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천서씨(절효공파)

조선시대의 노론·소론·남인·북인의 4대 당파.

후암동남산 2011. 7. 24. 07:47

 

조선시대의 노론·소론·남인·북인의 4대 당파.

 

당파의 발생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갈등이 마무리되고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이 현저했던 16세기 선조대 이후였다(→ 붕당정치).

 

사림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그들 사이에 신구 또는 학문적 차이에 따른 정치노선의 차이가 드러났으며, 이전의 척신정치의 잔재도 남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사림이 영남학파인 동인과 기호학파인 서인으로 대립하게 된 계기는 선조초 '이조전랑'(吏曹銓郞)의 자리를 두고 벌어진 척신 출신인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사이의 정쟁이었다.

 

이 정쟁은 당시 정국의 최대 쟁점이었고 심의겸에 대한 태도 문제는 이전의 척신정치 잔재의 청산 문제였다. 그뒤 동인이 권력을 잡으면서 동인은 서인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의견대립으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었고, 북인은 다시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의 옹립 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양분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고 재야세력이던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는데, 서인도 개혁론과 타당파에 대한 대응책을 두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권력은 주로 서인 세력의 집권 가운데 남인과의 공존체제로 유지되었다.

 

효종이 죽은 뒤 왕실의 복상(服喪) 문제로 집권당인 서인과 남인 사이에 이른바 '예송'(禮訟)이 일어나면서, 지금까지의 공존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권력 투쟁으로서의 당쟁은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일제의 식민사가들은 이러한 정쟁을, 조선의 식민지화를 합리화할 목적으로 '당쟁·당파성'으로 확대 해석, 우리 민족성의 산물로 왜곡해왔다. 권력 투쟁의 측면을 포함한 사색당파의 형성 과정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라 확고한 학파적 결연의 사림 집단 사이의 정책을 둘러싼 '정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