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경기가 끝나고도 잠이 오질 않았다. 웬일? 컨디션도 경기 전보다 더 좋은 게 아닌가! ㅋㅋ 이게 바로 은퇴의 마법인가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축하 메시지와 경기 영상을 캡처한 사진들이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메달권에서 멀어진 선수에게 이렇게 큰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시다니…. 500미터 때 이어 다시 한 번 큰 감동이 밀려왔다.
가슴 뜨거웠던 마지막 레이스를 마치고..(사진 : 연합뉴스) |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참 부족한 스케이트 선수였다. 올림픽은 내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30년 넘게 스케이트를 탔지만 스케이트는 항상 내게 풀기 어려운 숙제였고, 인생을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나의 부족함을 일깨우고, 그 부족함을 채워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은퇴라는 말이 아직은 실감이 안 난다. 오늘 하루 쉬고 내일쯤 다시 운동을 나가야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마지막 경기니 은퇴니 해서 인터뷰를 하고 있긴 하지만 감정도 이래저래 미묘하다.
4년을 준비해온 은퇴다. 지난번 올림픽 때야 선수생활을 계속하기엔 나이도 많고 기량도 부족하니 ‘이제 그만 하자’는 생각이 전부였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아름답게 은퇴하기 위해 지난 4년간 죽을힘을 다해 선수로 생활해왔고, 이렇게 마지막 레이스를 치렀다. 마지막인 줄을 미리 알고 준비한 올림픽이기에 지난 4년간 나는 참 많이 큰 것 같다.
경기 결과도 좋았다. 전에는 올림픽 때면 내가 갖고 있는 기량의 80~90%를 발휘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기량의 120%를 발휘했다. 마음의 짐을 모두 내려놓고 달린 덕분인 것 같다. 전성기에 비하면 형편없는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내 수준에서는 충분히 잘 한 경기고, 만족스럽다. 올림픽의 여신이 내게 메달은 주지 않았지만 마지막 행운은 준 것 같다.
태범이도 어느덧 기운을 되찾았다. 잠시 선수촌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 이규혁) |
태범이가 메달 획득에 실패한 것도 마음의 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합이 끝난 뒤 태범이를 찾아갔다. “내가 너한테 큰 짐을 지운 것 같다. 미안하다. 하지만 넌 충분히 잘 했어. 그리고 다음 번에 훨씬 더 잘할 거야.” 우승 후보만이 느낄 수 있는 무게가 있다. 선배들이 나눠서 들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부족한 선배라서, 그러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다. 올림픽이 끝난 뒤에 둘이서 조용히 술 한 잔 하며 올림픽 대한 마인드 강화에 대해 얘기해보기로 했다.
승훈이도 5,000미터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상심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위로의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 그냥 옆에 있어주고, 얼굴 마주치면 웃어주고……. 다른 선후배들이 지금까지 내게 건넨 방식 그대로 무언의 위로를 전하는 수밖에. 승훈이도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 장거리는 우리처럼 이틀 뒤에 바로 경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일주일 이상 체력 관리를 할 수 있으니 그간 컨디션을 회복해서 10,000미터 경기는 더 잘 해낼 거라고 믿는다.
1000미터 경기 후 우승자 스테판 흐로타위스 선수와 기념촬영, 네덜란드 선수들이 갖춘 환경과 기량은 항상 부러움의 대상이다. (사진 : 이규혁) |
이제 상화 1,000미터 경기 응원하러 가야겠다. 상화는 볼수록 기특한 선수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잘 가르친 게 아닐까… ㅋㅋ… 상화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봐왔는데, 상화는 정말 빈틈이 없는 선수다. 올림픽에 대처하는 자세도 아주 자연스러워서 시간이 지나면 훨씬 더 큰 선수로 성장할 것 같다. 자, 가자! 이상화 파이팅!!
*본 칼럼은 이상화 1000m 출전 경기일 이전에 작성되었습니다.
굿바이 올림픽의 트랙이여..(사진 : 연합뉴스) |
[영상보기 ▶] 앞으로 볼수 없는 이규혁의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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