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함께하는 이야기

‘중2병’ 지나가니 ‘고2병’ 오는구나

후암동남산 2015. 12. 17. 18:55

고2 교실은 기말고사 준비가 한창이다. 평소 같으면 시험 생각에 여념이 없어야 할 교실에 이전과 다른 긴장감이 흐른다. 수능 성적표가 나왔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들리는 이야기가 많으니 본인들도 곧 고3이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 같다. 아이들은 툭하면 ‘고3 때는 학원을 바꿔야 하느냐’라거나 ‘선생님이 과외를 해주면 안 되느냐’고 묻는다. 이미 내가 건네줄 말을 아이들은 알고 있다. ‘하던 대로, 흔들림 없이 해나가면 된다.’ 하지만 열심히 했든 안 했든, 2년 이상을 공부에 투자해왔건만 성적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았던 아이들은 이 말에 풀이 죽는다. ‘1년 안에 기적이 일어나서 성적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 안에 뭔가를 해내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기대와 불안 속에서 아이들은 묻는다. '그렇겠죠? 그런데 쌤 저 진짜 어떡해요?'

그야말로 자아분열이 따로 없다. 2년간 성실하지 못했던 순간들에 대한 자책, 고민하면서도 막상 책상에 앉으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자신에 대한 불안, 곧 고3이 된다는 압박과 뭐라도 좋으니 사교육이라도 더 많이 받아봐야 하지 않느냐는 일말의 탈출구를 찾는 마음까지 뒤섞여 아이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런 장광설을 해마다 듣다 보면 아이들에게 ‘이상적인 고3’의 모습이 따로 있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아이들은 자신이 갖춰야 할 덕목과 그 기준에서 미달된 자신의 단점까지 꿰뚫고 있다. 그 기준에 비해 한참 ‘모자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같다. ‘명문대 합격 수기’ 같은 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아이들이니 마음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기 자신하고 그만 싸웠으면 좋겠다.

ⓒ박해성 그림 :
ⓒ박해성 그림 :

이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학교에서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 시를 써오라는 수행평가가 있었다. 제출 전 미리 아이들의 시를 점검하면서, 올해도 고생문이 열렸다는 생각을 했다. 글쓰기 훈련이 안 되어 있을 거라는 예상이야 했지만, 이대로 내면 수행평가 점수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구석구석 배어나는 솔직함은 그 자체로 강점이었지만 그것만 건져내기란 쉽지 않았다. 논설문 쓰기, 토론문 쓰기 등의 수행평가가 진행되던 1년 내내 아이들은 내게 충격과 공포를 선물했다. 동어반복이야 흔한 일이지만, 인터넷의 정보를 열심히 짜깁기해놓고 정작 그것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붙여넣기조차 제대로 못하는 아이도 여럿 있었다. 그랬던 아이들이 이제는 곧잘 글을 써낸다. 글만 쓴다뿐인가. 문학용어를 입에 올리고 개념을 써가며 강사에게 술술 질문을 한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하던 아이들이 작품의 재미를 평가할 줄 알게 됐다. 2년이라는 시간에 아이들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 결과가 본인의 눈에는 차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앞이 너무 까마득하면 지난 2년을 돌아보렴

나는 아이들에게 지금까지 잘 해왔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앞만 보고 가야 하는 게 너무 까마득할 때는 지난 2년을 돌아보고, 지금의 자신이 성장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그 2년 속의 자신이 ‘합격 수기’ 속의 이상적인 모습과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을 통해 엿본 ‘열심히’ 말고 스스로 납득되는 ‘열심’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기를 칭찬해줄 줄 알았으면 한다. 못했든 잘했든 그 시간을 조금씩이나마 헤쳐왔다는 사실은 충분히 자부심을 느낄 만하다. 성장에는 옳은 방법이라는 게 없으니, 그저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다시 달려가면 된다.

아이들은 내 말을 뻔한 말, 무의미한 말로 듣는다. 기껏 많이 컸다고 알려줘봐야 '그래도 한 번에 가야 하잖아요, 재수는 안 돼요'라는 말이 돌아온다. 물론 지금보다는 더 열심히 해야 할 테다. 하지만 재수를 하든, 삼수를 하든, 심지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든, 결과에 관계없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온 시간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