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천서씨(절효공파)

장성서씨

후암동남산 2010. 7. 21. 23:15
 

제목: 정복규의 성씨칼럼

장성서씨(長城徐氏)

 장성서씨는 원래 이천서씨와 그 뿌리가 같다. 장성서씨의 시조 서능(徐稜)은 이천서씨의 시조인 아간공 서신일의 10세손이기 때문이다. 서능 은 고려 고종 때 시중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장성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서능(徐稜)을 1세조로 받들고 이천서씨에서 분적하여 장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장성은 전라남도 장성군의 지명이다.

 1세조 서능 의 아들 서준(徐俊) 은 고려조에서 대장군을 역임했다. 손자 서민경(徐敏敬)은 검교상장군이 되어 부자가 함께 무명을 떨쳤다.

 고려 말에 진안감무를 역임했던 후손 서식(徐湜)은 부모상을 당하자 6년 동안이나 여막에서 시묘(侍墓)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서굉(徐肱)은 조선 초기에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했다.

 병조참판 서숭로(徐崇老), 공조참의 서봉록(徐奉祿), 도호부사 서일명(徐一明), 군자감정 서의건(徐義健) 등도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 절신으로 유명했던 서중보(徐仲輔)는 뛰어난 학행과 고상한 인품으로 명망이 두터웠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조의생 등 71현(賢)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장성서씨는 1985년에 6,381명이었다. 그러나 2000년 현재 4,832명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일부 후손들이 이천서씨로 복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성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장성서씨 후손들은 이천서씨와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이천서씨 절효공파(節孝公派)’로 수보(修譜)를 했다.

 그래서 1973년 양파의 합의에 의하여‘이천서씨 절효공파대동합보(節孝公派大同合譜)’를 편찬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장성을 본관으로 하는 후손과 대동보 발간에서 누락된 후손들만을 장성서씨로 부르고 있다.

( 성씨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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