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신 맞이하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세우다
이와 같은 운동의 연계선상에서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그 고문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국민계몽 및 정치․사회운동 단체로서 우리 나라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우선 독립협회는 자주 독립의 국민적 상징물로서 독립문 건립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897년 11월 국민성금을 모아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리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수하여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케 하고, 그 일대를 독립공원으로 꾸몄다. 이러한 일련의 행사는 1897년 10월에 있었던 ‘대한제국 선포 및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어우러져 우리 나라의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한편 민족 자존의 기개를 한껏 분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우리 나라는 열강들의 각종 이권 침탈에 의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형상이었다. 특히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친러․친미 연립정권이 들어서자 우리 나라의 각종 이권은 열강에게 무더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함경북도 경원(慶源)․종성(鍾城) 일대의 광산채굴권, 두만강․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동해의 포경권(捕鯨權) 등을 빼앗아 갔다. 미국은 경인철도 부설권, 평안북도 운산(雲山) 금광 채굴권 등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1895년 3국 간섭 당시 러시아와 보조를 같이했던 프랑스는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그밖에 일본․독일․영국 등도 우리의 각종 이권을 침탈하고 있었다.
조선 이권 노리는 열강들의 강압적인 요구, 서울 종로 메운 만민공동회로 꺾어
특히 러시아는 1897년 9월부터 석탄기지로 사용하겠다고 부산의 절영도(絶影島) 조차를 요구하고, 이의 관철을 위해 1898년 1월 군함을 부산에 파견하고 군대를 상륙시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 같은 압력에 굴복하여 정부가 이를 승인하려고 하자 선생은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대중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도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주권수호 및 이권침탈 반대 민중대회로서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에 모인 8,000여 명의 군중들은 열강의 한국 침략정책을 규탄하면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결사 반대하고, 나아가 러시아인 재정고문과 군사교관, 그리고 한러은행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와 같은 선생의 활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으나 수구파 대신들과 한국에서의 이권획득에 혈안이 된 열강의 미움을 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따라서 일본과 러시아 공사의 술책과 위협으로 정부는 선생을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함과 동시에 미국 공사에게 선생의 추방을 교섭하였다. 미국 공사 또한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출국을 종용함에 따라 선생은 당초 의도했던 국민계몽을 통한 조국의 근대화와 자주 독립 기틀 마련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1898년 5월 14일 독립협회 회원들과 작별하고 미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