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남산이야기

우리집 가훈...최초로 가훈을 지은 동방의 효자, 서릉徐稜

후암동남산 2013. 6. 2. 06:14

고려 고종 때의 유명한 효자로 장성군 북일면 작동에서 태어나 이천서씨 절효공파( 전 장성서씨)의 중시조가 되었는데 생몰년은 명확치 않다. 자는 大方(대방), 호는 節孝(절효)이며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중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 목에 큰 종창이 생겨 의원을 청하여 보였더니 “산개구리가 없으면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능은 울면서 말하기를 “지금 섣달인데 어떻게 산개구리를 구할 수 있으리오. 어머님 병은 어찌할 도리가 없겠구나”하고 슬피 흐느끼니 의원이 말하기를 “산개구리는 없더라도 우선 있는 것만으로 약을 지어서 시험해 봅시다”하여 나무 밑에서 약을 달이는데 갑자기 나무 위에서 약탕관에 떨어지는 것이 있어 살펴보니 산개구리였다.

의원은 놀라며 “아들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내려 준 것이요. 어머님의 병은 반드시 나을 것이오”하였다. 이 약으로 모친의 병은 바로 나았고 능의 효행은 널리 알려졌으며 조정에서는 정려를 내려 백성들의 본보기로 삼았다

?고려사? 효우조에는 ‘고려 500년간 孝友(효우)로서 사서에 기록되고 정표된 자는 10여 인에 불과하다’라 적고 전라도인으로는 유일하게 서능을 소개하고 있다. 또 훗날 세종대왕은 삼강행실도에 35인의 효행을 표본으로 삼으면서 동국인 4인 중에 서능을 포함시켰으며, ?세종실록지리지? ‘장성현’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그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주자학을 수입한 안향(1243~1306)보다 30여년 연상이던 서능은 서삼면 모암리에 초당을 짓고 학동들을 가르쳐 장성에 학문의 씨앗을 뿌렸으며,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에 있을 때 친척의 자재들이 찾아와 그들을 공부시키면서 居家十訓(거가십훈)을 지어 명심토록 일렀다. 거가십훈은 우리나라 가훈의 효시로 알려져 있으며, 팔만대장경을 만들던 불교의 전성기에 유교윤리에 철저한 가훈을 제시하였다. 서능이 얼마나 유학에 조예가 깊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居家十訓(거가십훈)

 

扶植三綱 삼강을 바로 세워라.

惇敍五倫 오륜을 돈독히 펴라.

寬以御下 아래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라.

禮以事上 윗사람을 예로서 섬겨라.

臨喪致哀 상을 당하거든 슬픔을 다하라.

當祭致敬 제사는 경건하게 모셔라.

持心以公 마음은 공정하게 가져라.

處事以義 일은 의롭게 처리하라.

敎子以正 자식은 바르게 가르쳐라.

待人以恕 사람들은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하라.

 

기록이 없어 서능의 만년에 대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 6차 침입 때 영광 법성포에 내려온 송군비 장군이 장성의 입암산성으로 들어와 몽고군을 대파한 것은 서능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학문과 예절의 고장으로 이름을 떨친 장성의 선비들은 서능을 유학의 종사로 받들었으며 선조 11년(1578) 사암 박순이 비문을 짓고 옥봉 백광훈이 글씨를 쓴 서능의 정려비가 태생지에 세워졌다. 사암 박순은 「고려시중 절효선생 서공비명 병서」에서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오! 선생님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 받드시니

온화한 성품 진실하신 모습 뵙는 듯하옵니다.

모친 병환에 약을 구하지 못해 하늘을 우러러 울고 계실 때

눈서리 몰아쳐 온갖 벌레는 땅속에 움츠리고 있는데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하늘이 소원을 들어주시니

비단 도포, 불룩한 배(개구리를 상징)의 묘한 약제 참으로 신통하였네,

건강하게 수하시며 기뻐하는 모친 얼굴에 화색이 가득하니

하늘의 명명한 조화 그 누가 짐작했으리.

변치않는 한마음에 하늘 또한 어김없으니

아름답다 그 지순 그 행적 우뚝 하셨도다.

옛모습 그대로의 온화한 마을, 우뚝한 뒷산 질펀한 강물과 함께

훌륭하신 그 명성 영원히 떨치며 만고에 빛나리.

선조 20년(1587) 옛 초당터인 서삼면 모암리에 현감 이개가 향유들의 뜻에 따라 서원을 건립하여 서능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 고을 학문의 도장으로 삼으니 장성 최초의 서원이다. 모암서원은 후에 장성의 대표적 인물인 조영규, 조정노, 최학령, 정운룡, 김우급, 박수량을 추배하고 향화를 올렸으나 고종 5년 훼철되어 단비만 세워져 있으며 향유들이 1976년 북일면 성덕리에 龍田祠(용전사)를 건립하여 서능만 독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