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천서씨(절효공파)

조선 중기·후기의 정치운영 형태.

후암동남산 2011. 7. 24. 08:10

 

조선 중기·후기의 정치운영 형태.

 

주자학적인 세계관을 신봉하는 사류(士類)가 이념집단을 형성하고 공도(公道)에 바탕을 둔 공도정치를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집약한 당론(黨論)을 매개로 하여 현실정치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정치체제를 말한다.

 

붕당이란 붕(朋)과 당(黨)의 합성어로서, '붕'은 '동사'(同師)·'동도'(同道)의 사류, 즉 같은 스승 밑에서 의리(義理)인 도를 동문수학하던 무리(벗)를 말하며, '당'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을 지칭한다.

 

일제 어용학자들은 '붕당지쟁'(朋黨之爭)의 줄인 말인 당쟁(黨爭)이라는 용어를 강조함으로써, 당파성과 분열성을 우리 민족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지적하고 이를 식민통치에 이용하기도 했다.

 
유교정치사상사의 맥락에서 붕당은 당초 부정적인 금기의 대상이었다.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戰國時代) 이전까지는 붕당을 막아야 한다고 주창될 정도였으며, 통일 전제국가가 성립된 한(漢)·당(唐) 시대에는 정치는 군왕(君王)의 전관사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어서 붕당을 죄악시했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이르러 구양수(歐陽脩)의 '붕당론'과 주자의 '인군위당설'(引君爲黨說)에 의해서 그러한 붕당관이 바뀌고 그대신에 공도를 추구하는 이념집단으로서 붕당의 존재의의를 인정받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에 훈구세력이 한·당대의 붕당론을 이용하여 신진사류의 발흥을 막기 위한 사화(士禍)를 일으킨 반면, 신진사류는 훈구세력을 구양수와 주자의 붕당론을 근거로 하여 '소인(小人)의 당'으로 규탄했다.

16세기에 행해졌던 척신정치(戚臣政治)는 선조의 즉위로 일단 외형적인 종식이 이루어졌다.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집권함으로써 명종의 외척인
심의겸(沈義謙) 계열은 기대승(奇大升)·윤두수(尹斗壽) 등 신진세력과 결합하고 있었는데, 명종이 세자책봉도 없이 갑자기 사망하여 그뒤를 이어 즉위한 선조초에는 강력한 공신집단이나 외척집단이 형성되지 못하고 붕당이라는 형태로 존재했다.

 

사림은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척신정치 아래에서 성장한 구신료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명종 때에 소윤세력(小尹勢力)이 우세한 상황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징계에 진출한 사림들인 전배(前輩)들은 심의겸을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이고, 일면 구체제적인 요소를 옹호하고 있었다. 반면 선조 때에 진출한 사림인 후배(後輩)들은 구체제를 지양하고자 했으므로 이에 불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배사류들의 정계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이조전랑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거론되자 대립이 악화되어, 1575년(선조 8년) 동서분당이 이루어졌다.

 

심의겸을 포함한 전배가 대부분
서인(西人)이 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후배가 동인(東人)이 되었다. 그런데 동인은 주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반면 이이(李珥)가 서인임을 스스로 정하자 이후 동·서인의 대립은 학연을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그와 관련을 맺고 있던 동인세력까지 확대되어 일시적으로 서인들은 독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옥사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서인의 세력강화를 꺼린
선조는 동인인 이산해(李山海)로 하여금 제재를 가하게 하고, 최영경(崔永慶)·이발(李潑)·이길(李吉)·정개청(鄭介淸) 등의 죽음이 서인세력에 의한 원사(寃死)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명분상 약점을 가지게 된 서인은 이 일로 정계에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동인도 옥사의 수습과정에서 서인세력에 대한 태도의 차이로 '편척서인'(便斥西人)을 견지하는
북인(北人)과 '참용피차'(參用彼此)를 내세우는 남인(南人)으로 분기할 조짐이 보이다가, 임진왜란 말기 북인세력이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면서 확연해졌다. 이중 이황의 제자들이 남인세력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붕당의 존재에 대해서 긍정적이었고, 붕당간의 시비(是非)와 정사(正邪)의 분별을 엄하게 하기보다는 조정의 진정을 위한 '동인협공'(同寅協恭)을 더 중시하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반면 북인들은 주로 조식의 제자들로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정인홍(鄭仁弘)을 제외하고는 재지기반(在地基盤)이 미약했으며, 학문적인 전통도 약했다. 그러므로 기반이 약한 북인들은 권력구조상에서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획일적인 통치체제의 확립을 지향하고, 다른 붕당의 존재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기축옥사에서 서인세력을 견제하려는 선조의 정책으로 이산해가 영의정이 되어 정국을 주도했으나, 임진왜란에 따른 피난 도중 이산해와 유성룡이 전란 초래의 책임으로 퇴진하고, 유배중이던 정철(鄭澈)과 윤두수 등 서인세력이 다시 진출했다.

그러나 서인이 북상하는 왜군을 저지하지 못한 반면 남인인 유성룡·이덕형(李德馨)·김명원(金命元) 등이 명군(明軍)을 이용하여 전세를 역전시켜, 1593년 10월 유성룡이 영의정으로 복귀하고 다시 남인정권이 성립되었다.

 

남인세력은 처음에는 서인세력과 공존체제를 모색했으나, 전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세력관계의 재조정이 필요해지자 정철에게 최영경 옥사의 책임을 추궁하여 서인의 명분을 약화시켰다. 그해 정철이 사망하고 윤두수가 외방으로 나감으로써, 서인은 구심점을 잃고 이후의 정국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다.

이와 같이 서인 세력의 핵심을 정계에서 배제한 남인세력은 서인 가운데 비교적 지지기반이 약하고 중도적인 입장에 서 있었던 이항복(李恒福)·심충경 등을 수용하고, 북인세력 중에서 이산해·정인홍 등을 배제한 채 기타 신진 연소세력들을 등용하여 외형적으로 서인·북인 세력과의 공존체제를 표방했다.

이후 남인세력은 화의(和議)를 통해서라도 전란을 종식시키려고 했으나 오히려 전란의 장기화와 정유재란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남인세력의 재지적 기반인 경상좌도 지역이 심한 피해를 입어 그의 세력기반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1598년(선조 31) 11월 왜군을 완전히 몰아낸 후 척화(斥和)를 견지한 북인세력이 정국에 대거 진출했다. 그러나 북인세력은 구성원간의 정치적인 지위의 차이, 전란이 끝난 후의 현실정국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으로 인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되었다.

유성룡을 옹호한 남인 이원익(李元翼)에 대한 처리방안을 놓고 기성세력인 이산해·홍여순(洪汝淳)과 신진 연소세력의 지지를 확보한 김신국(金藎國)·남이공(南以恭)이 대립했는데, 전자의 지지세력을 대북, 후자의 지지세력을 소북이라고 했다. 정세는 대북의 우위로 끝났으나, 1600년 5월에 이르러 대북세력이 실세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서인들은 기축옥사 이후의 명분상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민생안정과 국방력강화에 중점을 두어 정국을 운영했으나, 1601년부터 자파세력만의 독점적인 확대를 꾀하다가 선조의 견제를 받고 실세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과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대북정권이 성립되었다. 대북정권은 임진왜란에서의 활약과 광해군 즉위 과정에서 자신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자신들만을 군자당(君子黨)이라고 표방했다.

한편 남인들의 종사인 이언적(李彦迪)과 이황을 문묘(文廟)에 종사시킨 데 대해 불만을 품은 정인홍은, 그에 대한 격하를 시도했으며, 동시에 조식에 대한 존숭을 강조하여 대북세력의 학통성과 도통(道統)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대한 사림들의 격렬한 반발 속에서 대북세력은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시도하여 중앙정계를 확고하게 장악하려고 했으나, 남인과 서인은 '강상윤리'(綱常倫理)를 내세워 반대했다.

대후금출병(對後金出兵) 이후 대북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가운데 폐모살제에 대한 처벌과 '존명의리'(尊明義理)를 내세운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여, 주자학적인 명분론을 내세운 서인과 남인의 연합세력이 분열된 지배세력의 결속을 꾀하며 집권하게 되었다.

반정초 이괄(李适)의 난 및 이인거 작변(李仁居作變), 1628년(인조 6)의 유효립(柳孝立) 옥사사건 등을 이용하여 대북파를 완전 숙청한 서인정권은 서인·남인·소북의 3당 연립을 지속했으나, 남인·소북에 대한 대처방안을 놓고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하는 공서(功西:강경파·勳西·義西)와 신흠(申欽)을 주축으로 하는 청서(淸西:온건파)로 갈라졌다. 공서는 또한 서인·남인과의 연합을 주장하는 김유(金瑬)·신흠 등의 노서(老西)와 이귀·나만갑(羅萬甲) 등 서인의 일당정권 수립을 주장하는 소서(小西)로 갈라졌다.

그러나 인조대 집권세력 내부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대립은 사회개혁과 실리적인 외교론을 내걸고 주화론(主和論)의 입장에 선 계열과, 사회개혁에 부정적이면서 명분론적인 외교론을 주장하는 척화론(斥和論)의 입장에 선 계열과의 대립이었다. 전자의 대표 인물들은 최명길(崔鳴吉)·이경석(李景奭) 등으로, 이들은 대체로 소서세력과 결합하여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후자를 대표한 인물은 주전파(主戰派)의 영수인 김상헌(金尙憲) 등으로 주로 노서였다.

 

병자호란 이후 국정을 주도하면서 개혁정책을 실시하던 최명길이 1640년(인조 18) 재상직을 물러나면서, 1646년(인조 24) 김자점(金自點)의 권력장악으로 귀결되고 주화론은 권력유지의 한 방편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과 효종의 즉위가 이루어졌다.

 

효종의 즉위는 친청적(親淸的)인 주화파 세력의 몰락과 반청적인 척화파 세력의 득세, 북벌론(北伐論)의 실질적인 성립 등을 가져왔다. 효종은 북벌론에 의한 군비의 강화를 시도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대동법을 확대하는 등의 재정확대정책을 시행하며, 왕권강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북벌을 내세운 효종의 정책이 양반지배계급의 이익과 배치되면서 이에 대한 많은 반대가 제기되었다. 결국 효종과 송시열(宋時烈)의 독대가 이루어져, 사실상 효종의 부국강병론이 부정되고 군주수신(君主修身)의 선차성이 강조되었다.
1659년 5월 효종 승하 후 서인학자들과 남인학자들 간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가 효종에 대한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1차 예송(禮訟:己亥禮訟)논쟁이 발생했다.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의 서인은 효종은 차자(次子)이므로 대비의 복은 기년(朞年:1년)이어야 한다고 주장해 군주의 지위와 권능을 신권(臣權)의 그것과 상대화하여 군주권을 일정하게 제한하려고 했다.

 

반면 윤휴(尹鑴)·허목(許穆) 등의 남인은 효종이 왕통을 이었으니 장자(長子)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대비의 복은 참최(斬衰:3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히 복제(服制)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파간 이념논쟁 및 정치세력간의 갈등문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인계의 윤선도(尹善道)가 송시열을 '이종비주'(貳宗卑主)로 공격하면서 정쟁으로 비화되었고, 일단 송시열 등의 서인계가 승리했다.

 

그러나 남인계는 오단(吳端)의 사위이자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가(麟平大君家)의 비호 아래 정치세력을 확대해가고 있었으며, 반면 서인들은 대동법 실시를 둘러싸고 김육(金堉) 중심의 한당(漢黨)과 김집(金集) 중심의 산당(山黨)이 대립한 이래 현종의 장인 김우명(金佑明)·좌명(佐明) 형제가 허목·허적(許績) 등 남인계와 결탁하여 송시열계의 예론(禮論)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가 죽자, 역시 조대비의 상복기간을 둘러싼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이것이 제2차 예송문제, 즉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이 과정에서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대공(大功:8개월)을 주장한 서인에게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한 남인계가 승리하여 서인정권이 붕괴되고 남인정권이 성립되었다. 이후 남인들은 서인이 비판세력으로 공존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정국을 주도했으나, 병권의 향배와 서인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680년(숙종 6) 복선군(福善君)과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 등이 역모를 했다는 고변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계가 재집권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 발생했다.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은 군자유(君子儒)에 의한 소인유(小人儒)의 완전한 극복이란 논리하에 청남과 탁남을 불문하고 남인세력을 완전히 제거했다. 그러나 서인계는 송시열 중심의 노론(老論)과, 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 중심의 소론(小論)으로 분열되었다. 이는 양자간의 학문적·사상적 기반의 차이에서 발생된 것으로, 주자절대론과 주자상대론 간의 차이에서부터 명분론·의리론과 실리론 간의 갈등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1687년(숙종 13) 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고 1689년(숙종 15) 왕자의 명호를 정하는 문제로 숙종과 신료들 간에 첨예한 대립을 보이다가, 결국 그해 송시열의 원자상소반대를 계기로 서인은 노서를 막론하고 파직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다. 이것이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그뒤 남인은 노소론의 숙청에 몰두하여, 잔여 노론을 제거하기 위해 '함이완고변사건'(咸以完告變事件)을 일으켰다. 그러나 자연재해 등의 만연으로 농민들이 남인정권으로부터 이반한 상황에서 숙종은 중인층을 끌어들인 소론에게 환국을 종용했고, 결국 1694년(숙종 20)
경술환국(庚戌換局)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정권이 성립되었다. 이후 노소론은 장씨의 처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론전제화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송시열계의 정통주자학에 근거한 집단과 척신의 결탁하에 노론벌열(老論閥閱)과 세도(勢道) 정권의 창출기반이 되었다. 이후 정권 담당층의 정치적인 정통성이 상실되어 사대부층의 지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파행적인 정치운영이 계속되었다. 그결과 중세의 전형적인 정치운영형태인 붕당정치도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민중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정치 형태가 모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