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함께하는 이야기

기본이 상실된 시대...그래도 희망의 씨앗은 있습니다.

후암동남산 2014. 8. 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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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상훈씨 페이스북
솔직히 말하겠다. 난 어제 저녁 남몰래 울었다. 눈물은 참을 겨를도 주지 않고 주르륵 흘렀다. 천사를 닮은 한 여학생 때문이었다. 난 이 학생을 만난 적도 없다.

경기도 여주에 사는 중학교 1학년생 이윤주양. 윤주 양은 지난 5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23일째 단식 중이던 김영오씨를 찾아갔다. 김 씨는 세월호 참사로 우리 곁을 떠난 유민이의 아빠다. 해맑은 미소를 갖고 있는 윤주 양은 스케치북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김 씨에게 자신이 쓴 글을 보여줬다. 영화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에 등장했던 그 유명한 장면의 의사 소통 방식으로 말이다.

"아저씨, 제 글을 읽어주세요. 어제 뉴스에서 홀로 외롭게 싸우시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저씨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습니다. 세월호 침몰 벌써 110일이 넘었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끔찍한 사실이 저는 무섭습니다. 저는 아저씨 편입니다. 대한민국이 더 이상은 무서운 나라, 잔인한 나라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니오빠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많은 학생들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난 평생 이토록 감동적인 글을 본 적이 없다. 그 어떤 사랑의 밀어도, 그 어떤 지도자의 연설문도, 그 어떤 시인의 슬픈 연가도 이렇게 마음을 움직인 적이 없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오른 글과 사진을 보는 순간 주책없이 울었던 것이다.

못난 어른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어린 여학생이 했다. 스케치북에 또박 또박 글을 쓰고, 옷을 차려 입고, 집을 나와 광장까지 먼 길을 발품을 팔며 왔을 윤주 양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갸륵한 정성이, 그 고운 마음씨가, 그 순수한 영혼이 나를 비롯한 많은 어른들을 부끄럽게 했다.

아마도 그 감동은 역설적이게도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 이 사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과거 한때 소중했던 가치들, 그러니까 공감, 배려, 양보, 존중, 희생, 사랑과 같은 가치를 상실해버린 사회 말이다. 그 가치에 대한 기억은 이제 바닷가 모래성처럼 파도에 사라져버렸다. 우리는'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기본'을 상실한 대가로 마침내'윤 일병'이나 '김해 여학생'과 같은 잔혹 범죄의 피해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 희미하게나마 믿고 있었던(한때 인간 사회를 지탱했고, 짐승과 구별을 줬던) 기본적 가치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의 놀라움이란. 우리는 이미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젠가부터 내 이익을 취하면 남이 손해를 본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 이익을 악착같이 좇는 '집단 최면'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내 쾌락을 위해서라면 남이 상처받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무서운 생각. 공감 능력의 결여다. 흔히'사이코 패스'들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해 고통을 주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이 사이코 패스의 범주를 조금 넓히면 우리 사회는 이미 '사회적 사이코 패스'들을 양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소위'일베충'이란 집단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들은 타인의 상처, 고통, 비극을 비웃고, 놀리고, 그 짓으로부터 쾌감을 느낀다. 이들은 무시해도 되지만 문제는 이들에 못지않은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들도 있다는 데 있다. 소위 '여론 주도층'의 '일탈'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관으로 충만한 사회에서 난 그야말로 한줄기 희망의 빛을 봤다. 13살 윤주 양에게서 말이다. 잊고 있었던, 어쩌면 포기했던 그 빛나는 가치들이 살아 있음을 그 어린 소녀에게서 봤다. 제발 내가 몰랐던 수많은 윤주 양들이 있기를. 미안해요, 윤주 양. 그리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