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 후 선생이 교육에 정신(대종교)과 힘(무장투쟁)을 융합시킨 사실이 그 증거이다. 선생은 서른 한 살 때인 1911년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의 어려움과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통분해하며 당시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동만주 왕청현으로 떠났다. 만주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 10년의 시작이었다.
명동학교에서 독립정신 가르치는 교사생활, 대일항전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 조직
그는 한승점(韓承点)이 설립한 대종교(大倧敎) 계통의 명동(明東)학교에서, 왕청현 덕원리로 물밀 듯 이주해오는 한인자녀들을 가르치며 조국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 붙여 주었다. (이 명동학교를 서일 선생이 설립했다는 설도 있지만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듬해 10월 선생은 대종교에 귀의한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 된다. 선생이 단순한 무장 독립운동가가 아닌 교육자․종교인․언론인으로도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만강을 넘어 망명해오는 열혈청년들이 줄을 이을 때 서일 선생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을 규합,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다. 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 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대종교의 이념계승에도 몰두했다.
그는 대종교 입교 후 포교에도 나서 3년 동안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여 만명의 교우(敎友)를 얻어 도력(道力)이 큰 도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서일 선생은 교우들 중 젊은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일반 교우들에게는 군량조달 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독립군에 편성된 청년들의 강고한 정신무장을 위해 그는 한배검에 귀의하게 했다. 한배검은 대종교에서 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
대종교 입교 후 교도들을 독립군으로 육성, 무장독립 주장하는 ≪일민보(一民報)≫ 등 신문 발간
선생은 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는데 신도 1만5천명을 모아놓고 “독립군 양성기금으로 1인 1원씩 거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이러는 한편 선생은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 <신화강의(神話講義)> <진리도설(眞理圖說)> <삼문일답(三問一答)> <회삼경(會三經)> 등 경전도 저술했다. 당시 선생은 중광단(重光團) 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 문제 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투쟁은 전개하지 못했다. 이에 선생은 수많은 독립군 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1918년 김좌진(金佐鎭), 김동삼(金東三), 신팔균(申八均), 손일민(孫一民), 신채호(申采浩) 등 39인 연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와 함께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민보(一民報)≫ ≪신국보(新國報)≫ 등 신문을 발간, “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논조를 내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