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천서씨(절효공파)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김준

후암동남산 2012. 6. 9. 22:02

무신정권 김준

 

1) 김준 정권

(1) 김준의 출세

金俊의 집권은 곧 4대 60여 년에 걸친 崔氏武臣政權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최씨가의 마지막 집권자인 崔竩가 고종 45년(1258)에 김준과 그 일파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로써 최씨 정권은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최씨정권이 붕괴되었다 하여 곧 무신정치가 끝났다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金俊․林衍 등의 무신이 새로운 집권자로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해 나갔다.

《高麗史》 金俊傳은 그의 아버지인 金允成이 미천한 노비의 신분으로 주인을 배반하고 崔忠獻에 투탁하여 노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高麗史》의 다른 기록들은 고종 45년 3월에 柳璥과 함께 김준 등이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국왕에게 돌렸음을 언급하고 있다. 간략하기는 하지만 두 기사는 김준의 정치적 출세와 성장이 최씨무신정권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김준은 崔怡 집권기에 출세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가 최이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朴松庇․宋吉儒 등의 추천에 힘입어서였다. 이로부터 그는 최이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그리하여 최이가 출입할 때는 반드시 김준의 부축을 받게 되기에 이르렀다.

김준과 최씨 가와의 관계는 그가 최이의 신분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게 되면서부터 각별해지기 시작하였으나, 그가 정계의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 것은 崔沆의 집권과 관련이 있다. 최항은 최이의 서자로, 그 어머니가 천했기 때문에 권력 이양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또한 상장군 周肅과 더불어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관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최항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항은 자신의 집권에 큰 역할을 한 家兵세력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김준은 최항의 권력승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심복으로서, 그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막강한 실력자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만큼 김준에 대하여 일종의 심복 관계를 유지하는 일단의 정치인들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인물로는 林衍․朴琪․宋吉儒 등이 있다. 임연은 김준의 도움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 장군으로까지 진급한 인물로 김준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따랐던 인물이다. 박기 역시도 김준을 도운 인연으로 양자가 된 김준의 심복이고, 송길유는 김준을 최이에게 칭찬해 줌으로써 김준이 입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인물이다. 김준은 이들을 비롯하여 최씨가의 다른 가신들과도 사적인 유대를 통하여 정치적인 역량을 증대해 갔다.

(2) 김준의 집권

최항의 신임과 지지를 받으며 그에게 충성을 아끼지 않았던 김준 등이 최항이 죽은 뒤 불과 1년도 못되어 최씨 가를 등진 이유는 최의의 집권과 함께 변화된 김준의 정치적 위치를 통해 설명될 수 있겠다.

최의는 고종 44년(1257) 崔良伯과 柳能 그리고 宣仁烈이 중심이 된 일군의 정치세력의 도움으로 최씨정권 집권자의 자리에 올랐다. 최의는 자신의 권력계승에 주도적 역할을 한 자들에게 보다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김준을 위시한 나머지 최씨가의 가신들은 최의의 권력승계를 계기로 집권자로부터 소외되었다. 따라서 최씨 가의 심복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이로부터 최씨권력기구 안에 가장 강력한 적대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준 일파에게 정변의 불씨를 던진 것은 대장군 송길유의 유배사건이었다. 김준의 은인과도 다름없던 송길유는 최항의 대표적인 심복이었다. 최의가 집권한 후 송길유는 안찰사 宋彦庠의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그를 구하려는 김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송길유는 최의에 의해 유배보내졌고, 이 일이 있은 직후부터 최의는 김준 등을 접견조차도 하지 않았다.

최씨 가의 가노였던 김준이 집권자인 최의에게서 소외된 사실은 그로 하여금 정치적 위기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집권자로부터 소외된 김준은 더 한층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이를 타결하기 위해 집권자를 제거하는 수단까지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 45년(1258) 3월, 江都에서 김준을 위시한 일군의 정치세력이 최의를 주살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변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김준의 친동생인 金承俊, 최씨 가 가노들의 대부격이었던 李公柱, 김준의 세 아들인 金大材․金用材․金式材 등 최씨가의 가노세력이었다. 정변의 주동자들 가운데는 최항의 심복들 중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대사성 유경이 있다. 그는 무신정권 이후 재상가로 발돋움한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그 자신이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최항의 집권기부터였다. 정변의 또다른 주모자로는 神義軍의 단위부대를 지휘하던 장교인 都領郞將 朴希實과 指諭郞將 李延紹가 있다. 최의를 제거하자는 논의가 제일 먼저 이들로부터 나왔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최의를 없애지 않으면 그들 자신이 먼저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던 처지에 있었던 것 같다. 정변의 주체세력 중에는 삼별초 혹은 도방에 속한 박송비와 임연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박송비는 원래 향리 출신으로 송길유와 함께 김준을 최이에게 천거하였던 인물이다.

이를 통해 최의를 주살한 장본인은 공교롭게도 최씨무신정권을 떠받치던 핵심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최항의 신임 하에 급작스럽게 출세를 한 심복들로서, 그의 정권유지에 앞장섰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최항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던 송길유가 최의에 의해 유배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들이 심각한 위기감을 갖게 되었던 점을 주목하면, 김준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군의 정치세력이 정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최의와 그의 측근들을 없애는 것만이 정변의 목적은 아니었다. 정변의 주체자들 가운데 유경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무인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신분이 낮은 하급 무관들이었다는 점에서 정면의 성공을 위해 적지 않은 어려움이 뒤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정권이 서서히 정변의 주역들에 의해 장악되어가고 있었다. 또한 그와 동시에 그들 내부의 결집력은 급속도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최의의 제거라는 공통의 과제가 실현된 다음에는 누가 정권을 장악하는가라는 궁극적인 문제를 두고, 각자가 이해를 달리하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戊午政變」이라 불리우는 이 거사가 성공한 다음 달인 고종 45년 4월에서부터 원종 원년(1260) 동안 공신으로 추가되는 인물들 및 원종 3년까지의 서열 순위의 변화는 김준의 측근 세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반면 나머지 공신들은 소외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실제로 노비의 신분에다 보잘것없는 직위에 있던 김준으로서는 과거 최씨 집권자가 행사하던 막강한 권력을 다시 장악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존조차도 보장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거기다 정변의 일등공신인 유경이 신속하게 정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최씨가가 붕괴되자마자 정방을 편전 옆에 두고, 한편으로 자기 휘하에 사적인 군사력도 결집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유경의 행동은 김준을 비롯한 나머지 공신들의 반발을 야기시켰다. 김준은 공신들과 다시 결합하여 고종 45년 11월에 유경을 承宣에서 簽書樞密院使로 좌천시키고, 그의 심복들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유경이 실각한 뒤에는 김준이 공신들의 대표자가 되어 무신정치를 행하였으나 아직 확고한 권력기반을 구축하지 못한 김준으로서는 공심들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각별한 예우를 염두에 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세력이 자신을 위협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 대상으로 제일 먼저 지목된 자는 공신세력 안에서 김준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인 신의군 장교인 박희실과 이연소와 같은 인물들이었다.

정변 이후 박희실의 활동은 주로 몽고와의 외교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당시 대몽정책이 새로운 정권의 안정과 관련하여 더 말할 나위없는 중요한 사안이었던 만큼 사신으로 활동한 박희실의 역할도 큰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원종 원년부터 갑자기 박희실의 정치적 활동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김준의 집권강화 과정에서 박희실 등이 소외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박희실이 몽고에 파견된 시기는 고종 말년과 국왕의 자리가 비어있던 원종 즉위년이었다. 바야흐로 이때는 박희실과 같은 견제 세력이 없는데다 왕권마저 행사되기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집권 강화를 모색하던 김준에게 절호의 기회가 제공된 셈이다. 김준은 이 기간에 자신을 중심으로 한 무신집권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원종 원년(1260)에 이르러 김준은 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유경․박희실 등의 공신세력을 제압하고, 실권자의 자리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김준의 권력 장악이 확실시된 원종 3년의 사건들 중 주목되는 것은 최이가 다시 천도공신으로 숭산되어 도형이 마련된 사실이다. 대몽항쟁을 주도한 최이가 천도의 공으로 추념받아 공신이 된 것은 최이의 천도와 항몽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강력하게 집권하겠다는 김준의 의지가 뚜렷해지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바이다.

그로부터 2년 후(1264) 원종은 몽고의 요구에 따라 원행하기에 앞서 김준을 국가의 비위를 규찰하는 교정별감으로 삼은 한편, 감권의 대권을 맡겨 국내에서 국왕과 같은 권력을 부여해주었다. 그해 12월에 귀국한 원종은 김준을 海陽侯로 봉하고 晉 陽公의 고사에 따라 예우하도록 함으로써 다시 최씨무신집권기의 체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2) 임연․임유무 정권

(1) 임연의 출세

林衍은 鎭州를 관향으로 하는 향리 출신의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몽고군사를 물리친 전공으로 選軍되어, 경군의 장교인 대정에 임명되었다. 그가 중앙에 진출한 후에, 김준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김준의 도움으로 힘써 남의 부인을 간통한 죄를 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천거로 낭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林衍은 최씨정권 말기에 지지세력을 강화해 나가던 김준에게 무사적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되고 출세하게 된 김준의 심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임연이 최씨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할지라도, 김준에 대한 봉사와 충성이 더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

임연이 김준의 측근 정치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최의를 주살한 「戊午政變」에서 핵심적인 주모자로 활약한 데에서 찾아진다. 그는 정변에 성공한 직후 8인의 위사공신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정치적 지위도 갑자기 상승하였다. 이는 그가 김준의 측근 심복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金俊政權을 유지하기 위한 임연의 역량은 야별초를 이용한 군사적인 활동에서 제일 먼저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임연은 야별초의 낭장으로 진출하여 상장군으로 진급하였기 때문에, 그는 야별초를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군사적 실력자로서 김준정권에 참여하였다고 보여진다.

임연은 군사적인 역량을 배경으로 당대 명문들과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정치․사회적 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는 아들인 林惟茂를 최항정권의 핵심세력이었던 李應烈의 딸과 혼인시켰고, 3남인 林愉梱은 무신정권기의 유력한 가문인 蔡仁揆의 사위가 되었으며, 임연의 사위인 崔綜紹는 世家 자제로서 임연정권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하였다. 임연의 또 다른 사위인 洪奎는 동지추밀원사를 지내는 등 당시의 정치적 실력자였다. 즉, 임연은 무신집권기부터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한 집안들과 사돈관계를 맺었음을 알겠다. 이들 가문들은 임연과의 혼인을 통해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김준정권 말기에 이르면 임연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구축되기에 이른다.

(2) 임연․임유무의 집권

金俊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던 임연은 김준이 집권한 후 10년째가 되던 원종 9년(1268) 그를 제거하고 새로운 무신정권을 탄생시켰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김준과 임연 사이의 관계 악화에 있었다. 김준의 집권이 임연의 정치적 지위를 상승시킨 계기였지만, 김준의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임연은 점차 그로부터 소외되었던 것 같다. 즉, 김준의 독단적인 지배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동시에 임연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형성되면서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원종 9년 12월에 임연이 김준을 살해한 「戊辰政變」이 일어났다. 임연과 그의 아들 임유무는 정변을 계획하고 야별초를 동원하여 김준일당을 제거하는 등 정변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임연이 김준 일파를 제거하는 데에는 궁궐 안에 있는 환자와 결탁하는 일이 중요하였는데, 궁궐 안에서 사명에 대비하는 관노였던 抄와 국왕의 측근인 宦者들이 직접 김준 형제를 살해하였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원종이 정변의 주체자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원종과 그의 측근세력은 거사에 참여하는 것을 두고 여러 차례 망설였던 만큼 김준 세력을 두려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종이 김준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은 원종 역시도 임연 만큼이나 절박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김준은 독재체제가 굳어져 가면서 최씨집권자와 다름없이 왕권까지도 억압하는 초월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러 원종 9년 3월에는 자신의 항몽책에 반대한 원종을 폐위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원종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그와 대적할 만한 역량을 갖춘 임연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김준정권을 붕괴시킨 주모자는 임연과 국왕이었겠지만, 이들의 거사는 당시 김준정권을 떠받들어 온 무신 중심의 정계에서 지지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요컨대 임연과는 정치적 성격을 달리하는 무신들이 무진정변의 공신이 되었는데, 이들이 정변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이들은 임연보다는 국왕인 원종을 보위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정변의 성공으로 국왕과 임연으로 대표되는 두 정치세력간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임연과 원종의 측근세력들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당시 정국의 판도가 원종 쪽으로 기울게 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임연이 먼저 원종의 측근들을 제거한 것이다. 원종의 측근을 제거한 임연은 곧 이어 원종이 아들과 공모하여 자기를 살해하려 했다는 이유로 재추에게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원종의 폐위는 국내외의 반발을 받게 되었다. 마침 몽고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소식을 들은 태자가 다시 몽고로 돌아가 특별한 조치를 호소하였고, 임연은 의외로 강경한 몽고의 압력에 굴복하여 폐위 5개월 만에 원종을 복귀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임연에 의한 국왕 폐위는 대다수 조정 관료들이 임연정권에 등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기가 되었다고 본다.

원종 10년 12월 친위적 성격이 실패한 후 원종은 몽고의 군사를 빌어 임연을 제거하고 왕정을 복고하고자 하였다. 그동안 불안감 속에 사로잡혀 몽고와 항전할 준비를 하던 임연은 등창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임유무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다.

3) 붕괴기 무신정권의 성격

최씨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金俊과 林衍 부자는 각기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치를 계속하였다. 이들도 역시 최씨집권자와 다름없이 왕권까지도 침해하는 초월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이런 점은 문무 원로 중심의 공식적인 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 정권은 崔氏政權에 비하여 분명히 약체화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형적인 무신정권이라 할 수 있는 최씨정권이 집권자의 확고한 지위와 독자적인 기구의 수립․막대한 사병집단의 형성 그리고 강대한 경제력의 축적을 특징으로 하였는데 비하여, 김준․임연은 그 모든 것이 이보다 약화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김준에서 임연으로 이어짐에 따라 더하여 갔던 것이다.

정계의 지지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김준은 각별히 군사력에 의존해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무력장치로서의 사병은 최씨가의 그것에 비해서 훨씬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즉, 김준 정권의 군사적 기반 가운데 상당 부분은 다수의 무인 공신들에 의해 점유되었고, 이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또한 명문과의 혼인으로 얻은 정치적 기반과 삼별초의 군사력 위에 성립한 임연 정권 역시도 자체적인 기반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무신정권을 유지한 군사적․정치적 기반이 미약해짐에 따라 무신집권자로서의 김준과 임연의 지위도 확고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김준이나 임연의 항몽책을 원종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이들과 국왕과의 관계가 최씨가의 정책을 무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던 이전의 왕권과는 사뭇 다르다 하겠다.

이 시기 왕권의 신장에 따른 또 하나의 변화는 무신정권을 몰락시킨 주체가 바로 국왕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임연과의 연합이 있기는 하였으나, 김준의 주륙을 원종과 그의 측근이 직접 모의하고 실행하였다. 무신정권의 종식을 의미하는 임유무의 제거도 원종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무신정권의 붕괴와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이었다. 항몽정책의 주동자는 무신정권이었으므로 몽고는 무신집권자에 대하여 압력을 가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무신정치로 무력화된 왕권은 대외적으로 몽고세력과 결합함으로써 강화되었고 대내적으로는 독자적인 무신정권의 지속을 방해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최씨정권의 몰락 자체도 장기간에 걸친 몽고와의 항쟁에 의한 내부적 분열이라 할 수 있고, 김준의 주륙도 결국은 그의 심한 독재와 항몽태도로 원종과의 사이가 나빠진 데 원인이 있었다. 더 나아가 임연정권은 그 스스로가 폐위한 원종을 몽고의 압력으로 복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정치적 현실에 직면하면서, 그 몰락이 예고되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신 드라마 1회

 

배경-단기 3550, 서기로는 1217년인 고종4그해 겨울 승군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두 해 전부터 몽고에 쫓겨 고려 영토로 도망 쳐 들어온 거란의 유족들과 고려가 전투를 한참 거듭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이때 황제를 대신하여 고려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막부의 주인은 최충헌 일가였다. 최충헌은 나름대로 의욕과 포부를 가지고 혁명을 일으켜 어지럽던 나라를 안정시키기는 했으나, 100여 년 동안이나 황폐하고 방치되었던 나라살림을 단번에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의 개혁은 지나친 강압정치와 더불어 기존 세력들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왔는데,승려들 또한 그 불만 세력권의 하나였다.

2회 -이 무렵에 최우. 그는 최충헌의 장남으로서 당시 벼슬이 정3품 추밀원 부사였다.
그리고 그의 아우 향은 형보다 서열이 한 단계 높은 종2품 참지정사
, 게다가 황족과 결혼하여 보성백이라는 작위까지 받고 있었다. 최우는 본래 무인이면서도 글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공사에 매우 밝았으므로 최충헌의 가신들은 그런 최우가 막부의 정권을 이어받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들의 장래를 보장받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택했던 최우의 아우, 최향.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최충헌마저도 장남인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실로 최우로서는 피가 마르는 긴장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3회 -격구....

 

장시라는 채를 이용하여 나무공을 쳐서 상대편의 구문에 넣는 놀이이다.
원래는 페르시아지방에서 형성되어 인도, 중국 등을 거쳐 전파되어 온 것인데

크게는 말을 타고 하는 마상격구와 걸으면서 하는 보도격구로 나누어진다.

그 중 고려에서는, 그리고 특히 최씨막부의 무인정권에서는 주로 마상격구를 즐겨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경기를 통하여 군사들을 선발하거나 그 결과에 따라 벼슬까지 내렸던 것으로 기록에 보이기 때문이다.경기가 얼마나 위험하고 극렬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4회 -영존(令尊).

그리고 최우의 두 서자인 만종과 만전. 그들은 아비 최우를 제대로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그들의 출생이 워낙 비천했기 때문이다.영존이란 남의 아버지를 높여 이를 때 쓰는 말이다.
그만큼 최우도 그들을 아들로 대견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 또한 아비인 최우를 실망시키며 그 행동거지가 방약무인했다 만종 형제의 어미는 창기 출신의 여인인 서련방이라고 전해지는데
최우는 불행하게도 이들 형제 외에는 달리 아들이 없었다.

5회 -드디어... 그 유명한 몽고의 태조, 칭기즈 칸의 군대가 고려땅으로 들어섰다.

때는 고종 5년, 서기로는 1218년 겨울이었다. 그들의 3만 기병이 국경을 넘은 이유는 고려에 들어와 있는 거란군을 쫓아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거란군들도 이미 내부분열이 일어나고 지쳐있어서
외부의 지원이 그토록 절실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랬다. 그들의 속내는 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때의 몽고는 대국 금나라와 전면적인 전쟁에 돌입해 있었기로
그 배후에 버티고 있는 고려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