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기 전부터 숫자를 가르치고 연산 문제집을 풀게 하는 엄마들도 적지 않다. 혹시나 우리아이가 ‘수포자’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부터 수학공부를 시작해 열심히 문제를 풀다 보면 어느새 수학실력이 쑥쑥 향상돼 있는 걸까?
전국수학교사모임 대표로 34년간 학교 현장에서 수학을 가르쳤고, 학교를 그만둔 뒤로는 ‘수포자 없는 수학교실’을 위해 교육운동을 벌여온 최수일 수학사교육포럼 대표는 “그럴 수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아이가 개념을 익히기보다 문제풀이에 매달리게 될수록 당장에는 아이 성적이 높게 나올지라도 중고등학교로 가면서 수학과 담을 쌓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수학․영어․독서 공부법으로 이어질 ‘사교육 걱정없는 초등사용설명서’ 강좌를 지상중계한다. 최수일 대표 강의는 3월21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강의실에서 진행됐다.
최수일(수학사교육포럼 대표)
먼저 간단한 문제 하나를 내어 드리겠다. 한번 풀어 보시라.
48/2(9+3)은 얼마인가요?
(청중들에게 잠시 시간준 뒤) 다들 풀어 보셨나?
(일부 청중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2요”라고 답하자) 이 문제는 사실 답이 없다(웃음). “2”라고 답변하신 분들은 아마 ‘48/2×(9+3)’처럼 괄호 앞에 곱셈 부호가 있다고 지레 짐작하셨을 게다.
그러나 그런 수학은 없다. 숫자와 괄호 사이에 곱셈이 있을지, 덧셈·뺄셈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중학교에 올라가면 숫자와 문자, 문자와 문자 사이의 곱셈부호를 생략하는 걸 배우게 된다. 그렇지만 숫자와 숫자 사이 곱셈부호는 절대로 생략할 수 없다. 그러니 이건 이를테면 맞춤법이 틀려 해석할 수가 없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조건 답을 구하려 한다. 한국의 교육환경에서는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무조건 답을 내게 되어 있으니까. 반면 똑같은 문제를 외국 아이들한테 물어 보면 손을 들고 “이게 뭐예요?”라고 묻는 게 보통이다.
이번에는 유명한 석사논문에 실린 사례를 한번 보자. 우리나라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실제 벌어진 문답이다.
교사:“7 다음에 오는 수는 뭐지?” 학생:“8이에요.” 교사:“7에서 8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7에다가 1을 더하지요.” 교사:“잘했다.” (학생을 격려해 주고 나서) “어떤 정수를 x라고 하면 x 다음에 오는 정수는 어떻게 쓸 수 있을까? x보다 하나 더 많은 정수를 어떻게 표현하면 될까?” 학생:(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예요.”
여기서 □에 들어간 답이 뭘까? 어른들이라면 아마도 ‘x+1’이라고 쉽게 답변하실 게다. 교사도 이런 답을 유도하기 위해 7 다음은 8이고, 7에서 8을 얻으려면 1을 더하면 된다는 결정적 힌트까지 학생들에게 흘려준 터다. 그런데 아이들이 내놓은 답은? 놀랍게도 ‘y’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교사가 준 힌트에 상관없이 ‘x 다음은 y’라고 자신있게 답한 것이다.
교육학에서는 이를 ‘토파즈 효과’라고 한다. 교사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에 100중 99를 가르쳐주고 나머지 하나만 아이에게 해 보라고 시킨 건데, 아이는 이걸 해내지 못한다. 왜냐? 처음부터 아이가 스스로의 사고로 깨우쳤어야 하는 걸 교사가 친절하게 다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걸 ‘암죽식 수업’이라 비꼬기도 한다. 아이가 혹시나 학습 내용을 소화하지 못할까봐 환자나 먹어야 할 암죽을 아이에게 일일이 떠먹이고 있으니까. 이런 일이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식의 교육이 뭐가 문제인지는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은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이 성장단계마다 부딪치는 고민들에 대해 짚어보자. 먼저 영유아 단계. 나는 유치원 다니는 아이 부모님들로부터 “우리 아이 수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가장 괴롭다. 어떻게 가르치긴, 단도직입으로 말해 영유아 단계에서는 수학을 가르치면 안된다.
4~5살짜리에게 위 그림처럼 놓인 단추 8개와 5원짜리 동전 2개를 보여주고 ‘어떤 게 더 많을까?’라고 물어보면, 아이들은 아래쪽 동전이 더 많다고 응답한다. 폭과 개수라는 개념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탓이다. 만원짜리 한 장 대신 천원짜리 두 장을 택하는 게 아이들의 숫자 개념 아닌가.
그런데 이런 아이들에게 숫자를 학습으로 가르친다면? 지난 2013년 <경향신문>이 ‘영유아 병드는 사교육’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아이들, 호기심이 사라졌다”는 기사를 게재한 일이 있는데, 여기 나온 전문가들 지적이 그랬다. 영유아기에 영어·수학·한자 학습 같은 걸 하게 되면 아이들의 뇌 발달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거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이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이었다. 창의력과 상상력은 통합적인 교육 속에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경험을 쌓으며 발달하는 것인데, 과목별 칸막이를 하는 순간 이것들이 틀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었다. 곧 아이가 한글을 배우거나 숫자를 익히게 되면 여기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미지로 상상하고 통합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학교 안간 아이에게 절대 ‘1’이라는 숫자를 쓰게 하지 마시라. 아이는 ‘1’을 쓰는 순간 망하기 시작한다. 대신 부모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숫자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하나 둘 셋 넷’ 하면서 개수 세는 훈련 정도만 하게 하면 된다.
연산에 익숙해진 머리의 특징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여러 차례 고비가 있을 것이다. 그중 최대 고비는 누가 뭐래도 연산의 고비다. 연산은 정말 중요한 교육이다. 그러나 부모들이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다. 연산은 빨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확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하나를 풀어도 정확히 풀어야 한다. 그러려면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초등 2학년이 되면 덧셈에서 곱셈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때 사고의 점프가 일어난다. 그 전까지 마트에 가면 물건 개수를 일일이 세던 아이가 어느 순간 “물통이 4개씩 8줄로 놓여 있으니까 ‘4×8=32’ 해서 모두 32개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아이들이 곱셈 개념을 충분히 익히기에 앞서 구구단부터 외워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변 길이가 6cm인 팔각형을 보여주고 전체 변의 길이를 구하라면 변마다 6cm라고 쓴 뒤 이를 전부 더하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6×8’ 하면 자동으로 ‘48’이 튀어나오지만, 정작 곱셈 개념이 없다 보니 팔각형 변의 길이를 구할 때 이를 응용하지는 못하는 셈이다.
“그래도 연산이 느리면 점수가 안나와요”라고 호소하는 부모들도 있다. 그럴 만하다. 초등학교 1~4학년 과정에서는 연산 비중이 50%에 달하니까. 그렇지만 점수 압박에 밀려 분초를 재가며 아이를 압박하는 일은 하지 마시라. 아이가 개념을 익히지 못했다면 오히려 ‘연산시험은 과감히 틀리자’는 식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연산학습지로 아이를 내모는 일도 없어야 한다. 연산학습지에 진입하는 순간 여기서 빠져 나오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이를 왜 그렇게 놔두느냐”며 엄마가 비난받게 돼 있으니까. 차라리 연산 훈련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시면 에듀넷이나 EBS를 활용하시라.
연산 속도는 개념의 힘으로 커버해야지 연산 훈련으로 커버해서는 안된다. 훈련을 하다 보면 연산 속도는 확실히 빨리진다. 그렇지만 훈련을 자꾸 하다 보면 사고력이 줄어든다는 걸 아셔야 한다. 자칫 하다가는 사고 안하는 인간이 된다.
예를 들어 운전면허를 처음 딴 사람은 매사에 조심하며 운전을 한다. 반면 운전에 숙달된 사람은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운전을 한다. 머리를 쓰지 않는 것이다. 연산에 익숙해지면 이런 상태가 된다. 운전은 무의식으로 해도 된다. 하지만 수학은 그러면 안된다. 순간순간 머리를 회전시키며 사고를 해야 한다.
수학교재 중 돌출 연산학습 교재라는 게 있다. 덧셈을 시키다 말고 갑자기 뺄셈, 곱셈을 막 섞어 시키는 방식이다. 이걸 하다 갑자기 저걸 하는 식으로 돌출 연산을 하다 보면 사고가 확확 바뀐다. 계속 머리를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연산학습지는 대부분 한 가지 개념이 나오면 그걸로 전부 도배를 하는 식이다. 똑같은 작업을 단순하고 지루하게 반복하는 식의 연산학습은 머리를 나쁘게 할 뿐이다. 한 마디로 시간낭비다. 나아가 이로 인해 아이들은 수학을 아주 지루한 과목, 쓸데없는 과목으로 여기게 된다.
이런 식의 연산 훈련은 아이에게 여러 모로 득될 것이 없다. 딱 한 가지, 학교시험 성적은 그런대로 잘 나올 것이다. 그러나 한 달만 지나면 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것들은 머릿속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초등학교 3학년쯤 두 번째로 맞닥뜨리게 될 고비는 분수와 나눗셈이다. 5학년 때는 넓이와 부피, 6학년 때는 비와 비율이 새로운 고비로 등장한다. 이때마다 각각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해야지 공식을 외워 문제를 풀려 했다가는 ‘저질공부’를 하게 돼 있다.
무슨 얘기냐고? 초3아이를 둔 한 학부모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애가 분수하고 나눗셈이 같은 거냐고 물어요.” 교과서 어디를 뒤져봐도 분수와 나눗셈이 같다는 말은 없다. 그런데 아이는 왜 이렇게 생각한 걸까? 문제를 하나 보자.
3명이 풍선 21개를 나눠 가지면 한 명이 몇 개를 가집니까?
문제 푸셨나? 다음 문제도 한번 보자.
3명이 풍선 21개를 똑같이 나눠 가지면 한 명이 몇 개를 가집니까?
차이를 이해하셨나? 아랫문제 답은 당연히 7개다. 반면 위의 문제 답은 1개일 수도, 7개일 수도 있다. 그냥 나눴다는 거지 똑같이 나눈 게 아니니까. 이렇게 ‘똑같이’라는 말을 써주고 나눌 때만 나눗셈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나눗셈은 그냥 나누는 게 아니고 똑같이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개념이 연산 훈련을 하는 순간 사라진다. 그래서 문제를 받아드는 순간 ‘21÷3’부터 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면 ‘213-97’ 같은 문제는 아이들이 척척 푼다. 그런데 ‘전교생이 213명인 학교에서 여학생을 전부 강당에 모이게 했더니 97명일 때 남학생은 모두 몇 명일까?’ 같은 문제는 버거워 한다.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문제를 먼저 푼 뒤 전자의 문제처럼 연산 훈련을 하게 해야 한다. 후자의 문제를 푸는 아이가 전자의 문제를 풀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한다. 먼저 연산 훈련부터 시키고 그 다음에야 활용문제라면서 후자 유형의 문제를 풀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연산을 훈련하는 목적 자체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일텐데 정반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5, 6학년 수학이 극히 중요한 까닭
개념이 잡히지 않으면 맥락도 흔들린다. ‘20명이 빵 10개를 똑같이 나눠 가지면 몇 개를 갖게 됩니까?’라는 문제를 받아든 순간 아이들은 기계적으로 ‘20÷10=2’를 하고 있다. 답은 ‘10÷20’ 곧 빵 반 개씩인데도 말이다. 이러니 수학은 연산 훈련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차분한 주의력을 갖고 개념을 계속 고민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맞닥뜨리는 넓이와 부피도 마찬가지다. 넓이와 부피는 계산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넓이와 부피의 개념이 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고등학교에 올라가 제대로 적분을 할 수 있다. 적분은 곧 넓이를 구하는 것이니까. 그런데도 우리 아이들은 넓이를 구한답시고 넓이 구하는 공식에 대입해 열심히 곱셈, 나눗셈 훈련만 수백번씩 하고 있다. 5학년짜리가 2,3학년 수준의 저질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배우는 비와 비율도 마찬가지다. 비율을 알아야 나중에 미분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넓이·부피와 더불어 비와 비율은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 전체를 지배한다. 이들 개념을 정확히 이해해야 중고등학교 수학을 순조롭게 소화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조금은 느긋했던 부모도 5,6학년이 되면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중학생 되면 수학 성적이 30점은 떨어진대. 그냥 놔뒀다가는 큰일 나” 하는 옆집엄마 말에 흔들려 어느새 중학교 과정을 선행하는 학원으로 아이를 내몰면서 아이 가방에 중학교 교재를 집어넣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당연히 5학년 학교공부보다 중학 선행과정 학원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엄마부터 “학원 가서 열심히 해야 해”라고 독려하고 나선다. 그런데 이때 넓이와 부피, 비와 비율 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채 중학교 공부로 넘어가게 되면 그 뒤 고등학교 공부까지는 다 날려 버리게 되는 거다.
그래서 난 부모들을 만날 때마다 “5, 6학년만큼은 절대 선행시키지 마세요”라고 부탁드린다. “그렇게 중학교 선행학습을 시키고 싶으면 차라리 4학년 때 시키세요”라고 극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3~4학년 때는 별볼일 없는 개념을 배울 때니 문제가 덜하지만, 5~6학년 때 개념을 다지는 복습을 소홀히 했다가는 중학교 이후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신세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수학에서 개념이 중요하다는 건 사실 상식적인 얘기다. 나도 이 얘길 교단에 선 이래 30년 가까이 해 왔다. 그럼에도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격적으로 깨닫게 된 것은 교육운동을 하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직접 학생·학부모를 만나며 수포자 문제를 다루게 되면서다. 내가 이 단체에서 맨 처음 만난 아이들이 중학생이었는데, 가만 보니 이 아이들이 저마다 상처를 안고 있었다. 문제 하나를 못풀 때마다 그 상처가 더 커지는 듯했다.
특히 중2쯤 되면 상처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적으로 수학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쌓아오다 중학교 들어와 갑자기 수학문제가 어려워지고 부모도 더는 어떻게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게 분노로 폭발하곤 했던 것이다. “너는 초등학교 때 수학 100점도 많이 받았대며?”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이렇게 답하곤 했다. “그러면 뭐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이 싫었어요.”
사실 중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수학 평균점수가 대부분 하락한다. 웬만하면 모든 과목별 평균 점수를 80점 이상으로 맞춰주는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에서는 한 반의 절반 이상이 수학점수를 50점 이하로 받는 일도 흔하게 벌어진다. 중간고사 끝난 4월말이면 그래서 아이들 사이에 곡소리가 난다.
부모나 아이가 무너지는 것도 이때다. 초등학교 때 사교육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던 아이들도 이때가 되면 사교육을 찾아가곤 한다. 처음에는 이게 제법 효과적인 것 같아 보인다. 시험점수가 잘 오르니까.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아이의 공부방법이 점차 이상해진다는 것이다. 개념은 뒷전이고 일단 공식과 정답풀이를 외우려 한다. 학원교육은 기본적으로 점수를 올려야 하기에 이걸 외우게 하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고등학교에 가면 최종적으로 무너지게 돼 있다. 중학교 때 학원을 다니며 반짝 점수를 올렸더라도 고등학교에 가서 수포자로 전락하는 아이들이 속출한다.
부모의 불안은 아이에게 전염된다
개념이 중요한 것은 그래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수학 공부에서는 개념이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제를 푸는 것은 그 다음이다. 문제를 푸는 순간 아이의 집중력은 개념 대신 문제로 넘어가 버린다. 가로변이 7cm이고 세로변이 5cm인 직사각형 넓이는 ‘7cm×5cm=35cm’라고 계산해 버리기 전에 왜 넓이를 구하는데 가로와 세로를 곱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냐고? 고등학교에서 적분을 배울 때까지 해야 한다. 이로써 아이들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나본 아이들의 경우 문제를 못 풀면 상처가 생기는 것 같더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는 최근 뇌과학 연구를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시카고대 리언스 교수팀이 수학 시험을 볼 때 울렁증이 심한 학생들의 뇌를 MRI로 촬영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이 학생들은 수학 시험 보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뇌의 통증회로가 활성화됐다고 한다.
또 한 가지 내가 발견한 것은, 특정 문제를 못푼 아이들의 경우 한 달 뒤 다시 똑같은 문제가 주어져도 풀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를 함부로 풀어서는 안된다. 문제를 풀 때는 반드시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뒤 풀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개념을 익혀 준비를 철저하게 한 뒤 문제풀기를 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복습이 중요하다. 개념은 예습․선행으로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학교에서 그날그날 배운 것을 충분히 소화하고 나서 문제를 풀어야 이를 못풀 가능성이 줄어들고, 상처도 줄어든다.
그러니 초등학생 자녀에게 “문제 풀어!”라고 하기 전에 “너 그 문제를 풀 준비가 됐니?”라고 물으시라. 약수 풀이 훈련을 시키기 전에 “약수가 뭐야?”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이가 이에 대해 뭐라 답하면 “그건 왜 그러는데?” 하고 다시 물으시라. 이렇게 말싸움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음과 답변이 이어질 때 아이는 개념을 차츰 자기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아이가 자꾸 엄마한테 잘 모르겠다고, 답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상담해 오는 분들도 있던데 걱정하실 필요 없다. 모른다고 답변하시면 된다. 어설프게 아느니 모르는 게 훨씬 낫다. 이렇게 모른다는 입장을 관철하면 아이가 ‘엄마는 믿을 수가 없겠구나’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독립심과 책임감을 키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부모가 지지와 격려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얘는 수학머리가 아닌가 봐’ 하면서 지레 아이 능력을 낮춰보거나 ‘나를 닮아서 그러나?’ 하면서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 없다. ‘우리아이가 언젠가는 수학을 잘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시라. 단, 전제는 반드시 복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이라면 하루에 교과서 2장 정도는 충분히 복습할 수 있다. 그것도 일주일 내내 복습하라는 게 아니다. 7일중 3일은 놀아도 된다. 나머지 나흘만이라도 복습하는 습관을 들여주시면 된다.
복습은 학원을 다니면서 병행하기 어렵다. 복습만 제대로 하면 학원 다니는 아이보다 우리 아이가 훨씬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시라. ‘우리 아이는 학원을 안다녀 불안해’ 이런 생각은 품는 것조차 금물이다. 부모의 생각은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기계와 사람은 어디서 다른가
나도 아이들의 상처를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머릿속에 온통 수학문제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빨리 풀어 아이들 앞에서 멋있게 보여야지’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수학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이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지금의 나는 부모와 교사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지금 가르치는 게 수학 맞습니까?”라고. 같은 제목으로 책도 썼다(<지금 가르치는 게 수학 맞습니까?>, 비아북 펴냄)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묻고 싶다. “지금 네가 공부하는 게 수학 맞니?”라고.
세상에는 두 가지 학습 형태가 있다고 한다. 개념 학습과 공식적 암기 학습. 수학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기 전에 문제를 풀게 되면 그 학습 방법은 절차적 방법(공식적 암기 학습)이 될 것이다. 절차적 방법에 의한 학습법은 이후에 이어지는 의미있는 학습 곧 개념적인 학습(개념 학습)을 방해할 가능성이 크다고 로버트 애쉬록은 말한다.
내가 고민해서 내린 결론도 이와 같다. 지금의 수학공부에는 오직 결과와 정답밖에 없다. 이걸 구하겠다고 말도 안되는 공부를 시키면서, 이걸 잘 따라오는 아이가 수학공부를 잘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가 나오기 어렵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쳐 본 결과, 간단한 것이라도 자기 손으로 개념을 만들어내고 연결시켜 본 아이들은 그 지적 성취감이 대단했다. 한번 이런 성취감을 맛보고 나면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문제집을 사서 스스로 풀곤 한다.
외워가지고 뭔가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건 이미 모두가 아실 것이다. 외우는 건 기계가 할 일이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사람은 개념이 있어야 하고, 개념을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능력을 키우는 것이 수학 공부다. 뭔가를 만들어 내면 이를 연결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 또한 수학을 통해 가장 잘 키울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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