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평가받는 퇴계 이황의 졸기(卒記)입니다. 그가 사망하자 사관(史官)이 인물평을 실록에 남긴 것을 보면 이황이 당대에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죠. 졸기를 보면 이황의 생애가 대략 상상이 되지 않나요?
“빈약(가난하고 검소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고 하니 한 겨울에도 냉랑한 방 안에서 허름한 옷차림이나마 의관을 정제한 채 경전을 읽는 딸깍발이 선비 같지는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 기록대로만 이황의 이미지를 연상했다면 오판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황은 자산 규모가 꽤나 컸던 지역 유지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본인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부를 쌓은 사례였죠.
![천원 지폐에 삽입된 퇴계 이황의 초상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9/15/1f830738-9725-4e4a-b735-50170032e3ff.jpg)
천원 지폐에 삽입된 퇴계 이황의 초상 [중앙포토]
이황도 『성학십도』를 통해 세속의 이익에 대해 경계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부동심(不動心)에 이르러야 부귀(富貴)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여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세워진다."
![도산서원. 도산서원 전경. 앞쪽에 보이는 건물이 이황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하던 도산서당이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9/15/27fcbae1-4961-47db-984d-4fce6ced8200.jpg)
도산서원. 도산서원 전경. 앞쪽에 보이는 건물이 이황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하던 도산서당이다. [중앙포토]
그렇다고 이들이 재산 증식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건 결코 아닙니다. 자신들이 억누른 상공업에 투자하거나 이를 운영할 수는 없으니 눈을 돌린 것은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이었습니다.
그렇다면 500년 전에 살았던 이황의 재산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열쇠는 ‘분재기(分財記)’입니다. 조선 시대에 소위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대부분 분재기를 남겼습니다. 분재기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준 기록인데요. 향후 유산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작성됐죠.
![녹천 이유의 조부인 장영공 이회가 재산을 분배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분재기.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9/15/7728179a-38b9-4d8c-8b22-3d4a7f9c8109.jpg)
녹천 이유의 조부인 장영공 이회가 재산을 분배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분재기. [중앙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