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남산이야기

예시바 yeshiva

후암동남산 2017. 3. 31. 21:04

예시바

다른 표기 언어 yeshiva


요약 수많은 유대인 〈탈무드〉 교육 기관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
yeshivah, yeshibah라고도 씀. 복수형은 yeshivas, yeshivot, yeshivoth, yeshibot.

이 학교들에서 이루어지는 성서 및 율법 해석과 성서 응용은 여러 세기 동안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을 규정하고 지배해왔다.

제도적 틀을 갖춘 '예시바'의 초기 역사를 알려주는 것은 간접적인 증거들뿐이며, 그 명칭이 널리 사용된 것도 1세기에 들어와서였다. 랍비 문학은 〈구약성서〉의 족장 시대, 이집트 포로 시대, 광야에서의 방랑 시대에 이루어진 종교교육에 대해 언급하며, BC 190년경 씌어진 〈집회서〉는 그 저자 벤 시라가 학교를 운영했다고 전한다. 1세기에는 힐렐샴마이라는 현자(賢者)들이 영향력있는 종교 학교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제2성전시대(BC 6세기~AD 70)에 종교교육의 주요원천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최고 사법기관이었던 대(大)산헤드린이다. 이 기관은 '베트 딘'(재판의 집)으로서 갖고 있던 기능은 '베트 미드라시'(학습의 집)의 기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산헤드린의 현자들은 학생들을 모아 유대교 율법에 정통하도록 훈련시킴으로써 그들이 산헤드린과 산헤드린의 감독을 받는 지역 법원들의 토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취지에서 71명의 산헤드린 구성원들은 최종판결을 내리기 전 학생들 앞에 '앉아'(이런 뜻에서 히브리어로 yeshiva, 아랍어로 metivta라고 함) 기록된 율법과 구전율법(할라카)을 연구하고는 했다.

70년 제2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예루살렘 바깥에 자리잡은 대(大)랍비들을 중심으로 종교생활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예시바'는 요하난 벤 자카이의 학교였다. 그는 유대의 해안 근처 야브네(또는 얌니아, 지금의 이브나)에 이 학교를 세웠다.

그뒤를 이어 종교 연구를 주관한 타나임('교사들')과 현자들은 시메온 벤 가말리엘(175 죽음)과 그의 아들 유다 하 나시(135경~220경)였다. 그리고 이들의 지도 아래 미슈나 편찬이 마무리지어졌다.

3세기 중반부터 유대교 학문은 아모라임('강사들' 혹은 '해석자들')이 미슈나를 법률적으로 해석하는 데 집중되었다.

팔레스타인 '예시바'들은 리다·카이사리아·세포리스·티베리아스에 세워졌다. 이 학교들은 '팔레스타인 탈무드'를 내놓았고, 미드라시(성서에 대한 설교체 주석들)를 편집했다. 같은 시기에 바빌로니아에서도 '예시바'들이 번성했으며, 이 가운데 두 곳이 특히 유명했다. 하나는 218년에 아바 아리카가 수라에 도착한 뒤에 세워진 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유다 바르 에제키엘이 품베디타에 세운 학교이다.

200년경~1040년 이 두 '예시바'는 교육의 전당으로서 폭넓은 권위를 누렸고, 율법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바빌로니아 '예시바'들이 쇠퇴하자 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독일과 중부 유럽에서 다른 '예시바'들이 등장했다. 그뒤 유대인들이 동쪽으로 이주하자 폴란드에 유명한 '예시바'들이 세워졌다. 1492년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되자 새로운 유대교 교육 시설들이 투르크와 팔레스타인에 등장했다.

폴란드 '예시바'들은 1648~49년의 심한 박해 때문에 급격히 줄었으나, 18세기 후반 '하시디즘'이라는 신비주의 및 경건주의 운동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유대인 대다수에게 감화를 주었고, 그결과 새로운 '예시바'들이 생기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동유럽의 계몽주의 운동(하스칼라)이 유대교를 현대문화에 적응시킴으로써 '예시바'들의 전통에 도전했을 때, 하임 벤 이삭은 러시아 볼로진에 '예시바'를 세워(1803) 이 운동의 영향력에 대응하고자 했다.

볼로진 '예시바'는 1892년에 문을 닫을 때까지 러시아 유대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볼로진 '예시바'는 랍비 후보생 교육에 세속 과목들도 포함시킴으로써 유럽(리투아니아·폴란드·헝가리) '예시바'들의 전통적인 교과 과정에서 이탈했다. 미국 최초의 '예시바'는 볼로진 '예시바'를 본떠서 세운 '뉴욕 에츠 하임'(⁽Etz Ḥayyim of New York : 1886)이었다. 이 학교는 '랍비 이삭 엘카난 예시바'(1896)로 발전했고, 1928년에는 '예시바대학'으로 1945년에는 '예시바대학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1939~45) 이전과 전쟁기간에 나치가 유럽 유대인들을 박해한 결과 수많은 '예시바'가 와해되었고, 많은 학자들과 랍비 후보생들이 영국·캐나다·미국·팔레스타인 등지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가장 우수한 '예시바'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있다. 개혁파 및 보수파 유대교의 랍비 신학교들은 보통 '예시바'라고 부르지 않는다. 미국에서 정통파 유대교의 후원으로 열리는 주간학교는 일반적으로 '작은 예시바'(yeshiva qeṭana)로 불린다.


'사는 이야기 > 남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산에서 바라본 일몰  (0) 2018.03.25
남산도서관에서  (0) 2017.04.24
미슈나 Mishna   (0) 2017.03.31
탈무드  (0) 2017.03.31
토라 Torah   (0) 2017.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