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변동에 민감해진 한국인, 지갑부터 닫는다

가계저축 줄어 완충 역할 못해… 소비 위축 → 경기불안 악순환 
 
교사 조모씨(42·여·서울 자양동)는 지난달부터 가계부를 쓰고 긴축에 들어갔다. 유럽 재정위기로 올 하반기 경제가 나빠질 것이라는 뉴스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됐다. 백화점 여름 할인행사 기간에는 아이들의 운동화만 구입하기로 했다. 조씨는 "남편도 대기업에 다녀 당장 급여가 줄어들 걱정은 없지만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데 씀씀이라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경제학 교과서에는 '소득 변동성'이 '소비 변동성'보다 크다고 나와 있다. 예를 들어 1년에 2000만원을 벌어 1000만원을 소비하는 가계는 소득이 1500만원으로 줄더라도 소비를 갑자기 줄이지 않고, 반대로 소득이 2500만원으로 증가하더라도 그만큼 소비를 늘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비는 경기가 급변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같은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경기가 나빠질 것으로 예상되면 개인은 미리 지갑을 닫고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이로 인해 경기는 더욱 빠르게 하강하게 되고, '경기 악화→소비위축→ 경기악화 확대'의 악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올 초 전문가들은 2011년 4·4분기 경제통계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고용이나 물가여건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국내총생산(GDP)이 전분기에 비해 0.3% 증가했는데 민간소비는 전분기 대비 0.4%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재정위기가 부각되면서 금융시장이 출렁이고, 경제 전망이 악화한 것이 소비심리를 꽁꽁 얼어붙게 한 것이다.

1998년 외환위기 직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빚어졌다. 한국은 1999~2002년 가계소비 증가율이 GDP 증가율보다 더 높았다. 2003~2004년 GDP 성장률이 둔화할 때는 가계소비만 유일하게 감소했다.

외환위기를 겪은 동남아 4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태국)과 비교해도 한국은 소비변동성이 높았다. 한국은행의 2006년 연구를 보면 1998~2004년 한국의 가계소비지출 변동성은 3.9로 비교 대상인 태국(2.6), 말레이시아(1.9), 인도네시아(1.6), 필리핀(0.3)보다 높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가계저축이 외환위기 이후 급격하게 줄어 경기수축 국면에서 완충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가계에 여윳돈이 없으니 경기가 나빠질 것으로 예상되면 무조건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면 1990년대 초반 25% 안팎이었던 가계저축률은 현재 3~4%로 하락한 상태다.

가계자산의 대부분이 부동산 등 실물에 묶여있다는 점도 소비를 어렵게 한다. 미국은 금융·실물자산 비율이 5 대 5 정도이지만 한국은 2 대 8로 실물자산 비율이 월등히 높다. 특히 지금처럼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시기에는 소비를 위해 아파트를 내놓아도 제값을 받기가 어렵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것이나, 원유 등 가격 변동 폭이 큰 원자재 수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도 소비자들을 경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게 만든 요인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