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천서씨(절효공파)

소론의 수장으로서 박세채

후암동남산 2011. 7. 24. 08:17

 

박세채 (조선 문신·학자)  [朴世采]

1631(인조 9)~1695(숙종 21).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박세채 /박세채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
소론의 영수로 당쟁의 근절을 위해 노력했고,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본관은 반남.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의(漪)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1649년(인조2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0년(효종 1)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했을 때, 영남의 유생유직(柳稷)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여러 유생들과 함께 유직의 상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효종이 비답(批答)에서 박세채를 꾸짖자, 이것을 계기로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은거하여 경학에만 전념할 뜻을 세웠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주로 성리학을 연구했고
송시열과도 교류했다. 1659년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해 5월 효종이 죽고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자의대비가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남인에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1년간만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예경기년설(禮經朞年說)을 지지했다
(→ 기해예송).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들이 축출당할 때 삭탈관직당하고 양근·지평·원주·금곡 등지에서 6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다시 기용되어 집의·이조참의·대사헌·이조판서·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무렵 서인들 가운데에는 훈척파(勳戚派)와 청의파(淸議派)라는 두 갈래의 흐름이 생겨 서로 반목했다. 이른바 노론·소론의 분쟁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 훈척파는 김수항·민정중·김석주·민유중 등 남인을 내쫓는 데 공이 많고 나이가 많은 고관들이었고, 청의파는 조지겸·오도일·박태보·박태유·한태동 등 연소한 관료들로 남인들의 완전 제거와 훈척파의 전권(專權)을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붕당정치). 1682년 김익훈·김석주가 남인을 밀고하여 옥사가 발생하자, 청의파에서는 이를 무고라 하여 탄핵했다. 이때 송시열이 훈척파를 옹호하여 청의파와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는 입장에 있었으나, 1683년 송시열이 태조의 위화도회군을 존주대의(尊周大義)라 하여 시호를 높일 것을 주청한 것을 계기로 송시열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이때 송시열·김석주·김익훈 등을 추종하는 사람은 노론으로, 박세채·조지겸·한태동 등을 따르는 사람은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그는 윤증 등 소론계 학자들과 함께 학문교류 및 정치활동을 했다. 1689년 소의장씨(昭儀張氏)의 희빈 책봉문제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했으나,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