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천서씨(절효공파)

고려 무신정권 계보

후암동남산 2012. 6. 9. 22:31

 

고려 무신정권 계보(1): 1170~1270, 정경이 충우항의 김임연유, 중도교정

 

한국 / 세계사-상식 족보    
2012/05/02 18:45

 

 

 

 

 

* 외통수: 무신정권의 시기는 1170~1270이라 외우기 쉽다. 그리고 그 시기 최고의 실권자였던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의 머리글자를 따 '정경이'로, 그 뒤를 이은 최충헌-최우-최항-최의의 최씨 정권은 이름을 따 '충우항의'로, 그 뒤를 이은 김준, 임연-임유무는 머리글자와 이름을 따 '김임연유'로 하여 ‘정경이 충우항의 김임연유’로 만들어 외운다. 그리고 당시 무인들이 정사를 펼치던 중심기구인 중방, 도방, 교정도감, 정방 순서를 ‘중도교정’으로 하여 외운다.

 

 

0 무신정권(武臣政權, 1170~1270)은 100년 동안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로, 정중부(1106~1179), 경대승(1154~1183), 이의민(?~1196), 최충헌(1149~1219)-최우(?~1249)-최항(?~1257)-최의(?~1258), 김준(김인준. 1258~1268), 임연(?~1270)-임유무(?~1270)로 이어졌다.

 

 

0 고려 귀족문화의 번영기를 지나면서 임금과 문신들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는 가운데 무신에 대한 무시와 핍박이 극심해져갔다. 급기야 1170년 의종 24년 무신에 대한 천대를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진 정중부 이의방 이고가 중심이 되어 보현원에서 오병수박희를 열어 무신의 노고를 위로하려 만든 자리에서 대장군 이소응이 문신 한뢰에게 구타당하자 격분하여 난을 일으켜 임금과 태자를 축출하고 문신들을 대거 죽이거나 쫓아냈다. 곧이어 인종의 셋째아들이자 의종의 동생인 명종(1170∼1197)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 고려는 고구려에 이어 수박(태견, 태권도의 전신)으로 무예를 단련하였는데, 그 날도 무신들끼리 1대1 대결을 펼쳤는데 이소응이 젊은 상대에게 패하자 한뢰가 그를 조롱하며 때린 것이 무신난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이다.

 

 

- 문신 김돈중은 김부식의 아들로 촛불로 나이든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으며, 당시 그 아비인 김부식이 도리어 정중부를 나무라 정중부는 두 부자에게 깊은 원한을 새겨 두게 되었다. 1167년 의종 21년 때 ‘화살 사건’이 일어나 또다시 김돈중은 무신 쿠데타의 결정적인 원인제공자가 되기도 했다. 당시 나들이를 즐기던 의종이 행차하는 도중 좌승선 김돈중의 말이 잘못하여 어느 무사의 말과 충돌하여 그로 인해 화살통에서 화살 한 대가 왕의 가마 옆에 떨어졌다. 의종은 이를 암살 미수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김돈중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후 화살의 주인을 찾으려 소동을 벌였지만 별다른 상황이 없자 당시 호위를 맡았던 무인들인 견룡∙순검∙지유 가운데 14명이 희생양 비슷하게 귀양을 가게 되어 무신들이 분노가 끓어 올랐다. 또한 보현원에서 무신난이 일어나자 김돈중은 재빨리 도망쳤는데, 의당 개경으로 돌아가 사태를 진압했어야 했지만 감악산으로 도망가 숨었다가 자기 종자의 신고로 잡혀 죽는다.

 

 

- 무인들은 정변 이후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정사를 펼쳤다. 그러나 무신세력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나 1171년 이의방이 함부로 발호하던 이고를 제거했다. 이 와중에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와 무신 집권 타도를 위해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의종을 죽였다. 이듬해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또다시 난을 일어났다. 그러자 당시 일인자로 행세하던 이의방에 대한 불신이 커졌고, 이의방 또한 정치에 서투른데다 하급 무사에 대한 처우개선을 하지 않는가 하면 불교계를 탄압하며 민심을 잃어 갔다. 이 때를 틈타 정중부는 1174년 이의방을 제거하면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 정중부(1106~1179)가 실권을 잡았지만 조정은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조위총의 난도 2년이 더 지나 평정되는가 하면 공주에서 망이∙망소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필두로 전국에서 끊임없는 변란이 이어졌다. 이에 정중부는 중앙의 안정을 위해 문신을 우대하고 지방행정 개혁을 추진했지만, 실제로는 막후정치를 주도하면서 국정을 전횡하다 결국에는 1179년 경대승이 정중부∙정균(정중부의 아들)∙송유인(정중부의 사위)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 경대승(1154~1183)은 젊고 청렴하며 원칙이 분명한 무인이었는데, 무신들의 횡포와 부패에 분노하여 정중부와 그 일당들을 타도하며 집권했다. 이후 그는 정중부 지지 세력이 잔존하던 중방을 무력화하고 특수 무사집단인 도방(都房)을 만들어 무력을 장악하는 한편 왕권 강화 정책을 중시했다. 또한 함께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허승과 김광립이 발호하자 1180년 제거했고, 문관과 무관을 고루 등용하는 한편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에는 예외없이 처벌하여 국가질서를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1183년 경대승이 30살의 나이로 갑자기 병사하자 그의 정권도 무너지고 도방도 해체되었다. 그 이후 경주에 가 있던 이의민이 개경으로 올라와 정권을 잡는다.

 

 

- 이의민(?~1196)은 천민 출신으로 경군(京軍)에 있다 수박을 잘 해 의종의 총애를 받으며 별장이 되면서 급성장하였으나, 경대승이 집권하자 잠시 경주로 피신 겸 낙향해 있다가 그가 죽자 명종의 부름을 받고 올라와 집권한 것이다. 그러나 이의민은 원래부터 인품이 좋지 못해 횡포와 착취를 일삼았다. 그러다가 그의 아들 이지영이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아 가자 그의 형인 최충헌이 분노하여 기회를 노리다가 이의민이 미타산 별장에 있는 것을 알고 쫓아가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