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천서씨(절효공파)

무신정권의 계보 2

후암동남산 2012. 6. 9. 22:43

 

* 외통수: 무신정권의 시기는 1170~1270이라 외우기 쉽다. 그리고 그 시기 최고의 실권자였던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의 머리글자를 따 '정경이'로, 그 뒤를 이은 최충헌-최우-최항-최의의 최씨 정권은 이름을 따 '충우항의'로, 그 뒤를 이은 김준, 임연-임유무는 머리글자와 이름을 따 '김임연유'로 하여 ‘정경이 충우항의 김임연유’로 만들어 외운다. 그리고 당시 무인들이 정사를 펼치던 중심기구인 중방, 도방, 교정도감, 정방 순서를 ‘중도교정’으로 하여 외운다.

 

0 무신정권(武臣政權, 1170~1270)은 100년 동안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로, 정중부(1106~1170~1179), 경대승(1154~1179~1183), 이의민(?~1183~1196), 최충헌(1149~1196~1219)-최우(?~1219~1249)-최항(?~1249~1257)-최의(?~1257~1258), 김준(김인준. ?~1258~1268), 임연(?~1268~1270)-임유무(?~1270~1270)로 이어졌다(괄호속 연도는 태어난 해, 정권을 잡은 시기, 정권을 놓은 시기이자 죽은 해임).

 

 

0 최충헌(1149~1196~1219)은 무신정권이 지속된 100년 중에 아들 최우 이후 최항과 최의에 이르기까지 4대 62년(1196~1258년. 4대를 각각 시기별로 보면 1196~1219~1249~1257~1258) 동안을 지속하였다. 특히 최충헌은 집권자의 자리에 오른 이후 이전 집정들과 달리 1인 독재권력을 확고히 하는 한편 독자적인 집정부와 사병조직을 확립했다. 즉 진강후에 봉함을 받고 흥녕부(나중에 진강부로 바꿈)를 세워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정치는 교정도감, 군사는 도방 등을 통해 독재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 원래 최충헌은 할아버지, 아버지, 장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상장군을 지낸 당대 최고의 무인 가문 출신이었지만 관운은 별로 없었으며 파직도 경험하면서 한직에 맴돌고 있었다.

 

 

- 최충헌은 1196년 친동생 최충수, 조카인 박진재와 친족 노석숭, 대장군 이경유와 최문청 등 소외 세력들을 규합하여 1184년부터 집권하고 있던 이의민을 제거했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반대파를 철저하게 숙청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문무신들이 수차에 걸쳐 제거되었고 거사에 참여했던 이경유와 최문청도 숙청하며 독재를 강화했다.

 

- 최충헌은 17년에 걸쳐 집권하며 절대권력자로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명종을 포함해 신종·희종·강종에 이르는 4명의 임금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관직을 높이는 한편 흥녕부란 관청을 따로 두고 흥덕궁을 자기 궁궐처럼 사용했다. 뿐만아니라 민가 1백여 채를 허물고 궁궐 못지않은 대저택을 짓고 외국의 사신을 맞거나 연회를 위해 역사상 전례가 없는 초대규모 초호화판 잔치를 열었다. 또한 자신의 저택 곁에 십자각이란 초호화 별당을 짓기도 했다.

 

 

- 특히 희종 즉위 이후 최충헌에 대한 제거와 암살 기도가 이어지자 무신들의 합의기관인 중방을 무력한 기관으로 전락시키면서 교정도감을 설치해 반대자들을 제거하는 한편 자신의 독재 권력기구로 삼았다. 반면에 이의민이 의종을 죽인 전력으로 두고두고 ‘왕을 죽인 자’ 로 낙인 찍히는 것을 보고는 임금을 4명이나 갈아치우면서도 죽이지는 않았다.

 

 

- 최충헌은 권력투쟁과정에서 이의민, 두경승, 명종을 차례대로 제거했고 나중에는 그동안 늘 함께 하던 동생 최충수마저 죽였다.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세자비로 삼으려하자 이를 막고는 반란죄로 엮어 처단한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권력에 대한 어떠한 견제도 용납하지 않아 1218년 서북면 원수 조충과 병마사 김취려가 몽골·동진과 연합해 거란군을 격퇴하고 돌아왔지만 아무런 상훈을 내리지 않았으며 이에 불만을 가졌다는 이유로 1백명이 넘는 군인들을 죽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의 무인정권은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고, 그 이후 62년 동안 최씨 무인정권을 이어갔다.

 

 

- 그러나 그도 1219년 고종 6년 71세에 죽었으며, 그의 아들 최우가 대를 이었고, 그의 장례식은 문무백관이 소복을 입고 참석하여 여느 제왕에 못지않은 대규모로 치러졌다.

 

 

0 최우(?~1219~1249)는 최씨 정권의 2대 실력자로, 1219년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교정별감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아버지 최충헌이 축재한 물자를 임금에게 바치고 부당하게 취한 것을 돌려주는 한편 가난한 선비를 등용하고 아버지에 빌붙어 있던 관리와 동생 향을 파면하여 유배보냈다.

 

 

- 그러나 권력자로서의 처신은 확고하게 하였다. 1221년에는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며 확고한 집권을 했고, 1225년에는 사저에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고, 1227년 서방을 설치하여 문객을 받아들였으며, 도방을 확대편성하고 사병을 증강해 군권을 확고히 했다. 1228년 오대진국공신이 되고, 1229년 격구장을 만들어 한민족 고유의 무예스포츠인 격구를 장려했다. 1232년 몽골의 침공 소식에 강화로의 천도를 단행하고 성을 쌓아 대비했다. 1243년 국자감을 수축했으며 사재까지 동원하여 대장경을 완성했다. 그러나 말년에 갈수록 사치와 전횡이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민심을 잃었고, 몽골군의 침입이 시작되어 어려움을 겪지만 그의 권력은 확고하게 유지되어 1249년까지 30년 동안 집권했다. 또한 1247년 서자인 항을 곁에 두고 후계자 교육을 시키는 한편 정치를 주도하도록 했다.

 

 

* 최우는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하여 야간순찰과 도둑을 단속하게 하였는데, 이 야별초가 나중에 삼별초(三別抄)로 확대, 개편되면서 최씨정권의 사병집단으로 경찰과 전투의 임무를 맡았는데, 훗날 무인정권이 붕괴되고 몽골군이 진주하게 되자 삼별초의 항쟁을 벌이게 된다.

 

 

0 최항(?~1149~1257)은 최씨 정권의 3대 실력자로, 원래 승려로 있다 아버지 최우의 명으로 환속하여 이름을 받고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249년 최항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정권을 확고히 하는 한편 집권 초기에는 백성들의 조세를 줄여주고 교정도감을 개혁하면서 민심을 얻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김준의 도움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 최항은 기생에게서 난 서자 출신에 승려생활을 한 전력에 얽매여 유달리 의심이 많아 정적만이 아니라 수많은 주변인물들을 죽였다. 또한 몽골과의 대립도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갔으나, 강경책을 기조로 유지했다. 어쨌든 최항은 최충헌과 최우로 이어진 기존의 정치를 답습하다가 8년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0 최의(?~1257~1258)는 최씨 정권의 4대 실력자이자 마지막 권력자로, 최항의 아들로 노비였던 어머니에게 태어났지만 1257년 아버지 최항이 마땅한 후사가 없이 죽자 교정별감을 승계하면서 정권을 물려 받았다. 처음에는 무인들과 백성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등 민심을 얻고자 노력했다.

 

 

 

- 하지만 처녜 출신 성분으로 인해 조정대신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이내 전횡을 일삼기 시작하여 민심을 잃었고, 나중에 최씨 집안의 가노 출신인 별장 김준을 비롯하여 유경, 임연 등이 정변을 일으켜 야별초 등을 이끌고 그의 집을 습격당해 죽음으로서 4대 62년에 걸친 최씨 무신정권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