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깨달아 얻는 학문적 독립성으로 일관한 삶
집이 가난하여 매일 들에 나가 나물을 뜯어와야 하는 소년이 있었다. 매일 늦게 돌아오면서도 소년의 바구니에는 나물이 별로 없었다. 부모가 소년에게 까닭을 물었다. “나물을 뜯다가 새끼 새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날은 땅에서 한 치 정도밖에 날지 못하다가 다음 날은 두 치, 그 다음 날은 세 치를 날다가 점차 하늘을 날아다니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얼마나 신기한 일이던지요. 날마다 새끼 새가 조금씩 더 날게 되는 것을 지켜보며 그 이치를 깊이 생각해보았지만 터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박세채(1631∼1695)의 [남계집]에 나오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일화로, 그가 어릴 때부터 생명 현상의 이치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남달랐다는 것을 짐작케 해주는 일화다. 서경덕이 12살 때(1501) 서당에서 [서경]의 ‘요전’에 나오는 ‘366일을 1년으로 삼고 윤달로 사시(四時)를 정하고 해를 이루게 했다’(三百有六旬有六日, 以閏月定四時成歲)라는 대목을 읽는데, 훈장님이 이를 정확히 설명해주지 못했다. 서경덕은 보름 동안 그 이치를 궁리한 끝에 스스로 깨달았다. 이는 우주의 이치에 관한 호기심과 탐구욕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17살 때에는(1506)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대목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배우는 데에 먼저 물(物)의 이치를 탐구하지 아니하면 책만 읽어서 무슨 소용인가’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사물의 이름을 써서 벽에 붙여놓고 그 이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20살 때에는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자주 잊은 채 사색에만 잠기는 습관이 생겨 3년을 그렇게 지냈다. 이러한 여러 일화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서경덕은 자기 자신의 사색과 궁리의 힘으로 스스로 깨닫는 데에 힘을 쏟았다는 뜻이다.
퇴계 이황은 그런 서경덕을 가리켜 ‘성현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비판하면서 서경덕의 학설에는 ‘병통(病痛)이 없는 부분이 없다’고까지 지적했다. 이황이 말한 성현은 정확하게는 주자(朱子)를 뜻한다. 주자보다 더 주자답기를 바랐던 이황이 보기에는, 자득(自得)의 학문을 추구했던 서경덕이 주자의 길에서 벗어났던 것. 서경덕에게 중요한 것은 학문적 정통성이나 전통적인 권위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얻은 이치였고, 유교 경서에 주석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학문적 독립성과 자율성, 그리고 주체성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에 나가지 않고 처사(處士)의 길을 걷다
그런 그가 별다른 스승 없이 사실상 독학으로 일관한 것이나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의 주도로 시행하게 된 현량과에 천거되었지만 사양한 것, 1531년(중종 26년)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생원과에 합격했지만 대과(大科)에는 끝내 응시하지 않은 것, 그리고 1544년 말년에 후릉참봉(厚陵參奉. 후릉은 개성에 있는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 벼슬을 받았지만 곧 사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른바 처사(處士)의 길,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서 은둔하는 선비의 길로 일관했다. 내성외왕(內聖外王- 안으로는 성인이며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갖춘 사람)의 길 중에서 내성의 길에만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서경덕이 벼슬길에 나아가 역사와 현실에 참여하는 출(出)의 길이 아니라 뜻과 마음을 온전히 지키면서 은일(隱逸)에 머무는 처(處)의 길을 걸었던 것에는, 그가 살던 시대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서경덕이 9살 때인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시작으로 선비들의 대수난이 시작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잠시 조광조와 사림이 득세하기도 했지만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다시 피바람이 부는 등, 문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소용돌이가 그칠 줄 몰랐다. 안 그래도 처사형 기질이 짙다고 할 수 있는 서경덕에게 그러한 현실은 더욱더 처사로서의 소신과 삶의 자세를 굳히게 만들었을 것이다.
‘신은 본래 사리에 어두운데다가 산과 들에서 자라나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거기에 가난이 겹쳐 거친 음식이나 나물국까지도 끼니에 대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몸이 쇠약해지고 병까지 걸렸으니, 신의 나이 쉰여섯이나 칠십 노인과 다름없습니다. 스스로 쓰임에 적합하지 못함을 알고 있으니, 타고난 대로 숲과 샘물 사이에서 정양(靜養- 몸과 마음을 휴앙함)하며 여생을 보전함이 좋을 것이며, 그것이 분수에 맞는 길일 것입니다.’ - 중종에게 올린 사직을 바라는 글 중에서
1544년 병이 들어 거동하기 불편하게 되었을 때 서경덕은 이렇게 말했다. ‘성현들의 말씀에 대해 이미 선배 유학자들이 주석을 더하였으니 내가 거듭 말할 필요는 없고, 다만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기록하여 전해야 하겠다.’ 시를 짓는 것 외에 학문적 저술 작업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서경덕은 이렇게 삶의 마지막에 가까워진 다음에야 ‘원리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복기견천지지심설’(復其見天地之心說) 등의 길지 않은 학문적 논설을 작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