 올라탄 뒤 멀뚱히 김씨의 구조활동을 바라보는 구조대원들의 모습은 김씨가 휴대전화로 찍은 동영상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김씨는 구조 도중 틈틈이 짤말짤막한 영상을 찍었다.
김씨는 28일 저녁 서귀포시의 한 카페에서 두 시간여 동안 자신이 세월호에서 겪은 일들을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사고 당일에 대한 김씨의 심층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힘든 점은 없는지요?
"정신적으로 좀 힘듭니다. 더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요.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더 끌어올리지 못하던 그 순간이 영상처럼 떠오릅니다. 밤에 잠을 자면 한두 시간 만에 깨어났다 다시 잤다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뭔가 생각하던 중에도 갑자기 생각이 뚝 끊깁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다가 몇초 뒤 다시 이전 기억과 현재의 상황이 연결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면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일을 해야 해서 짬이 안 나고."
서천석 교수(서울신경정신과 원장)는 김씨의 증세를 기자로부터 전해듣고 김씨가 전형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그런 증상이 계속 반복된다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의심해볼 수 있다. 초기 대응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단 병원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다.
김씨는 배관 설비 전문가다. 새 건물을 지을 때 김씨는 난방·수도·오폐수 배관의 설비를 도맡아 한다. 배관 설비가 제대로 안되면 건물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배관 설비는 사람으로 따지면 대장과 소장 등의 장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김씨는 설명했다. 그는 30년 넘게 이 일만 해온 베테랑이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1970년대 후반부터 배관 설비 일을 배웠어요. 그때는 한창 양옥집을 많이 짓던 시기였어요. 수세식 화장실과 기름보일러 등을 새로 설치하는 집들이 많았지요. 배관 설비는 유망 직종이었어요."
구조 요청하던 4층의 100명…60명은 못 구해
김씨는 지난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야 할 정도로 많이 아팠다. 간신히 회복한 뒤 제주도에 새 직장을 잡았다. 새로 생기는 대규모 빌라촌의 배관 설계를 도맡게 되어 김씨는 기뻤다. 4월15일 밤 인천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세월호를 탔다. 공사 현장에서 쓸 승합차를 갖고 가야 해서 비행기 대신 배편을 이용했다. 이날 안개가 많이 끼어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16일부터 근무를 해야 해서 그는 배가 무사히 출항하기만을 바랐다.
"원래 15일 저녁 6시30분 출항할 예정인데 안개 때문에 언제 출항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밤 11시까지만 기다려보자며 대기하고 있었는데 밤 9시30분에 출항을 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지요."
'쏴아' 소리와 함께 세월호가 인천 앞바다를 가르며 움직였다. 갑판으로 나간 김씨는 밤바다의 바람을 온몸으로 받았다. 반짝이는 인천대교가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오랜만에 얻게 된 새 직장에 내일부터 출근한다는 설렘이 김씨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선실 안으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가 들려왔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선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던 아이들이었어요. 바닥을 뒹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하마터면 안개 때문에 출항을 못할 뻔했는데 수학여행을 예정대로 가게 됐으니 아이들이 무척 기뻐했어요. 그런 아이들이 다음날 찍소리도 못 내고 죽었으니…." 김씨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객실만 5층 규모이고 높이 30m, 길이 146m에 이르는 여객선이 침몰할 거라고는 김씨도 학생들도 상상하지 못했다.
기자는 지난해 가을 세월호를 타고 제주에 간 적이 있다. 당시에도 비상시 탈출 방법과 구명조끼 안내 등을 받은 적이 없다. 배는 다소 낡아 보였지만 대형 여객선이니 어련히 안전점검 과정을 거치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청해진해운은 안전불감증에 걸린 회사였어요. 1년에 직원 안전교육비가 54만원이라고 보도에 나오더군요. 그러니 비상시 대처요령이 그랬던 것이죠." 김씨가 한숨을 쉬었다.
김씨는 4월15일 이른 밤에 5층 객실(침대칸)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의 방은 배의 오른쪽에 있었다. 부웅거리는 엔진 소리에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6시30분에 눈을 떴다. 객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아침 7시30분 '아침식사를 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침 식사는 8시30분까지 제공됐다. 김씨가 식사를 마친 것으로 기억하는 시각은 7시55분께다.
"아침을 먹고 갑판 산책을 잠깐 한 뒤 제 방으로 돌아왔어요. 정확한 시간은 기억 안 나는데 8시30분이 좀 지났을 때였어요. (해경 발표 세월호 사고 시각은 오전 8시48분) 배가 갑자기 왼쪽으로 기울면서 쿵 하는 소리가 났어요. 배가 (왼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었어요. 그 상태로 15분 정도 지속되더군요. 처음에는 사고인지 몰랐어요. 그냥 거센 파도 같은 것을 만났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요. 어떤 안내방송도 없었어요. 그러고 나서도 (9시3분께) 배가 점점 더 기울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더군요. 세번 나왔어요. 배가 더 기울어 45도까지 기울었어요. 그 상태로 40분 정도 유지됐어요. 만약 그때 해경이 투입됐더라면 더 많은 학생들을 구했을 텐데…."
-가만있으라는 방송이 나왔는데 밖으로 나온 이유는 뭔가요?
"처음에 저는 죽을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다못해 바다에 뛰어들면 어떻게 되겠거니 했어요. 그런데 배가 15도 기운 상태로 가만있는 게 아니고 45도까지 기우는 거예요. 사고라는 직감이 들었어요. 더이상 가만있어선 안 될 것 같아 바깥 상황을 파악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바로 선장이 승객들에게 객실 밖으로 나오라고 했어야 했어요. 그러면 수십명은 더 구했을 텐데. 해양경찰 구조선이 곧 도착한다는 방송만 나왔어요."
-나오니까 어떤 상태던가요?
"다행히 제 5층 (선미 쪽) 객실은 오른쪽에 있었기 때문에 배가 왼쪽으로 기운 상태가 되니까 저는 수면으로부터 가장 위쪽에 있게 된 거예요. 바깥으로 탈출하기 좋은 위치였지요. 탈출을 하려고 복도를 걷는데 '아저씨, 아저씨' 하고 (단원고) 애들이 애절하게 부르는 거예요. 순간 아래를 보니 아이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배가 기우니까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서 앉아 있었던 거죠. 눈동자가 마주쳤는데 아이들 첫마디가 '여기 학생들 많아요. 도와주세요'였어요. 겁에 질려 있었어요. 엉엉 우는 아이들도 있었고. 구명조끼는 끈을 단단하게 묶어야 하는데 그냥 걸치고만 있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끈을 잘 묶으라고 말도 해주고…. 내가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생들은 몇명이나 있었나요?
"4층에만 100명 정도 있었어요. 내가 왔다갔다 하면서 40여명 정도를 구했으니 나머지 60여명은 못 구한 거죠."
커튼 풀어져 아이들 추락, 소방호스로 바꿔
-학생들은 어떤 방식으로 구한 건가요?
"배가 기울어버리니까 바닥이 벽이 된 상황이었어요. 높이가 6m 정도 되는 벽이 생겨버리니까 아이들이 기어 올라올 수가 없었어요. 저와 한 객실을 쓰던 사람들(김씨 외 3명)과 함께 커튼을 찾아 끈처럼 이어서 아이들이 있는 아래로 던졌어요. 아이들이 그걸 붙잡으면 어른들이 끌어올렸어요. 그런데 묶은 커튼이 자꾸 풀어져서 올라오던 애들이 추락하기도 했어요. 안 되겠다 싶어 소방호스를 찾아서 아래로 던졌어요. 아이들이 자기 구해줄 순번을 기다리면서 얼굴을 내밀던 모습이 기억나요."
-힘들지 않았나요?
"배가 누워버리니까 제가 몸을 지탱할 데가 없었어요. 우리도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벽에 몸을 기댄 채 (아이들에게 던져준) 커튼(밧줄)을 겨우 끌어올렸어요."
김씨는 사고 순간을 떠올릴 때 무척 힘들어했다.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중간중간 담배를 태우러 나갔다. 원래 담배를 끊었는데 사고 이후 다시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구조대는 언제쯤 나타났나요?
"애들을 커튼으로 끌어올릴 때까지는 구조대원이 도착을 안 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구조대가 도착했는데 그러고 나서도 제가 한 30분 동안 애들을 열댓명 더 구해냈어요."
김씨가 사고 당시의 여러 순간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영상은 방송사에 건네졌고 반복되어 방송됐다. 물이 차오르던 장면, 아이들이 구조되던 순간 등이 담겨 있었다.
-급박한 상황이었는데 영상을 찍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구조대원들이 (기울어진) 배의 바깥 난간 위로 올라왔어요. 그런데 배 안으로 진입을 안하는 거예요. 왜 배 안으로 진입을 안 하는 걸까 의아했어요. 제가 아이들을 들어올리는 것을 멀뚱하게 보고만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고를 반복했어요. 그래서 영상을 찍은 거예요. 이걸 누군가에게는 알려야겠다 싶어서."
-사고 순간을 찍으려는 게 아니라 구조 방식의 엉성함을 담기 위해서 찍었다는 건가요?
"둘 다예요. 대체 쟤네(구조대원)들 뭐하는 건가 속으로 생각했어요. 같이 아이들을 들어 올리자고 소리지를 경황도 없어서 저는 일단 아이들부터 끌어올렸는데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요."
김씨는 자신이 찍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검은색 슈트(물에 뜨는 잠수복)를 한 구조대원들은 김씨의 머리 위 쪽 난간을 붙잡고 가만히 서서 김씨가 아이들을 구하고 있는 상황을 지켜봤다. 영상을 보여주던 김씨가 말을 이어갔다.
"소방관이 화재 현장에 도착하면 인명을 구조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구조대원들이 배에 올라타고 나서도 선실 안으로 들어가질 않아요. 이거 직무유기 아닌가요. 배에 올라탄 해경 구조대원들이 저나 다른 어른들과 같이 적어도 배가 완전 침수하기 직전(30여분간)까지만이라도 아이들을 끌어올리기만 했다면 최소 몇십명은 더 구했을 텐데 아무런 장비도 없이 배에 올라타서 그냥 보고 있기만…."
김씨는 전남 진도체육관에서 자신을 찾아온 두곳의 방송사 기자에게 이러한 부분을 지적했다고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김씨의 이 말은 전파를 타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구조를 위한) 20분을 날려버린 거예요. 진도관제센터에서 세월호가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느라 몇십분 날려버리고. 배가 쓰러지고 있다면 얼른 20명이든 50명이든 구조대원들이 빨리 왔어야지요. (뒤늦게나마 도착한) 구조대원들은 잠수가 가능한 사람들 아닌가요. 그런데 왜 도착하자마자 배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지 난 이게 이해가 안 됩니다. 2·3층은 내가 못 가봤지만 4층에는 분명 애들이 많았는데…."
세월호와 함께 잠겼다가 살아난 어느 남학생
30일 기준 선체 4층과 5층에서 20여구의 주검이 수습된 상태다. 원래 5층은 승무원 객실과 브이아이피(VIP) 객실이 있어 학생 발견 가능성이 낮게 점쳐졌지만, 사고 당시 물이 차오르자 학생들이 5층으로 대거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해경 구조대가 4층과 5층에 몰려 있던 학생들 구조에 바로 나섰더라면 더 많은 생존자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김씨는 인터뷰 도중 해경 구조대를 지칭해 거친 단어로 비난하기도 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해경 구조대가 징계받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니에요. 다음에 이런 일 터졌을 때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서예요."
해양경찰청 설명을 따르면, 잠수가 가능한 해양경찰은 4월30일 기준 509명에 불과하다. 해경 122구조대에는 잠수가 가능한 해양경찰이 근무한다. 세월호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122구조대는 별도의 함정 없이 고속단정만 운용하고 있다. 고속단정은 구조대 기지에서 20㎞ 이상 해역은 접근하기 쉽지 않다. 세월호 현장은 구조대 기지에서 20㎞ 이상 떨어진 곳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선체 침몰 시 해경이 구조 지휘의 책임을 지는 게 맞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의 수준이지만 정부는 해경의 이런 상태를 계속 유지해왔다.
-찍은 영상을 보면 "어 물 들어온다. 큰일났네. 다 죽었다" 이렇게 말하시던데.
"주위 사람들에게 배 안에 물이 들어찼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한 말이에요. 저는 (객실과 연결된 5층) 출구 쪽에 있어서 물 차는 게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일 수 있으니까. 물 차는 것 보고 당혹스러웠어요. 이제는 더 구출할 수 없고 무조건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배가 90도로 쓰러지면서 물이 아래(객실 쪽)에서 차올라 들어왔어요. '쏴아' 하면서 몰려오더라고요. 따뜻한 실내에 찬물이 들어오니까 수증기도 올라오고. 아이들의 비명소리도 들리고. 너무 마음 아팠어요."
-마지막에 어떻게 빠져나오셨나요?
"5층 객실 천장까지 물이 차올라오는 것을 보고 난간을 기어서 올라갔어요. 저도 긴장을 했는지 주르륵 미끄러지기도 했지요. 마음은 급한데 몸이 안 따라줬어요. 미끄러졌을 땐 순간 죽는가 보다 생각도 들었어요. 선박 난간을 붙잡고 맨 위로 오르니 어민들 배가 바깥에 있는 게 보였어요. 배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직전이었지요. 어민들은 승객이 다 나온 줄 알고 막 세월호 곁을 떠나려던 차였어요. 그런데 내가 보이니까 다시 돌아왔어요. 어선에 올라타자 세월호가 바로 뒤집혀버리더군요. 정말 조금만 늦었으면 저도 죽었을 겁니다."
-5층 객실에서 끌어올린 아이들은 다 살았나요?
"끌어올린 아이들은 다 살았지요. 마지막에 어떤 녀석(단원고 남학생)은 죽다 살아났어요. 이 녀석이 긴장을 했는지 객실에서 끌어올려진 뒤에 배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데 발이 얼어붙어서 움직이질 못하더라고요. 배(세월호)가 뒤집힐 때까지 어선으로 옮겨 타지를 못했어요. 세월호와 함께 녀석이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어갔어요. 저는 녀석이 죽는 줄만 알고 너무 안타까워하는데 가라앉던 배 주변 바닷물 속에서 뭔가 퐁 하고 올라오더라고요. 녀석이었어요. 구명조끼 부력 때문에 바닷속에서 솟아올라온 거죠. (세월호 주변을 벗어나던) 어선을 돌려 녀석을 바다에서 끌어올려 함께 진도로 왔어요. 녀석의 부모가 저녁쯤 진도체육관으로 왔어요. "얘가 죽다 살아난 애예요"라고 부모에게 말해주니 부모가 '감사하다'고 수십번 말하더군요."
-아이들을 더 구하지 못하고 그냥 세월호를 떠난 것인데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봤나요?
"걔네들 얼굴을 내가 가까이서 봤다면 '아저씨 왜 저 못 구했어요' 하며 악몽에 나타났을 것 같아요. 멀리서 아이들을 봤기에 얼굴은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아이들 형상은 기억나요. 손을 모으고 웅크리고 있던 거."
-어떻게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아이들을 구해야겠다고 용기를 냈나요?
"글쎄, 공사 현장에서 일을 많이 했기에 평소 안전교육을 여러번 받았어요. 공사 현장에는 안전관리만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직원들이 있어요. 추락 방지나 화재 대피 등을 담당하는 것이지요. 아무래도 안전교육을 평생 받다 보니 일반 사람보다는 위급한 상황 때 좀 다르겠지요. 극한 상황에 대해 평소 생각을 많이 했어요. 또 원래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좀 차분하게 행동하는 게 제 성격이기도 하고."
"탈출을 하려고 복도를 걷는데
애들이 애절히 부르는 거예요.
눈동자가 마주쳤는데 첫마디가
'학생들 많아요, 도와주세요'
겁에 질려 우는 애들도 있었고"
"공사 현장에서 일해온 덕분에
평소 안전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극한 상황을 평소에도 생각했죠
어려운 상황 처해도 차분히
행동하는 게 성격이기도 하고"
배 안에서 커피 팔던 밝은 표정의 박지영씨
-아이들을 구하고 계실 때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도망친 후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나요?
"몰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탈출했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괘씸했어요. 그런데 선장도 1년 계약 비정규직으로 270만원 월급 받는 사람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일을 할 때 그 사람이 보람과 긍지를 가지려면 그만한 처우를 해줘야 해요. 의무감만 요구할 게 아니라 긍지를 갖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사원으로서 적절한 예우를 받아야 책임감이 생기는 것이죠. 청해진해운이 선원과 선장의 처우나 복지에 더 신경을 썼어야 해요."
-고 박지영씨 같은 승무원 9명은 사망하거나 실종됐습니다.(세월호 총 승무원은 29명. 아르바이트생 4명은 승무원 명단에서 누락됐다가 나중에 발견됐다.)
"박지영씨가 아이들에게 구명조끼 양보하다가 죽은 승무원이죠? 그 사람 기억나요. 사고 당일 아침에 배에서 봤어요. 배 안에서 커피 팔고 있었어요. 식사 배급 때는 그분이 밥도 퍼주고 온갖 잡일은 다 하더군요. 그런데도 표정이 참 밝았어요. 누리꾼들이 의사자 지정해달라고 하는 것 같던데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배에 실은 승합차는 어떻게 되었나요?
"바닷속에 다 잠겼지요. 배상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그걸 요구할 때는 아닌 것 같아서…."
-배가 뒤집히고 나서는 생존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국민들은 구조 시스템이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인지 답답해하는데요.
"저는 생존자가 더 나올 수 없을 거라고 봤어요. 배 안에 물이 어떻게 차오르는지를 본 사람이거든요. 에어포켓 얘기가 나오던데 그것은 상황을 정확하게 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하는 말이에요. 우리나라 해상 재난 구조 시스템은 정말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고 초기 미숙한 대응이 결정적으로 재난을 키웠어요. 승무원들이 승객을 제대로 대피시키지도 못했고, 해경 구조대는 출동해 놓고 배에 진입도 못 했고. 우리나라가 겨우 이 정도였나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입니다. 구조 시스템만 제대로 갖춰져 있었으면 50~60명은 더 구했을 거라고 봅니다."
-재난이 닥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충고 좀 해주세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지만 절대 흥분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하면 됩니다."
-이번에 아이들은 차분하게 행동했는데요.
"그러게요. 어른들이 참 할 말이 없는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지요."
영웅으로 비칠까 부담…악플에 가족들 상처도
김씨는 언론 인터뷰 뒤 자신이 영웅처럼 그려질까 부담스러워했다. 언론이 그렇게 자신을 포장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김씨가 방송사에 건넨 영상에는 김씨의 얼굴 모습이 일부 찍혔다. 가끔 김씨가 웃는 듯한 모습도 영상에 담겼다. 그대로 방송을 탔다. 일부 누리꾼은 "사고 당시에 웃는 사람이 어디 있냐. 저런 사람이 어떻게 영웅이냐"고 악성 댓글을 달았다.
김씨와 그의 가족들은 상처를 받았다. 김씨는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너무 황당하고, 내 인생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악성 댓글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해봤다. 더이상의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다가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에 대해 초기 해경 구조대원의 어설픈 대응을 알리고 싶어서라고 했다.
인터뷰 도중 커피숍 주인은 김씨의 얼굴을 알아보고 김씨에게 오렌지주스를 무료로 가져다주었다. 커피숍 주인은 "김씨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우리나라가 유지되는 것 같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인터뷰는 밤 10시가 넘어 끝났다. 김씨가 인근의 숙소로 돌아가야 해서 택시비를 챙겨주겠다고 기자는 말했다. 기자가 커피값을 계산하는 사이 김씨는 먼저 커피숍을 나가 바로 사라졌다. 김씨에게 전화를 걸자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냥 올바른 보도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서귀포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제법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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