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 "8일 아침 6시 반경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 와우산 기슭의 와우시민아파트 제15동의 콘크리트 5층 건물이 무너져 주저앉는 바람에 안에 살고 있던 열네 가구 예순한 명과 아래 주민 세 가구 열두 명 등 모두 일흔세 명이 깔렸습니다. 오후 2시 현재 열한 명은 시체로 발굴되고 서른여섯 명은 부상을 입고 구출됐으며 아직 스물여섯 명은 묻혀 있는데 대부분 압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1970년 4월 8일, 김원(69·건축가)은 뉴스를 들으면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무허가 불량건물을 정리하고 서민 주택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내놓은 서울시 정책이 처참한 맨살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3년여 전 한 장면이 스쳐갔다. 》
○ 네글러의 기억
"이 나쁜 새끼! 한국 사람은 개, 돼지인 줄 알아. 너 같으면 네 평에서 살 수 있겠어? 뭐, 거적을 치고 살라니, 한국 사람을 어떻게 알고 하는 소리야."
김현옥 서울시장(1966∼1970년 재임)이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상대는 오스왈드 네글러. 당시 건설부에 고문 자격으로 와 있던 미국인 건축가이자, 도시계획전문가였다.
6·25전쟁 이후 1950년대 중반부터 서울은 지방민들의 무작정 상경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도심 산비탈에는 무허가 판잣집 같은 불법주택이 늘어났다. 불도저라는 별명의 김 시장은 이를 정비하려고 마음먹었고, 방안으로 시영아파트를 구상했다. 그 구체적인 안을 김원이 일하던 김수근 건축연구소에 요청했다. 하지만 도심 불량주택(단지)을 어떻게 재생해야 할지 우리나라도, 연구소도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네글러 씨와 상의를 했지요. 네글러 씨는 자신이 건설부 안에 만든 '주택도시계획연구소' 사람들과 의논을 했고요."
그렇게 공동으로 만든 안을 김 시장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탈'이 난 것이었다. 문제가 된 네슬러 씨의 안은 바로 4평(13.2m²)짜리 원룸형 아파트였다. 서울시가 뼈대와 벽, 그리고 전기 상하수도 난방 설비 등을 완벽하게 해주면 입주민들이 창문이나 도배, 장판 등의 인테리어를 소득수준에 맞춰서 스스로 갖추게 한다는 아이디어였다. 돈이 정 없는 사람들은 창에 거적을 치고서라도 살 수는 있게 하되 소득이 많아지면 두 채를 털어서 살 수 있게 하고 최대 네 채(16평·52.9m²)까지 합쳐서 살도록 하자는 착상이었다.
"네글러 씨의 생각이 제게는 정말로 인상적이었어요. 거기에 원래 살던 사람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안 주면서 자립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주자는 안이었거든요." 정부나 시는 기본적인 보조만 하고 사람들 스스로 자기 집을 지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방식이었다. 그렇게 지으면 주택 단가는 시세의 절반 미만으로 떨어지게 되고 원주민은 부담금 걱정 없이 입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힌 채 떠돌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너무도 작게 느껴지는 4평이라는 넓이와 거적이라는 단어가 김 시장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네글러 씨의 안은 거부됐고 시영아파트는 11평, 13평 두 가지 형태로 지어졌다. 와우산을 비롯해 도심 산동네 주민들은 사실상 쫓겨나 경기도 광주대단지로 이주했다. 그리고 와우아파트는 붕괴했다.
공공건물을 설계할 때, 공공주택을 지을 때, 건축가는 시민이라는 건축주에 대해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 것인지…. 20대 중반의 초보 건축가 김원이 가슴에 새긴 화두였다.
○ 스스로 '짓는' 집
카사비앙카(하얀 집·이탈리아어). 네글러 씨의 '사건' 이전까지 김원에게 주택의 이상형은 언덕 위의 하얀 집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거주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주택'이 대신 자리 잡게 됐다.
김수근 선생 밑에서 일하는 동안 그 영향으로 그는 소형주택을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러나 당시 연구소에는 럭키(현 LG) 구인회 회장의 250평짜리 자택 설계 같은 일감이 많았다. "김 선생님이 어느 날 '야, 너는 도대체 사무실 분위기를 모르냐'고 하시더라고요. 속으로 갈등도 했고 내가 독립하면 저렇게 안 하겠다는 생각도 가끔 했지요."
햇수로 6년을 일하고 독립을 한 지 2년 뒤인 1972년, 네덜란드 정부 초청 유학의 기회가 왔다. 개발도상국 학생들을 불러 로테르담의 대학원 연구소에서 주택문제를 공부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개발도상국에서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주택단지를 어떻게 조성해야 하는지가 주요 연구과제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집을 짓게 만들면서 그동안 꾸려온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고 도시의 역사를 꾸려나가도록 하는 것, 그걸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고 할까요."
네덜란드에서 그는 망외의 '소득'도 올렸다. 한국 전통건축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첫 수업시간, 하스 박사라는 노교수가 그의 이름 '킴(Kim)'을 부르더니 일어나 보라고 했다. 하스 박사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 사람을 눈여겨봐라. 코리아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아는가. 내가 아는 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현명한 난방시스템인 온돌이 있는 나라다. 지금까지 있어 온 수천 개의 민족 중 그 어떤 다른 민족도 생각지 못한 것을 만든 나라다." 조립식 주택 전문가인 하스 박사는 과거 옛 소련에 노하우를 전수하다 북한으로부터도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온돌의 존재를 알게 됐던 것이다.
그는 '나도 모르는 걸 외국 사람이 저렇게 잘 아는구나' 하고 반성을 했다. 그래서 우리 전통건축에 대해 공부하고 외국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해줬다. 공기의 흐름만으로 팔만대장경을 800여 년간 좀 하나 먹지 않고 보존해온 해인사 장경각의 경이로움도 알려줬다. 침대나 소파 같은 무거운 고정식 가구가 자리를 차지하는 서양식 방이 아니라, 공간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우리 한옥 방이 가진 효율성과 풍미를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1973년 말 돌아온 한국은 아파트 투기 광풍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생존권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없는 사람들의 거주권은 어디서도 이야기되지 않았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40년이 흘렀다.
○ 땅콩밭
지난해 상반기 건축계의 이슈는 '땅콩집'이었다. 두 가구가 한 필지에 두 채의 집을 붙여 지었는데 비용이 한 채당 땅값까지 합쳐 3억 원대였다. 서울 도심 중형 아파트 전세금으로 자기 집을, 그것도 마당이 있는 주택을 갖게 됐다. 그 주택을 구상하고 설계해 지은 이현욱 씨는 바로 김원의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소속 건축가였다. "제가 우리 사무실 사람들한테 집 크게 지으면 안 된다, 투기하면 안 된다,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만날 그렇게 하다보니 땅콩집이 나왔어요."
거기서 더 나아가 김원은 '땅콩밭'을 만들고 있다. 그가 40년 동안 꿈꾸던 생태공동체다. 30가구가 한 곳에 모여서 같이 사는 실험에 들어간 것이다. 이미 1단계로 땅콩집 서른 채를 지어 입주를 끝냈다. 공동텃밭을 만들었고, 서른 가족이 차 다섯 대만으로 서로 나눠 타는 걸 시도하고 있다.
"왜 사람들이 땅콩집에 열광했는지 압니까? 그동안 아파트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간 그의 머릿속을 뱅뱅 돌기만 하던, 자그맣고 효율적이면서도 경제적 부담이 덜 드는 집을 만드는 일이 점점 구체화하고 있다. 그는 세상이 바뀌어 간다고 했다.
■ 김원은…
김수근 김중업을 잇는 건축가 그룹의 선두주자였다. 독립기념관 터 선정 및 마스터플랜 작성, 국립국악당, 통일연수원, 남양주 영화종합촬영소 설계와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한 백남준 비디오아트 '다다익선'의 구조 설계도 했다. 백남준 탄생 80주년을 맞아 '다다익선'이라는 책을 냈다.
《 "8일 아침 6시 반경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 와우산 기슭의 와우시민아파트 제15동의 콘크리트 5층 건물이 무너져 주저앉는 바람에 안에 살고 있던 열네 가구 예순한 명과 아래 주민 세 가구 열두 명 등 모두 일흔세 명이 깔렸습니다. 오후 2시 현재 열한 명은 시체로 발굴되고 서른여섯 명은 부상을 입고 구출됐으며 아직 스물여섯 명은 묻혀 있는데 대부분 압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1970년 4월 8일, 김원(69·건축가)은 뉴스를 들으면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무허가 불량건물을 정리하고 서민 주택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내놓은 서울시 정책이 처참한 맨살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3년여 전 한 장면이 스쳐갔다. 》
○ 네글러의 기억
"이 나쁜 새끼! 한국 사람은 개, 돼지인 줄 알아. 너 같으면 네 평에서 살 수 있겠어? 뭐, 거적을 치고 살라니, 한국 사람을 어떻게 알고 하는 소리야."
김현옥 서울시장(1966∼1970년 재임)이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상대는 오스왈드 네글러. 당시 건설부에 고문 자격으로 와 있던 미국인 건축가이자, 도시계획전문가였다.
6·25전쟁 이후 1950년대 중반부터 서울은 지방민들의 무작정 상경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도심 산비탈에는 무허가 판잣집 같은 불법주택이 늘어났다. 불도저라는 별명의 김 시장은 이를 정비하려고 마음먹었고, 방안으로 시영아파트를 구상했다. 그 구체적인 안을 김원이 일하던 김수근 건축연구소에 요청했다. 하지만 도심 불량주택(단지)을 어떻게 재생해야 할지 우리나라도, 연구소도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네글러 씨와 상의를 했지요. 네글러 씨는 자신이 건설부 안에 만든 '주택도시계획연구소' 사람들과 의논을 했고요."
그렇게 공동으로 만든 안을 김 시장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탈'이 난 것이었다. 문제가 된 네슬러 씨의 안은 바로 4평(13.2m²)짜리 원룸형 아파트였다. 서울시가 뼈대와 벽, 그리고 전기 상하수도 난방 설비 등을 완벽하게 해주면 입주민들이 창문이나 도배, 장판 등의 인테리어를 소득수준에 맞춰서 스스로 갖추게 한다는 아이디어였다. 돈이 정 없는 사람들은 창에 거적을 치고서라도 살 수는 있게 하되 소득이 많아지면 두 채를 털어서 살 수 있게 하고 최대 네 채(16평·52.9m²)까지 합쳐서 살도록 하자는 착상이었다.
"네글러 씨의 생각이 제게는 정말로 인상적이었어요. 거기에 원래 살던 사람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안 주면서 자립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주자는 안이었거든요." 정부나 시는 기본적인 보조만 하고 사람들 스스로 자기 집을 지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방식이었다. 그렇게 지으면 주택 단가는 시세의 절반 미만으로 떨어지게 되고 원주민은 부담금 걱정 없이 입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힌 채 떠돌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너무도 작게 느껴지는 4평이라는 넓이와 거적이라는 단어가 김 시장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네글러 씨의 안은 거부됐고 시영아파트는 11평, 13평 두 가지 형태로 지어졌다. 와우산을 비롯해 도심 산동네 주민들은 사실상 쫓겨나 경기도 광주대단지로 이주했다. 그리고 와우아파트는 붕괴했다.
공공건물을 설계할 때, 공공주택을 지을 때, 건축가는 시민이라는 건축주에 대해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 것인지…. 20대 중반의 초보 건축가 김원이 가슴에 새긴 화두였다.
○ 스스로 '짓는' 집
카사비앙카(하얀 집·이탈리아어). 네글러 씨의 '사건' 이전까지 김원에게 주택의 이상형은 언덕 위의 하얀 집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거주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주택'이 대신 자리 잡게 됐다.
김수근 선생 밑에서 일하는 동안 그 영향으로 그는 소형주택을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러나 당시 연구소에는 럭키(현 LG) 구인회 회장의 250평짜리 자택 설계 같은 일감이 많았다. "김 선생님이 어느 날 '야, 너는 도대체 사무실 분위기를 모르냐'고 하시더라고요. 속으로 갈등도 했고 내가 독립하면 저렇게 안 하겠다는 생각도 가끔 했지요."
햇수로 6년을 일하고 독립을 한 지 2년 뒤인 1972년, 네덜란드 정부 초청 유학의 기회가 왔다. 개발도상국 학생들을 불러 로테르담의 대학원 연구소에서 주택문제를 공부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개발도상국에서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주택단지를 어떻게 조성해야 하는지가 주요 연구과제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집을 짓게 만들면서 그동안 꾸려온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고 도시의 역사를 꾸려나가도록 하는 것, 그걸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고 할까요."
네덜란드에서 그는 망외의 '소득'도 올렸다. 한국 전통건축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첫 수업시간, 하스 박사라는 노교수가 그의 이름 '킴(Kim)'을 부르더니 일어나 보라고 했다. 하스 박사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 사람을 눈여겨봐라. 코리아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아는가. 내가 아는 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현명한 난방시스템인 온돌이 있는 나라다. 지금까지 있어 온 수천 개의 민족 중 그 어떤 다른 민족도 생각지 못한 것을 만든 나라다." 조립식 주택 전문가인 하스 박사는 과거 옛 소련에 노하우를 전수하다 북한으로부터도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온돌의 존재를 알게 됐던 것이다.
그는 '나도 모르는 걸 외국 사람이 저렇게 잘 아는구나' 하고 반성을 했다. 그래서 우리 전통건축에 대해 공부하고 외국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해줬다. 공기의 흐름만으로 팔만대장경을 800여 년간 좀 하나 먹지 않고 보존해온 해인사 장경각의 경이로움도 알려줬다. 침대나 소파 같은 무거운 고정식 가구가 자리를 차지하는 서양식 방이 아니라, 공간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우리 한옥 방이 가진 효율성과 풍미를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1973년 말 돌아온 한국은 아파트 투기 광풍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생존권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없는 사람들의 거주권은 어디서도 이야기되지 않았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40년이 흘렀다.
○ 땅콩밭
지난해 상반기 건축계의 이슈는 '땅콩집'이었다. 두 가구가 한 필지에 두 채의 집을 붙여 지었는데 비용이 한 채당 땅값까지 합쳐 3억 원대였다. 서울 도심 중형 아파트 전세금으로 자기 집을, 그것도 마당이 있는 주택을 갖게 됐다. 그 주택을 구상하고 설계해 지은 이현욱 씨는 바로 김원의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소속 건축가였다. "제가 우리 사무실 사람들한테 집 크게 지으면 안 된다, 투기하면 안 된다,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만날 그렇게 하다보니 땅콩집이 나왔어요."
거기서 더 나아가 김원은 '땅콩밭'을 만들고 있다. 그가 40년 동안 꿈꾸던 생태공동체다. 30가구가 한 곳에 모여서 같이 사는 실험에 들어간 것이다. 이미 1단계로 땅콩집 서른 채를 지어 입주를 끝냈다. 공동텃밭을 만들었고, 서른 가족이 차 다섯 대만으로 서로 나눠 타는 걸 시도하고 있다.
"왜 사람들이 땅콩집에 열광했는지 압니까? 그동안 아파트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간 그의 머릿속을 뱅뱅 돌기만 하던, 자그맣고 효율적이면서도 경제적 부담이 덜 드는 집을 만드는 일이 점점 구체화하고 있다. 그는 세상이 바뀌어 간다고 했다.
■ 김원은…
김수근 김중업을 잇는 건축가 그룹의 선두주자였다. 독립기념관 터 선정 및 마스터플랜 작성, 국립국악당, 통일연수원, 남양주 영화종합촬영소 설계와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한 백남준 비디오아트 '다다익선'의 구조 설계도 했다. 백남준 탄생 80주년을 맞아 '다다익선'이라는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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