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종 12년(993년) 80만 거란군이 공격해오자 온 나라가 들끓었다. 조정에선 항복하자는 안과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안을 놓고 격론을 벌이다가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이에 극력 반대하고 나선 이가 서희(942~998)다. 자진해서 국서를 갖고 적장 소손녕과 만나 담판을 벌인 끝에 거란을 철수시켰다.
거란이 협상에 나선 데는 까닭이 있었다. 변방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거란은 중원을 지배하던 송나라와 대립관계였다. 고려를 침공한 것도 송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서희는 이 같은 판세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마침 오랜 행군과 안융진에서의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거란군에 철군의 명분을 제공하니 받아들일 수밖에.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혜안과 상대의 약점을 활용하는 외교력을 통해 자칫 평양 이남으로 쪼그라들 뻔했던 영토를 지켜낸 것이다.
국제 정세를 간파한 서희의 외교력
후삼국을 통일한 지 50여년이 지난 무렵인 10세기 후반, 고려는 서북방에서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의 위협에 직면했다. 역사적으로 오랜 원한도 있고, 중국 대륙까지 넘보던 거란은 993년 소손녕을 대장으로 하여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해 왔다. 놀란 고려 조정은 서경(지금의 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 분할해 주자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솔군걸항(率軍乞降·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항복을 하자)'의 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거란과의 외교적 담판을 주장하고 자신이 직접 회담의 대표로 나서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서희(徐熙·942∼998)였다. 담판 결과는 거란의 80만 대군을 돌려보냈을 뿐 아니라, 거란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던 압록강 유역의 강동 6주까지 고려의 영토로 인정받는 예상외의 엄청난 수확을 얻었다. 어떻게 이러한 협상이 가능했던 것일까? 당시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거란의 소손녕은 고려가 국경을 맞대면서 왜 송나라에 하는 것처럼 거란에 조공을 바치지 않느냐고 서희를 윽박질렀다. '조빙(朝聘)'이라는 말을 쓰면서 고려가 거란과 국교를 맺고 예를 갖추라는 것이다. 이것은 거란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태도에서 한발 물러선 것으로서 거란이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서희는 이 제안을 바로 수용하지 않고, '환아구지(還我舊地)', 즉 '고려의 옛 영토를 돌려 달라'는 것을 협상 카드로 내세운다. 거란과 국교 수교의 전제 조건으로 압록강 일대 강동 6주를 고려 영토로 인정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결국 소손녕은 서희가 제시한 조건을 거란의 왕에게 알리고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중국 송나라와의 외교 단절과 거란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워 993년부터 1018년까지 3차례에 걸쳐 자행된 거란의 고려 침입을 묘사한 그림. |
결국 거란은 고려와 '평화적인' 외교를 수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고, 거란의 이러한 의중을 서희는 정확히 파악했던 것이다. 실제 거란은 고려의 정복보다는 고려가 송과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려를 침공한 측면이 컸다. 따라서 고려로부터 송과 연합하지 않고 거란과 국교를 맺겠다는 서희의 약속을 받아낸 이상, 자신들이 관리하기에도 힘든 압록강의 강동 6주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카드였던 셈이다. 서희는 고려와의 국교를 목표한 거란의 심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당당히 강동 6주를 요구했고, 이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과 후금군의 전투를 그린 '사진검격도'(위)와 조선군의 투항 장면을 그린 '양수투항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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