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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란 여러분들이 포기하는 순간 사라지게 됩니다
[매거진S] 17세 소년, 축구종가에서 꿈을 잡다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12시간을 날아갔다. 그리고 버밍엄까지 다시 1시간 반. 최종 목적지까지의 여정은 예상보다 길었다. 잉글랜드축구협회(The FA)가 10여년씩이나 공들여 문을 연 국가대표팀 훈련장 세인트조지파크 국립축구센터(St.George’s Park National Football Centre)의 외진 위치 덕분이다.
긴 여행을 함께한 일행 중에는 세 명의 축구 청춘이 있다. 대학교 4학년인 나진성(한국국제대)과 한상협(호서대) 그리고 아직 앳된 얼굴의 윤수용(장훈고 3학년)이다. 유망주 스카우팅 프로젝트 '나이키 찬스'의 글로벌 파이널에 참가하는 한국 대표 3인이다.
32개의 '풋볼 드림', 세인트조지파크 집결하다
먼 길을 달려온 세 사람이 드디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훈련장인 세인트조지파크의 메인 로비에 도착했다. 로비에 앉아있으니 주위로 싱싱한 체격을 가진 젊은 친구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세계 20개국에서 날아온 나머지 29명의 경쟁자들이었다. 낯설고 다양한 외국어가 여기저기서 마구 뒤섞이자 한국 대표 3인의 얼굴에서는 여행의 설렘이 승부욕으로 대체되었다.
앞으로 사흘간 총 32명의 각국 선수들은 체력 테스트와 실전 소화를 통해 글로벌 파이널 최종 승자 6인의 자리를 놓고 경쟁한다. 선발된 6명에겐 '나이키 아카데미'의 입학 자격이 주어진다. 바로 이곳 세인트조지파크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선수들과 동일한 훈련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영국 본토의 체계적 코칭과 빅클럽 유소년팀과의 연습 경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혜택이 꿈만 같다.
한국 대표로 참가한 3인방 (사진제공 : 나이키)
절실한 대학 4학년과 욕심에 솔직한 고등학교 3학년
한국 대표 3인은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사연을 갖고 있다. 나진성과 한상협은 이번 '나이키 찬스' 글로벌 파이널이 더욱 절실하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 뛸 팀을 구하지 못한 탓이다. 우여곡절도 꽤 깊었다. 나진성은 빈혈로 고2 동계훈련을 건너 뛴 탓에 원하는 학교 진학에 실패했다. 운동을 포기할 뻔도 했지만 고교 은사의 도움으로 겨우 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한상협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에 나가지 못했던 고교 시절에는 혼자 풋살 대회를 찾아가 경기를 뛰었다. 운동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소속 학교의 정책 탓에 호서대 축구부 자체가 대학 무대에서 호성적을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운동을 하면서도 각종 자격증 등을 따고 공부만으로 체육학과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독하게 살아왔지만, 이젠 자신을 받아줄 성인팀을 찾아야 할 입장이다. 곧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떠나야 하는 두 사람에겐 이번 글로벌 파이널이 너무나 간절할 수밖에 없다.
막내 윤수용이 그나마 부담이 가장 덜했다. 그에겐 '나이키 찬스'가 행운의 연속이다. 진학할 대학을 찾지 못해 불안해 하던 차에 참가했던 한국 결선에서 덜컥 3인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글로벌 파이널을 준비하던 중 나섰던 명지대 공개테스트에도 붙어 대학 진학도 해결되었다. 그래서 세인트조지파크로 향하는 마음이 본인 스스로도 가벼울 줄 알았다. 하지만 현장에 와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한테는 욕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좋은 경험이 될 테지만 여기 와보니까 또 꼭 뽑히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유럽 선수들과는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더 기대도 되고요"
글로벌 파이널에 진출한 32명의 선수들은 혹독한 현지 적응을 겪어야만 했다 (사진제공 : 나이키)
혹독한 현지 적응 3종 세트: 미끄러지고, 패스 못 받고, 아프고
그러나 첫 번째 실전 테스트가 있는 날부터 이들은 불안해졌다. 영국의 잔디가 한국과는 너무나 달랐다. 질척거리는 잔디 위에서 '턴 동작'을 할 때마다 세 명 모두 신체 밸런스가 무너졌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하니 움직임 자체가 움츠러들었다. 하프타임이 되자 사이드라인 밖으로 나온 이들은 스터드(축구화 발바닥 부분)에 떡처럼 눌러 붙은 잔디를 떼내며 "너무 미끄러워서 못 뛰겠어요"라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두 번째 복병은 외국인 동료들의 전혀 다른 플레이스타일이었다. 유럽식 스타일에 익숙한 외국인 경쟁자들은 격렬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엄청난 힘이 실린 태클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테스트라는 특성은 경기 짜임새를 희생시킨 채 템포만 잔뜩 높여놓았다. 천천히 만들어가는 스타일에 익숙했던 한국 대표 3인의 플레이 관여도가 경쟁자들에 비해 떨어졌다.
다행히 막내 윤수용은 남다른 적응력을 보였다.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감각을 익힌 윤수용이 조금씩 경기 템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후반 중반, 최후방 수비 라인에서 넘어간 패스가 드물게 연결되었고, 공격 가담을 위해 전진했던 윤수용에게 기회가 생겼다. 침착하게 슈팅을 시도했고 볼은 깔끔하게 골네트 안에 감겼다. 평가를 맡은 영국인 코치도 공격 가담에 의한 수비형 미드필더의 득점에 높은 점수를 줬다. 경기가 종료되자 선수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이들은 윤수용의 플레이를 칭찬했다.
하지만 실전 테스트를 마치고 '앨런 시어러' 그라운드에서 빠져나가는 윤수용의 발걸음이 약간 불편해 보였다. 물어보니 "너무 잘하려고 힘을 과하게 썼더니 무릎 뒤쪽이 아파요. 코치한테 얼음 팩을 받긴 했는데 이거 대고 있으면 안 아플지…"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1년 전 윤수용은 '나이키 찬스' 한국 예선에서 잘하다가 부상 탓에 도중 포기해야 했던 경험을 가진 터라 얼굴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글로벌 파이널 현장에서의 부상 탈락은 95년생 선수에겐 너무 가혹한 시나리오일 수밖에 없다.
체력테스트에서 두각을 보인 한국 선수들 (사진제공 : 나이키)
한국인 잔치로 변해버린 체력 테스트 현장
혹독한 실전 신고식을 치른 한국 대표 3인의 기분은 체력 테스트에서 조금이나마 위로 받을 수 있었다. 단계별로 짧아지는 기준 시간 내에 20미터 거리를 왕복하는 요요 테스트(일명 '삑삑이') 덕분이었다. 나진성, 한상협, 윤수용은 모두 같은 조에 속해 요요 테스트를 시작했다. 10단계가 되자 첫 번째 탈락자가 나왔다. 15, 16, 17단계 식으로 왕복 기준 시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탈락자들이 속출했다.
운동선수들도 힘들어한다는 20단계가 넘어갔다. 대부분이 탈락하고 생존자는 단 세 명뿐이었다. 기막히게도 모두 한국인 선수들이었다. 25단계가 넘어가면서 나진성과 윤수용이 탈락하고 이제 남은 건 한상협 혼자뿐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경쟁자들은 물론 관계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한상협의 역주를 응원했다. '나이키 아카데미'의 길리건 감독은 트랙 안까지 들어가 마지막 생존자를 향해 "Go! Go!"를 외쳤다. 30단계를 마치고서야 한상협은 바닥 위로 길게 드러누워 숨을 헐떡거렸다. 모두가 그를 향해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뜨거운 동료애가 경쟁 속에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맨유의 파비우를 만난 윤수용 (사진제공 : 나이키)
파비우 "팍이 한국 음식 많이 사줬어요!"
테스트 중 필자는 세인트조지파크에서 반가운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브라질 쌍둥이' 중 한 명인 파비우 다실바(23, 브라질)이었다. 국내 팬들로서는 하파엘보다 파비우에게 더 큰 애정을 느낄지 모른다. 모두의 아픔(?)으로 남은 퀸즈파크레인저스 임대 시절(2012-13시즌)을 박지성(32, PSV)과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박지성과 함께했던 런던 생활을 묻자 파비우는 "아, 좋았어요. 팍(Park; 박지성을 지칭)이 한식을 자주 사줬어요. 제가 브라질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고요"라며 활짝 웃어 보였다. 18세의 나이로 빅클럽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입단 기회를 잡았을 때의 기분도 궁금해졌다. 파비우는 "전화 통화를 하는데 하파엘이 맨유에서 연락이 왔다는 거에요. 당연히 안 믿었죠. 장난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말이더라고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라며 당시의 흥분을 되새겼다.
하지만 파비우와의 대화 중에서 중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말은 꿈에 관한 그의 믿음이었다. 프로축구선수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을 물었다. 파비우는 "목표 달성을 위한 헌신"이라고 잘라 말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대답은 '나이키 아카데미' 길리건 감독과 정확히 일치했다. 같은 질문에 대해서 길리건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프로선수가 되기 위해선 일상의 즐거움을 바쳐야 합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맛있는 것 먹고, 그런 것 다 하면 안 되요. 친구들이 놀러 나갈 때 수면을 취해야 해요. 친구들이 술을 마실 때 나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친구들이 담배를 피울 때 나는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해야 하죠. 프로축구선수가 되려면 인생의 목표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해야 합니다"
최종 6인 선택에서 본인 이름을 호명 받고 나가는 윤수용 (사진제공 : 나이키)
최종 선택의 순간
모든 테스트가 끝났다. 최종 발표식장 안에 들어선 32인의 참가자들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영국 잔디에 호되게 당한 터라 한국의 축구 청춘 세 명의 표정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쉬움 가득한 눈빛이었다. 영국인 코치에게 유일하게 칭찬을 받았던 윤수용마저 무릎 통증을 참고 뛰었던 탓에 표정이 어두웠다.
길리건 감독이 단상 위에 올라 참가자 모두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리곤 "오늘 이 자리에서 선택 받지 못했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꿈이란 여러분들이 포기하는 순간 사라지게 됩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겼다.
길리건 감독의 첫 번째 선택은 네덜란드 출신의 풀백이었다. 이어 두세 번째 최종 선발자가 동료와 특별 손님 파비우의 축하를 받으며 당당히 단상 위에 올랐다. 이제 남은 티켓은 단 3장. 한국인 참가자 3명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길리건 감독이 네 번째 선발자의 이름을 찾기 위해 명단을 내려봤다. 그리곤 마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나이키 찬스 글로벌 파이널 최종 6인에 선발된 선수들 (사진제공 : 나이키)
"사우스 코리아, 넘버 식스, 윤수용"
됐다. 상황 파악이 더딘 윤수용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진성과 한상협 두 명의 형들이 막내의 등을 연신 두들기며 자기 일처럼 축하해줬다. 단상으로 가까이 가면서 특유의 '뚱한' 표정이 사라지고 그제서야 큰 미소가 윤수용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이틀 전, "사람 욕심이라는 게 또 그렇잖아요"라며 쑥스럽게 말했던 막내가 최종 6인으로 선발된 것이다.
마지막 2장의 호명에도 나진성과 한상협의 이름은 없었다. 예측한 탈락이 현실이 되자 두 사람 모두 위로 인사에도 입을 떼지 못하고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인트조지파크에서 보낸 짧은 경험을 통해 또 다른 찬스가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둘은 잘 알고 있었다. 왜냐면 '글로벌 파이널' 같은 찬스를 경험하게 되리라곤 이들 역시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진짜' 찬스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이제 윤수용은 꿈에 그리던 유럽 축구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의 성공을 보장해줄 사람은 없다. 꿈을 이룬 것이 아니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을 뿐이다.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 '나이키 찬스' 글로벌 파이널 기간 중 윤수용은 유럽 동료들과 직접 부딪히면서 깜짝 놀랐다. 다들 힘이 너무 셌기 때문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웨이트를 더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깨달았다.
무릎 통증 발생 후 사실 윤수용은 계속 짜증이 난 상태였다. 보여줄 수 있는 게 더 많은데 너무 아팠다. 그래서 마지막 실전 테스트는 실력 발휘보다 버티기에 가까웠다. 성공적인 프로축구선수가 되기 위해선 항상 최고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윤수용이 들어가려는 곳은 부상이 불운보다 능력에 가까운 세상이다. 영국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덕목 중 하나일 것이다.
세인트조지파크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윤수용 (사진제공 : 나이키) |
하지만 만 17세라는 나이가 윤수용에겐 최대 무기다. 배움의 속도가 빠르다. 미끄러운 잔디에도 윤수용이 가장 먼저 적응했다. '나이키 아카데미' 1기였던 장훈고 선배 문선민의 귀가 유럽 체류 2년 만에 거의 열렸다는 선례도 있다. 탄산음료를 멀리 할 정도로 자기 관리도 체득된 상태다. "이렇게 좋은 시설에서 축구를 배우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호기심과 설렘도 나이 어린 윤수용에겐 영양분 가득한 비타민이 되어줄 수 있다.
루니가 뛰는 곳에서 윤수용이 달린다
최종 결과 발표 직후 윤수용은 자리를 옮겨 커다란 PC 화면 앞에 앉았다. 아카데미에서 자신이 신게 될 축구화의 종류와 치수, 색깔 등을 직접 고르기 위해서였다. 정해진 단계에 따라 각종 옵션을 하나 하나 선택한 끝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축구화'가 만들어졌다.
마치 앞으로 '축구종가'에서 보내게 될 윤수용의 내일을 보는 듯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선택을 하고 찬스를 잡아가야 한다. 단계별로 완성되어가는 '나만의 축구화'처럼 이제 윤수용의 '풋볼 드림'도 조금씩 완성되어 나갈 것이다. 그의 그라운드는 이제 '삼사자' 마크를 가슴에 단 루니가 뛰는 곳 세인트조지파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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