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함께하는 이야기

"훌륭한 사람 말고 성실한 사람 되려 하죠"

후암동남산 2018. 12. 17. 11:03

사회역학 개척, 김승섭 고려大교수
작년 14개 출판상… 새책 출간

김승섭 교수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낫고, 아픈 것보다 건강한 게 낫다는 게 보건학의 기본 전제”라며 “가난하고 차별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일찍 죽어서는 안 된다는 걸 증명 하는 게 사회역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김승섭 교수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낫고, 아픈 것보다 건강한 게 낫다는 게 보건학의 기본 전제”라며 “가난하고 차별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일찍 죽어서는 안 된다는 걸 증명 하는 게 사회역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김승섭(39)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는 '스타 학자'다. 소방관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 같은 특정 사회 집단의 건강 실태를 연구하는 '사회역학' 분야를 한국에서 개척하고 있다.

작년에 펴낸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한국출판문화상 등 14개 출판 관련 상을 받았다. 언론 매체가 꼽은 '올해의 책' 명단에도 거의 예외 없이 이름을 올렸다. 연세대 의대를 나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인 경력에 해사하게 생긴 외모까지 화제가 됐다.

이런 경우 학자들은 대개 비슷한 경로를 밟는다. 강연과 기고 요청이 쏟아지고 TV 출연도 잦다. 전문 분야를 넘어 논평을 하게 되고, 각종 자문위원회에 이름을 올린다. 강의실 밖에서 더 자주 만나는 명사가 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스타가 됐지만 명사가 되진 않았다. 강연과 기고도 한 달에 한 건을 보기 힘들었다. TV 출연은 아예 없었다. 대신 1년 반 만에 새 책이 나왔다. 인간의 몸과 보건 의학에 관련된 지식이 생산·유통되는 과정을 다룬 '우리의 몸이 세계라면'(동아시아 刊). 조선시대 의학 발전부터 현대의 담배 유해성 논쟁까지 시공간을 가로질러 인간의 건강에 관한 각종 지식이 경합한 역사와 배후에 작동한 권력 문제를 다뤘다.

김승섭 교수가 고려대에서 강의하는 모습. 신간 ‘우리의 몸이 세계라면’은 그가 진행한 ‘공중보건의 역사’ 강의록을 토대로 쓴 책이다.
김승섭 교수가 고려대에서 강의하는 모습. 신간 ‘우리의 몸이 세계라면’은 그가 진행한 ‘공중보건의 역사’ 강의록을 토대로 쓴 책이다. / 동아시아

미셸 푸코, 필립 아리에스처럼 1990년대 유행했던 인문학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한마디로 전작보다 어려웠다. 어떤 결기가 느껴졌다. 명사 대신 학자의 길을 택한 것처럼 보이는 김 교수와 지난 12일 서울 고려대 안암캠퍼스 연구실에서 마주 앉았다. 연구실 문 앞에 '택배 기사님, 택배는 ○○○호로 보내주세요'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의존명사 덧붙인 호칭에 눈길이 갔다.

―1년 반 만에 신간을 낸 셈인데 사전에 계획한 책인가요.

"학교에서 '공중보건의 역사'라는 강의를 맡았는데 녹취록을 책으로 내자고 출판사 편집자와 의기투합했죠. 편집자가 한 학기 동안 청강을 했습니다. 그런데 강의 녹취를 들어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말을 그대로 글로 옮기니 밀도가 너무 낮았다고나 할까요. 결국 처음부터 다시 썼어요. 편집자를 믿고 협업하지 않았으면 못 냈을 겁니다."

―스타 저자가 됐습니다. 강연 요청 같은 제안이 많았을 텐데 대부분 거절했다고요.

"서운한 분이 많을 거예요. 정말 거의 다 거절했거든요. 이름이 알려지는 게 무서운 일이더라고요. 갑자기 사람들이 막 제게 '존경한다'고 다가오는 거죠.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저는 알거든요. 마땅하지 않은 칭찬을 듣는 건 위험한 일이죠. 스스로 다짐했어요. '이 시기를 잘 넘기지 못하면 망가질 수 있겠구나'."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군요.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우리 훌륭한 사람이 되지 말자'는 거예요. 성실한 연구자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해야 하는 걸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요."

연구실 벽에는 '매일 두 시간 읽기'라는 다짐이 적혀 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출간 후인 올해에도 고려대 최우수 연구상 '석탑연구상'을 받았다.
김승섭 교수의 연구실 벽에 가장 크게 붙어 있는 말. ‘매일 2시간 읽기’. / 이한솔 영상미디어 인턴기자

―잘 생긴 것도 스타성에 한몫했다는 평가가 있던데.

"몸 둘 바를 모르죠(웃음). 다만 제 연구 분야는 인기 있는 학문이 아니에요. 제가 알려지는 게 제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은 있는 것 같아요."

구로공단에서 하버드까지

김 교수는 연세대 의대 98학번이다. 의대생들의 삶은 대부분 입학 때 정해진다. 의대는 미래가 보장된 곳이며, 그 미래 대부분이 비슷하다. 20년이 지난 지금 김 교수는 동기 대부분과 다른 길을 걷는 중이다.

―명문대 의대에 갔는데 의사가 아니라 학자의 삶을 택했습니다.

"특정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의대 공부가 저에게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의대는 그야말로 6년간 지식을 때려 넣는 곳입니다. 학생 입장에선 그걸 소화하는 순발력이 중요한데 제가 그 능력은 좀 모자란 거 같았어요. 전 좀 더 진득하게 공부하는 스타일입니다. 진로를 고민하다 본과 4학년 때 우연히 미국 보스턴에 있는 노동자건강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부끄러운 얘긴데 그때까지 하버드대가 보스턴에 있는 줄도 몰랐어요. 아는 교수님이 하버드대에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놔주셨고 그러면서 사회역학을 만났죠."

―왜 하필 노동자건강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했나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산업 재해를 입은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했어요. 서울 구로공단 뒤쪽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공단에서 일하는 분들의 풍경이 아주 익숙했어요. 대학에 와서 봉사활동을 가려고 신촌에서 버스를 탔는데 우리 집 쪽으로 가는 거예요.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사무실이 제가 살던 곳 근처에 있더라고요. '우리 동네가 이런 세계였구나' 했지요."

―한국인이 가장 동경하는 하버드대는 국내 대학교와 뭐가 다르던가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일단 자원이 많아요. 연구 데이터를 예로 들면 쉽게 접근 가능하면서도 질이 좋은 데이터가 풍부합니다. 연구자에겐 아주 유리하죠. 둘째로, 하버드는 냉정한 곳이란 생각을 많이 했어요. 좌파 학자도 있고 우파 학자도 있습니다. 뛰어나면 이념을 가리지 않고 데려옵니다. 그들이 뛰어놀도록 내버려 두죠. 튀려는 교수를 막지 않아요. 그런데 그 학자가 가라앉을 때도 내버려 둡니다. 나중에 워싱턴DC의 조지워싱턴대에서 강의를 했는데 거긴 훨씬 따뜻한 곳이더군요(웃음)."

인연이 닿는 연구를 한다

전공은 사회역학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나 성소수자처럼 특정한 사회 집단의 건강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는 소방관이나 쌍용차 정리 해고 노동자들이 심각한 건강 문제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기여했다.

―주로 사회의 소수자에게 관심이 많은가요.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인데 '인연이 닿는 연구를 했을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트랜스젠더 건강을 연구할 때도 그랬어요. 어떤 트랜스젠더 분이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 저에게 소견서를 써 달라고 요청했는데 찾아보니 관련 연구가 한 건도 없는 거예요. '내가 이걸 해야겠다' 싶어서 시작한 거죠."

―책에 쓴 것처럼 쌍용차 해고자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는 비중(약 50%)이 참전 용사들(약 20~30%)보다 많다는 건 선뜻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몇 번이고 결과를 검토했죠. 50%라는 수치가 완전한 진실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진실의 일면을 담고 있습니다. 제 가설은 이래요. 참전 용사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온 이들입니다. 전쟁은 가혹했겠지만 안식처가 있었죠. 쌍용차 노동자들은 그렇지 못했어요. 투쟁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그분들은 있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어요. 몇년 간 계속 욕만 먹었죠."

―사회역학이라는 게 어찌 보면 하나마나 한 얘기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가난하거나 차별받는 이가 더 아픈 건 당연하지 않냐는 것이죠.

"타당한 지적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타당한 얘기를 데이터로 증명하는 겁니다. 최근에 백화점 화장품 매장 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분들은 백화점 화장실을 쓸 수도 없고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니 하지정맥류나 방광염을 많이 앓고 있을 거란 추측은 누구나 했죠. 학자는 가설을 데이터로 증명하는 일을 합니다. 추측만으론 제도가 변하지 않거든요. 변화의 근거를 제공하는 게 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남 좌파? 정규직 교수이니 기득권 맞는다

―연구 주제 때문인지 '강남 좌파'란 비판도 더러 받더군요.

"강남서 태어난 적도 자라지도 않았고, 지금도 파주에 살고 있으니 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죠. 아버지가 은행원이셨는데 IMF 때 실직하셨어요. 학창 시절엔 과외해서 돈 벌고, 유학도 장학금 받아서 겨우 갔어요. 물론 기득권인 건 맞습니다. 정규직 교수에 이성애자 남성이니까요. 그걸 부인할 순 없죠."

―한국 사회에서 교수가 가진 기득권이 많죠. 교수의 갑질 문제가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요. 교수님도 그런 문제에 민감하실 것 같습니다.

"교수가 대학원생에게 위력을 행사하는 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건비. 다른 하나는 논문 쓸 때 주저자와 공저자를 정하는 문제죠. 저는 둘 다 미리 정합니다. 연구에 착수하기 전에 인건비를 미리 정해 알려주고 동의하면 사정이 아무리 달라져도 반드시 약속한 인건비를 줍니다. 논문도 쓰기 전에 미리 주저자와 공저자를 정해 맡은 만큼의 부담을 지도록 합니다."

―(웃으며) 화제를 바꾸죠. 정말 궁금한데요. 연고전이라고 하시나요, 고연전이라고 하시나요.

"수업 때 실수로 연고전이라고 한 적 있는데 순간 강의실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전에 그렇게 따르던 학생들의 표정이 굳어지더군요. 그 후로는 언제나 조심하고 있습니다.(웃음)."

―아닌 게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 교수더군요. 강의 평가 최상위 교수에게만 주는 석탑강의상도 여러 번 받으셨고. 학생들이 조언도 많이 구할 것 같은데 그럴 땐 주로 어떤 얘길 해주시나요.

"단언컨대 저는 누군가의 멘토가 될 생각이 없어요. 이렇게 얘기해보죠. 심리학 등 많은 기존 연구 결과를 보면 어떤 사람이 창조적 결과물을 내놓는 건 그이의 삶이 가장 안정적일 때입니다. 기업가든 학자든 예술가든 예외가 거의 없어요. 칸트가 철학사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건 정규직 교수 자리를 딴 이후죠. 우리 사회는 젊은 친구들에게 도전해서 창조적 결과물을 내놓길 요구하지만, 그 바탕이 되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요. 실제로는 안정적인 환경이 도전과 창조를 낳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전 학생들에게 무작정 도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성세대로서, 학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덜 불안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About 김승섭
2005년
연세대 의예과 졸업
2007년
서울대 보건대학원 석사
2010년
미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박사
2011년
미 조지워싱턴대 강사
2013년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
2017년
'아픔이 길이 되려면' 출간
2017년
한국출판문화상 등 14개 상 수상
2018년
고려대 최우수 연구인 '석탑연구상' 수상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14/20181214015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