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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일심과 화쟁사상

후암동남산 2021. 1. 10. 11:21

원효

[ ]

요약 신라의 승려로 일심()과 화쟁() 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수많은 저술을 남겨 불교 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원효대사 초상

출생-사망별칭활동분야주요저서

617 ~ 686.3.30
아명 설서당 ·설신당, 소성거사 ·복성거사
종교
《대혜도경종요》《법화경종요》

목차

  1. 저술
  2. 일심사상과 화쟁사상

속성()은 설(), 아명()은 서당()·신당()이다. 법명()은 스스로 원효()라고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새로 빛나게 한다는 뜻이며 당시 사람들은 ‘새벽[]’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617년(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쪽 율곡()에서 태어났으며, 조부는 잉피공(, 이라고도 함)이고, 아버지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11위 내마()의 지위에 있던 담날()이다. 설총()을 낳은 뒤에 스스로 소성거사()·복성거사()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고려 숙종 때(1101년)에는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국 불교 사상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여 해동보살(), 해동종주()라고도 불린다.

15세 무렵에 집안의 재산을 희사()하고 출가하여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곁에 사라사()를 세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낭지()와 혜공() 등의 고승에게 불법을 배웠다고 전해지며, 완산주()에 머무르며 열반종()을 강론하던 고구려의 승려 보덕()에게 열반경()과 유마경() 등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특별하게 한 명의 스승을 정해 놓고 배우지는 않았으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648년(진덕여왕 2년)에는 황룡사()에서 불경을 연구하며 수도하였다.

650년 의상()과 함께 현장()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당() 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에서 첩자()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였다. 661년(문무왕 원년)에 다시 의상과 함께 당 나라로 떠나려 하였으나, 배를 타러 당항성(,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으로 가던 길에서 진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왔다. 밤에 오래된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뒤 분황사() 등에 머무르며 불경의 연구와 <화엄경소()> 등의 저술에 힘쓰기도 하였으나,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뒤에는 스스로 소성거사(), 복성거사()라고 칭하며 서민 속으로 들어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으로 도구를 만들어 이를 ‘무애()’라 하였다. 무애()는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 )’는 화엄경()의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각지를 떠돌며 불교의 교리를 쉬운 노래로 만들어 전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를 이룰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원효의 활동으로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외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만년에는 경주의 고선사()에 머무르다가,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신라 애장왕() 때에 그의 후손인 설중업()이 당시 실권자였던 각간() 김언승(, 뒷날의 헌덕왕)의 후원으로 고선사()에 서당화상비()를 세웠다. 이 비석은 오늘날에도 일부가 훼손되어 전해지는데, 원효의 전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고려 명종() 때에도 분황사에 화쟁국사비()를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원효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서당화상비’ 이외에 중국의 송() 나라 때에 찬녕()이 편찬한 <송고승전()> 등에도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원효불기()’ 이외에 ‘낭지승운보현수()’, ‘사복불언()’, ‘의상전교()’, ‘이혜동진()’,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調), ‘광덕엄장()’ 조() 등에 원효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저술

원효는 불교를 널리 보급하는 한편, 불교 경전의 연구에도 힘을 기울여 당시 전해진 거의 모든 경론()들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원효가 남긴 저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모두 100여종 240여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가운데 일부만 전해진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저술은 <금강삼매경론()>, <기신론별기()>, <대승기신론소()>, <대승육정참회()> 등이 있고, 이 중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은 중국의 고승들도 ‘해동소()’라 칭하며 즐겨 인용되었다. 특히 <금강삼매경론>은 원효가 <금강삼매경>에 대해 주석을 한 것으로, <삼국유사>에도 ‘삼매경소()’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심사상과 화쟁사상

원효의 사상의 핵심은 ‘일심()’과 ‘화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도는 모든 존재에 미치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대승기신론소)'며 만물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삶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종파들의 서로 다른 이론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을 좀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것을 ‘화쟁사상()’ 또는 ‘원융회통사상()’이라고 한다.

‘일심()’은 원효 사상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원효는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마음의 근원이 바로 ‘일심()’이다. 원효에 따르면 일심은 모든 법(), 즉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거이며, 일심이 구현된 세계가 바로 정토()이다. 일심은 평등하고 무차별하며, 일심에서 보면 진여()와 생멸()이 다르지 않다. 따라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다는 것은 일체의 차별을 없애고,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치고, 차별 없이 사랑하는 자비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다스리는 중생은 반드시 큰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열반경종요)

‘화쟁()’은 다양한 불교 이론들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여러 불교 이론들이 서로 다투어서 쟁론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집착 때문이라며, 마음의 근원을 향하면 쟁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심’과 ‘화쟁’을 강조한 원효의 사상은 당시 중국 불교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중관론()과 유식론()의 대립을 독창적으로 종합하는 의미를 지녔다. 원효는 발생과 소멸이 없는 진여()와 상대적이고 현상적인 생멸()이 모두 일심()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며, 이것들이 하나이면서도 둘이며 둘이면서도 하나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연기()’를 중심으로 하는 중관론과 ‘마음의 본체인 식()을 떠나서는 어떠한 실재()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청정한 마음을 강조하는 유식론의 대립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원효의 사상은 중국의 법장()과 징관()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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