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원통불법 요체
법문 듣기 (10:41) ☞ 제3절 우주론(宇宙論) 1. 서문(序文) 제가 이렇게 금강심론(金剛心論)을 말씀 드리니까 ‘자기가 받드는 스승이니까 치켜세우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런지 모르지마는 저는 이미 황혼이 짙은 수행자의 분상에서 그 정도로 속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과학과 불교와의 관계 설정은 우리 불교인들에게 필수적인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굳이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머리말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금타 화상의 우주론(宇宙論)의 서문이 있습니다. 금타 화상(金陀和尙)께서 저술한 바, 미증유(未曾有)한 파천황(破天荒)의 우주론은 단순한 사변적(思辯的)인 소산이 아닐 뿐 아니라, 경험 과학적인 시도와는 그 차원을 달리한 순수 직관적인 현묘(玄妙)한 선정(禪定)을 통한 통찰이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 현행 천문학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은 도리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현대천문학 또한 아직도 암중모색(暗中摸索)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니, 설사 금타 스님의 천문설이 하나의 가설(假說)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너무나 거창하고 합리적인 체계를 어느 뉘라서 감히 부정할 수가 있을 것인가? 또한, 화상의 우주론은 어디까지나 불설(佛說)에 그 근저(根抵)를 두었으며, 불교 우주관인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곧 10억 우주에 관한 초유(初有)의 체계화임을 감안할 때, 참으로 귀중한 불교 문헌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특히 불교인으로서는 불교 우주관에 대한 깊은 고려없이 다만 일지반해(一知半解)한 천문상식만으로 천박한 비판을 함부로 한다면, 도리어 방불훼법(謗佛毁法)의 허물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화상의 우주론이 저으기 난해한 것은 천문학 본래의 성격상 어쩔 수 없을 뿐 아니라, 본 저술이 구체적인 주해(註解)가 없는 원리(原理)만의 논술하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니, 모름지기 진지한 구도인(求道人)의 자세로 숙독(熟讀) 음미한다면, 반드시 귀중한 조도(助道)의 자량(資糧)이 될 것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序 文 (서문) 一微(일미)를 誤見(오견)하면 妄想(망상)이 되고, 正見(정견)하면 眞覺(진각)이 된다. 一切(일체) 萬事(만사)가 自己(자기)의 見解(견해)에 依(의)하여 眞妄(진망)이 揀別(간별)될 뿐, 一微(일미)나 一切(일체)에 本來(본래) 眞妄(진망)이 없으며 器世間(기세간:現象界<현상계>) 이대로가 一眞法界(일진법계)로서 一切衆生(일체중생)이 一佛(일불)의 化身(화신)이며, 個別的(개별적) 化身(화신)이 바로 本身(본신)의 佛(불)임을 忘却(망각)하고, 顚倒妄想(전도망상)하여 迷惑人(미혹인)이 되고 스스로 凡夫(범부)라 이름하나 一大人(일대인)에게는 聖凡(성범)이 없다. “만약 사람이 三世(삼세)의 一切(일체)가 佛(불)임을 了知(요지)하고자 하면, 마땅히 法界性(법계성)을 觀(관)할지니, 一切(일체)가 唯心(유심)의 所造(소조)니라.”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함은 華嚴偈(화엄게)이다. 法界性(법계성)을 見(견)하고 그 以下(이하)는 色法(색법)으로써 全揀(전간)하며, 以上(이상)은 心法(심법)으로 全收(전수)하니, 色卽是空(색즉시공)이요 空卽是色(공즉시색)이라, 空(공)이란 色碍(색애)가 없는 不但空(부단공)인 眞空(진공)을 말하며, 色(색)이란 質碍(질애)이면서 그림자와 같이 眞空醴(진공예)의 妙用(묘용)인 假相(가상)을 말하므로, 卽體(즉체) 卽用(즉용)으로서 性(성)ㆍ相(상)이 一如(일여)이며, 卽心卽佛(즉심즉불)이므로, 三世(삼세) 一切(일체)가 普賢境(보현경)이다. 그러나, 迷惑人(미혹인)은 大日心體(대일심체)가 質碍的(질애적) 그림자에 가리워, 眞智(진지)의 證明(증명)이 없이 妄見(망견)을 세워서 眞理(진리)라고 생각하며, 主客(주객)이 顚倒(전도)한 事實(사실)마저 否認(부인)한다. 이에 몇 가지 例(예)를 들면, 熱(열)이 地輪界(지륜계:地球<지구>와 地球<지구>의 半徑<반경>을 倍增<배증>한 球狀<구상>의 虛空身<허공신>을 云<운>함) 自身(자신)의 熱(열)임을 모르고, 熱源(열원)이 太陽(태양)에 있다고 하며, 光明(광명) 또한 地球(지구) 自我(자아)의 光明(광명)임을 모르고 太陽(태양)이 光源(광원)이라 한다. 그리고, 月(월)은 太陽(태양)의 反映體(반영체)라 한다. 그러나, 輓近(만근) 飛行術(비행술)이 發達(발달)하자, 태양을 향하여 上昇(상승)할수록 冷氣(냉기)가 다가오고, 또한 어둠을 느끼며, 달밤에는 溫氣(온기)가 느껴지는 事實(사실)은 무슨 理由(이유)인가? 또는 月(월)의 上弦(상현)과 下弦(하현)이 地球(지구)의 그림자에 가리운 表徵(표징)이라 하는데 과연 의문이 없을 것인가? 現代(현대) 科學(과학) 文明(문명)을 자랑하면서, 아직도 銀河水(은하수)가 무엇임을 分明(분명)히 알지 못하며, 日月星宿(일월성수)가 어째서 虛空(허공)에 浮遊(부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左轉(좌전) 또는 右轉(우전)하지 아니치 못할 理由(이유)가 那邊(나변)에 있는지, 이에 對(대)한 解明(해명)이 曖昧(애매)하며, 曆年一時(역년일시)가 365日과 6時 未滿(미만)임을 經驗(경험)하면서, 太陽(태양)과 地球(지구)의 距離(거리)와는 無關(무관)한 事實(사실)이라 생각하고, 굳이 地球(지구) 半徑(반경)의 23440倍(배)라 말하며, 빛(光)이 太陽(태양)에서 地球(지구)까지 旅行(여행)하는데, 8分(분) 20秒(초) 걸린다고 한다. 아무튼 數字(수자)는 形式科學(형식과학)에 屬(속)하나 要(요)는 主觀點(주관점)이 어디에 있느냐가 問題(문제)이다. 二十世紀(20세기) 文明(문명)이 여지껏 宇宙(우주)를 解剖(해부)하지 못하며, 肉眼(육안)의 實性(실성)을 回復(회복)한 天眼(천안)에 依(의)해서만 發見(발견)할 수 있는, 陽核(양핵)의 七分一(칠분일)에 該當(해당)하는 金塵(금진), 곧 原子核(원자핵)의 本質(본질)을 分析科學(분석과학)에 依(의)하여 發見(발견)하려고 虛勞(허노)를 費(비)함은, 正眼(정안)이 있는 者(자) 입을 삼가하고 있을 수 없으니, 正見(정견) 있는 人士(인사)는 채찍을 들고 일어서라! 그리고 聖人(성인)들이 認定(인정)한 바, 長久(장구)한 歲月(세월)을 두고, 뼈가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된 精神文明(정신문명)을 登場(등장)시켜라! 本說(본설) 宇宙(우주)의 本質(본질:法界性<법계성>) 形量(형량:行相)인 片言(편언) 隻句(척구)가 萬(만)에 一(일)이라도 正道(정도)를 指示(지시)하는 助道的(조도적) 資糧(자량)이 될 수 있다면, 幸甚(행심)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本說(본설)을 六節(6절)로 大別(대별)하고 百項(백항)으로 小分(소분)하였으나, 一貫(일관)된 道理(도리)로 始終(시종)하였으며, 더욱이 胎藏界(태장계)의 數値(수치)로써 一律的(일률적)으로 計算(계산)한 數字(수자)이므로, 百(백) 中(중) 其(기) 一(일)을 認定(인정)할 때, 百(백)을 또한 否認(부인)할 수 없을 것이므로, 贅言(췌언)이면서 이를 附言(부언)하는 바이다. 壬午(1942)年 6月 9日 於 井邑 內藏山.碧蓮禪院 釋 金 陀 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