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천서씨(절효공파)

장성서씨1

후암동남산 2010. 7. 21. 23:20

장성(長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쪽 끝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시이현 (古尸伊縣)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갑성군(甲城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高麗) 때 현재 의 명칭인 장성(長城)으로 고쳐 영광(靈光)에 속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두었다. 1895년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원군(珍原郡)을 병합하였고 1936년 장성 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장성 서씨(長城徐氏)의 일세조(一世祖) 서 능(徐 稜)은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천 서씨의 시조)의 10세 손으로 고려 고종(高宗:제23대 왕, 재 위기간:1213 ∼1259) 때 시중(侍中)을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장성군 (長城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이 능(稜)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이천 서씨(利川徐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식읍(食邑) 으로 하사(下賜) 받은 장성(長城)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으나, 장성을 제외한 지역에 살고 있던 후손들이 동원(同源)이면서도 이천 서씨 절효공파(節孝公派)로 수보(修譜)를 해 옴에 따라 계보 정리에 모순이 발생하여 1973년 양파의 합의(合議)에 의하여 이천 서씨 절효공파대동합보 (節孝公派大同合譜)를
편찬하 였다.

 

그러나 현금(現今)에도 장성으로 칭관(稱貫)하는 후손과 대동보 (大同譜) 발간에 누단(漏單)된
후손들을 위하여 본보(本譜)에서는 장성 서씨를 따로 상고(詳考)하였다.

가통(家統)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일세조 능의 아들 준(俊)이 고려조에서 대장 군(大將軍)을 역임했고, 손자 민경(敏敬)은 검교 상장군(檢校上將軍)이 되어 부자(父子)가 함께 무명(武名)을 떨쳤다.

 

고려 말에 진안 감무(鎭安監務)를 역임했던 후손 식(湜)은 효성(孝誠)이 극 진하여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자 6년 동안이나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굉(肱)은 조선 초기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를 역임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 숭로(崇老)·공조 참의(工曹參議) 봉록(奉祿)·도호부사(都護副使) 일명(一明) ·군자감정(軍資監正) 의건 (義健) 등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 절신(節臣)으로 유명했던 중보(仲輔)는 뛰어난 학행(學行)과 고상한 인품(人品)으로 명망이 두터웠으며, 고려가 망하자 조의생(曺義生) 등 71현 (賢)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1588년(선조 21) 무과(武科)에 급제한 응두(應斗)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鎰)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진주성 (晋州城) 싸움에서 성(城)이
함락되자 김천일·최경창 등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자결하여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홍련(鴻連)은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그외 비서원승(秘書院丞) 인식(寅植)과 돈령부 도정(敦寧莩正) 규연(奎衍)이 유명했고, 행근(行根)은 의금부 도사(義禁莩事)를 역임하여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낸 확과 함께 장성 서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성서씨(長城徐氏)는 남한(南韓)에 총 1,472가구, 6,3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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