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천서씨(절효공파)

[스크랩] 우리 野史 - 외교의 鬼才 서희 장군

후암동남산 2012. 6. 10. 09:56

 

 

외교의 鬼才 서희 장군


(요나라 80만 대군을 말로서 물리친 지략가)



우리나라 역사를 통들어 외교의 귀재를 꼽으라면

누구라도 고려의 서희를 추천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세 치 혀로 요나라의 80만 대군을 물리친 서희


고려사에 기록된 소손녕과의 담판 과정을 통해

서희의 협상 비밀을 보자면 처음 요나라 장군 소손녕은


자신이 황제의 대리이니 무릎 끓고 절할 것을

요구했고 서희는 대등한 신하로서 예를 갖추자고 했다

소손녕이 이를 거절하자 서희는 그 자리에서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소손녕이 굽히고 나서야 비로소 담판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국제 정세를 생각할 때 서희의 그런 배짱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비밀의 열쇠는 바로 전선 상황에 있었다

고려군은 검차 (檢車)를 이용해 요나라가 자랑하는 기병대를 격파했다

수레에 칼과 창을 꽃은 검차부대가 효과적으로 말을 공격한 것


이로서 요나라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지휘관 소손영은 크게

위축되어 있었는데 그 시점이 바로 고려와 요나라의 담판이 벌어졌다



만약 담판이 결렬되면 소손녕은

지친 병사들을 일으켜 다시 싸워야 했기에 불리했다


서희에게는 이런 위험 부담을 안고

소손녕이 담판을 깨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또한 요나라가 고려에 쳐들어 온 이유는 고려가

송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요나라를 배척한다는 데 있었다


이를 간파한 서희는

“아무리 고려가 요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도

여진족이 가로막아 어쩔 수 없다” 라며


모든 분란의 원인을 여진족에게 돌렸고 그러면서

고려와 요나라와의 확실한 교류를 핑계로 강동6주를 요구했다



소손녕의 목적은 본래 고려를 요나라 편이 되게 하는데

있었기에 그로서는 싸움을 오래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과감하게 강동6까지 선뜻 고려에 내주었다


담판 결과 소손녕은 목적대로 고려를

요나라 편으로 되돌렸고 고려는 요나라 군대가 고려 땅 안에서

철수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강동6주까지 얻어 냈다


요나라는 명분을 얻고 고려는 실리를 얻은 셈이다



서희는 말만으로 담판지은 것은 아니다

바로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보는 탁월한 통찰력

요나라 군의 약점을 찌르는 말재간


그리고 적장을 상대로

배짱을 부리는 강심장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


지금이라 해서 다를 것 없다

외교관의 진가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무조건 저자세를 보이거나 고집을 부린다고 통하는 게 아니다



서희장군


본관은 이천. 자는 영윤 (廉允)

아버지는 내의령 (內議令) 을 지낸 필 ()이다


할아버지 神逸(신일)때까지는 이천 지방의 토착 호족이었다가

아버지에 이어 재상에 오르면서 중앙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했고


뒤이어 그의 아들 눌 (訥) 과 유걸 (惟傑) 이

각각 문하시중 (門下侍中) 과 좌복야 (左僕射)를 지냈을 뿐 아니라

訥의 딸이 현종의 비가 됨으로써 고려 사회의 주요 문벌귀족세력이 되었다

 

 

 

 

출처 : 행산재(杏山齋)
글쓴이 : 박연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