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천서씨(절효공파)

이천서씨....

후암동남산 2010. 7. 21. 23:23

시 조 휘(諱):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묘 소: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산촌리 효양산

이천(利川)은 경기도(京畿道)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

 

麗)의 남천현(南 川縣 : 일명 남매현) 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황무현(黃

 

武縣)으로 개칭하여 한주(漢州 : 지금의 광주)에 속하게 하였다가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한때 이천군 (利川郡)이라 하였다.

1257년(고종 44) 영창현(永昌縣)이라 개칭하였고 공양왕(恭讓王) 때 남천군 (南川

 

郡)으로 승격하였다가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다시 이천현으로 격하되었으며, 1444

 

년(세종 2 6)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거듭하다가 1895년 충주

 

부(忠州府) 이천군으로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이천군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

 

다.

서씨(徐氏)의 연원(淵源)은 기자(箕 子)의 40세손 기준(箕準 :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재위기간 20년)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 고 이천(利川)의 서아성(徐阿城)에 와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지명(地名)을 따서 성(姓)으로
삼았 다고 하고, 일설(一說)에는 예맥(濊貊 :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민족) 추장(酋長) 인 여수기(余守己) 의 아홉
아들이 각기 여러 고을의 장(長)이 되어 많은 치적(治績)을 쌓았으므로 백성들이 여(余) 자에 중인변을 붙여서
서씨(徐氏)의 성(姓)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서씨(徐氏)의 대종(大宗)인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시조(始祖)
서신일(徐神 逸)은 신라 효공왕(孝恭王 : 제52대 왕, 재위기간 : 897 ∼912)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내다가 국운
(國運)이 다함을 예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利川)의 효양산(孝養山) 기슭에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은거
(隱居)하면서 스스 로 처사(處士)라 칭하고 후진훈도(後進訓導)에 여생을 바쳤다.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 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신라 창업의 원훈(元勳)으로, 아성대장군(阿城大將軍)을
지낸 서두라(徐豆羅)의 후손으로 천품(天 )이 인자중후(仁慈重厚)하여 화살을 맞고 사냥군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그날 밤 꿈 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감사의 말을 전하기를 "낮에 당신 이 구해 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恩德) 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나이 80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던 그는 그로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고려 초기에 국기(國紀)를 확립(確立)했던 서 필(徐 弼)이다. 고려
광종(光宗)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이었던 필은 항상 솔직한 간언(諫言)으로 왕(王)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
(信任)을 받았다.

특히 그는 광종(光宗)의 지나친 사치스러운 생활과 귀화(歸化)한 중국인(中國人)을 우대하는 폐단을 시정했고,
왕이 관리하던 신하를 죽이려 하자 공자(孔子)가 마굿간에 있을 때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사람의 희생 여부를
물었다는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왕에게 간(諫)하자 이를 용서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한번은 광종(光宗)이 아끼던
금배(金盃)를 하사(下賜)하자 그는 "신(臣)이 이 금술잔을 쓰면 전하는 장차 무엇을 쓰시겠습니까"하며 사양했다
라는 군신지미담 (君臣之美談)이 전한다. 고려 성종(成宗) 때 뛰어난 외교관(外交官)이자 정략가(政略家)로
유명했던 희(熙) 는 필(弼)의 아들로,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話術)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한민족
(韓民 族)의 생활권을 압록강의 자연적인 경계로 확정짓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여 국사상(國史上) 괄목 할 업적을
남겼다. 희(熙)의 아들은 덕종(德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내사령(內史令)에 임명 되고 자손에게 영업전
(永業田)이 하사(下賜)된 눌(訥)과 우복야(右僕射)를 지낸 유걸(惟傑), 유위 (惟偉 : 장야서령), 주행(周行) 등으로
그 중에서 유걸과 유위 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선종(宣宗)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상주국(上住國)
이 되었던 정(靖)은 우복야(右僕射) 유걸의 아들이며, 그의 손자 순(諄 : 좌복야 균의 맏 아들)이 판비서성사
(判秘書省事)에 올라 강직(剛直) 하기로 유명했으며, 유위의 현손(玄孫) 견(甄 : 찬의 아들)은 절신(節臣)으로 이름
났다. 1369년(공민왕 18) 문과(文科)에 급제한 견(甄)은 고려 말에 장령(掌令)을 지냈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
지자 금천(衿川)에 숨어 살며 평생을 조선(朝鮮) 임금이 사는 북쪽을 바라보지 않고 절의를 지켰으며, 고려의
망국을 읊은 시조(時調)가 전해진다. 조선이 개국되자 조정에서는 절개를 지킨 견을 잡아다가 벌을 주자는 의론이
많았으나 태종(太宗)은 "고려의 신하가 임금을 잊지 않고 시 (詩)를 지어 사모하니 가상한 일이다.우리 이씨(李氏)
인들 어찌 천지(天地)와 더불어 영원하겠는가, 만일 우리 이씨의 신하중에 이같은 사람이 있다면 가히 칭찬할
일이다. 그만두고 묻지 말라" 하며 백이숙제(伯夷叔齊)라고 추앙하여 죄를 주는 것을 여러 번 거부했고, 그가 죽은
뒤에 윤근수 (尹根壽)가 상소하여 그의 무덤에 <충신묘(忠臣墓)>라는 표(表)를 내렸다.

고려 고종(高宗) 때 영평(永平)에 살며 빈민규휼(貧民救恤)과 인재(人財) 등용에 공(功)이 많았던 인(鱗)의 손자
광준 (光俊 : 고려말 사재감정을 역임)은 기산(箕山)에 은거(隱居)하며 백이숙제의 정절(貞節)을 견수하여,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분신자결했던 중보(仲輔)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밀직사(密直使) 원(遠 : 순의 7세손)의 아들 선(選)이 태종 (太宗) 때 서자(庶子)의 차별
대우를 주장했고 세종(世宗) 때 좌군도총제(左 軍都摠制)를 거쳐 우의정(右議政) 에 추증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판사재 감사(判司宰監事) 효손(孝孫)의 증손 강(崗 : 참의 곤 의 아들)은 단종(端宗) 때 춘추관
(春秋官)의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문종실록 (文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세조
(世祖) 때는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올라 왕명(王命)으로 「잠서주해(蠶書註解)」를 찬진하는 등 눈부신
업적을 남겼으나 세조의 숭불(崇 佛)을 논란하다가 파직되었다. 한편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했던
기(起 : 귀령의 아들)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토정(土亭)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우고 전국을 돌며 민속과
실용적 학문연구에 전심했으며, 특히 고향인 홍주(洪州)의 풍속이 타락해짐으로 여씨향약(呂氏鄕約)으로 바로
잡 고자 마을에 강신당(講信堂)을 지어 풍속 개량에 앞장섰으나 심한 저항으로 악소배들이 그의 집을 불태우자
처자를 거느리고 지리산(智異山) 홍운동(紅雲洞)으로 들어가 산배(山梨)를 따서 삶아 먹으면서 찾아드는 후학을
가르쳤으며 후에 계룡산(鷄龍山) 고청봉(孤靑峰)으로 옮겨 가서 후진 교육에 진력했다.
「우암집(尤庵集)」에 의하면 왕이 기(起)에게 종으로 하사한 심충겸 (沈忠謙)이 학문에 뛰어나고 실행(實行)이
바르자 즉시 면천(免賤)하여 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처사(處士)라고 불러주자 사람들은 <종이 어진 것이
아니라 주인이 어진 것이 참으로 가상하다> 고 칭찬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복병전술로 함흥(咸興)과 홍원(洪原)에서 대첩을 거두었던 경충 (敬忠)은 정유재란(丁酉再亂)에도
전공을 세워 충무위 좌부장(忠武衛左部將)에 올랐으며, 득천(得 天)과 사원(思遠) 부자(父子)는 임진왜란 때
사재(私財)를 털어 무기(武器)와 식량을 구입하여 의병(義兵)을 모아 왜병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사원 (思遠)의 아우 사적(思迪)은 아버지와 형이 전사하자 7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월성(月城)의 금장산
(金莊山), 선산(善山)의 금오산(金鰲山), 형산강(兄山江) 등지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공을 세워 3부자 (父子)가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지낸 사근(思近)과 군자감정(軍資監正) 효행 (孝行)·공조 참의
(工曹參議) 지관(志寬)·종성부사(鍾城府使) 호(號)·동래 부사(東來府使) 경천 (慶千)·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상국(相國)이 유명했으며, 인원(仁元)은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된 예원(禮元)·덕룡(德龍) 등과 함께 이천 서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남한(南韓)에 총 34,156가구, 144,2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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