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천서씨(절효공파)

서희장군의 가계와 관직

후암동남산 2012. 6. 10. 09:53

서희장군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드립니다.

 

서희 (942(태조 25, 943?)∼998(목종 1))

 

고려 초기의 정치가이며 외교가. 본관은 이천이고 자는 염윤이다.

 

1. 가계와 관직

 

내의령을 지낸 필의 아들이다. 조부인 신일때까지는 이천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에 이어서 서희 자신도 재상위에 올랐고, 다시 그의 아들 서눌·서유걸이 수상인 문하시중과 재상인 좌복야를 지냈을 뿐더러, 특히 서눌의 딸은 현종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아울러 그는 스스로의 재능으로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다.

 

960년(광종 11) 3월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내의시랑 등을 거쳐, 983년(성종 2)에는 군정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가 되고 얼마 뒤 내사시랑평장사를 거쳐 태보·내사령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2. 거란과의 외교담판

 

이와같이 정치적 활동에서도 중책을 맡았으나 외교적으로도 이에 못지않는 많은 업적을 올렸다.

 

972년에 십수년간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그가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이를 물리친 일이었다. 고려의 일방적인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동경유수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거란군은 봉산군을 격파한 뒤, “대조(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였는데 지금 너희 나라에서 강계를 침탈하므로 이에 와서 정토한다.”는 등의 위협을 거듭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지금의 평양)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봉산군을 쳤을 뿐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적장의 속셈을 간파한 서희는 할지론을 적극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민관어사 이지백이 동조하자 왕도 이에 찬성하였다.

 

이때 마침 소손녕도 안융진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에게 패하여 고려의 대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서희가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거란의 군영에 도착하여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이 서희에게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하자 ‘뜰에서의 배례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이라 하여 단호히 거절하며 당당한 태도로 맞서 결국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게 되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원인을 “그대 나라는 신라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소유하였는데 당신들이 그 땅을 침식하였다.”는 것과, “고려는 우리나라와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이 있게 되었다.”고 두가지를 들었으나 침입의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서희는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로 논한다면 상국의 동경(지금의 랴오양)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도거하여 완악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라고 반박, 설득하였다.

 

이와같이 언사와 기개가 강개함을 보고 거란은 마침내 철병하였다. 이러한 서희의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 당당한 태도, 조리가 분명한 주장 등이 외교적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그 결과 994년(성종 13)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귀화진·곽주·귀주·흥화진 등에 강동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3. 성품과 처사

 

서희는 문무를 겸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품도 근엄하고 사리에 밝았던 것 같다. 일례로 성종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미행으로 영명사에 가서 놀이를 하고자 하는 것을 상소, 간언하여 중지시켰다.

 

또 어가를 따라 해주에 갔을 때 임금이 그의 막사에 들어가고자 하니, “지존께서 임어하실 곳이 못 됩니다.”라고 정중하게 사양하였으며, 다시 술을 올리라고 명하자 “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어주를 올리도록 한 사실에서도 그의 면모를 살필 수가 있다.

 

또한 공빈령 정우현이 봉사를 올려 ‘시정의 일곱가지 일’을 논한 것이 임금의 뜻을 거슬렸으나 서희는 오히려 정우현의 논사가 심히 적절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그 허물을 스스로에게 돌렸다고 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정우현은 감찰어사가 되고 서희는 말과 주과를 위로의 증표로 받았다고 한다. 서희는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일신의 영달과 더불어 나라에 큰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996년에 병으로 개국사에 머물게 되자 성종이 친히 행차하여 어의 한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 000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정성을 다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시호는 장위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