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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데카랏타게 ( 跋地羅帝偈)"현선일야의 계"

후암동남산 2011. 10. 30. 11:41

바데카랏타게 ( 跋地羅帝偈)

 

 

부디 과거를 생각지 말고

또한 미래를 원하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멸했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나니

 

현재에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나니

어느 것도 단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라.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아느니라.

 

만일 성인의 행을 행하는 이라면

누가 죽음의 근심을 근심하리

나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않으리니

큰 고통. 재앙은 여기서 끝나리라.

 

이와 같이 꾸준히 힘써 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게으르지 말지니

그러므로 이 바데카랏타게를

언제나 마땅히 설해야 하느니라.

 

 

  

먼저 중부경전(Majjhima-nikaya)의 제131경 일야현선경(一夜賢善經, Bhaddekaratta-sutta)에 나오는 게송의 전문을 한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과거를 좇지 말고,
미래를 원치 말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법을
그때 그때 관찰하고
초조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를 요달해 알아 닦고 익혀라.
다만 오늘의 할 일을 열심히 하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리요.
진실로 저 죽음의 대군과
만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와 같이 살며,
열심히 밤낮으로 태만하지 않는 자,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一夜賢者ㆍ寂靜者ㆍ寂默者라고 부른다.

 

이 팔리경전에 대응하는 한역 중아함경 제43권 {온천림천경(溫泉林天經)}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막념과거(愼莫念過去) 부디 과거를 생각지 말고,
역물원미래(亦勿願未來) 또한 미래를 원하지 말라.
과거사이멸(過去事已滅) 과거의 일은 이미 멸했고,
미래복미지(未來復未至)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현재소유법(現在所有法) 현재에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피역당위사(彼亦當爲思)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나니
염무유견강(念無有堅强) 어느것도 단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라.
혜자각여시(慧者覺如是)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아느니라.

약작성인행(若作聖人行) 만일 성인의 행을 행하는 이라면
숙지수어사(熟知愁於死) 누가 죽음에 대해 근심하리
아요불회피(我要不會彼) 나는 결코 그것을 만나지 않으리니.
대고재환종(大苦災患終) 큰 고통ㆍ재앙은 여기서 끝나리라.

여시행정근(如是行精勤) 이와 같이 꾸준히 힘써 행하여
주야무해태(晝夜無懈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게으르지 말지니
시고상당설(是故常當說) 그러므로 이 바데카랏타게를
발지라제게(跋地羅帝偈) 언제나 마땅히 설해야 하느니라.

 

위 한역 게송의 마지막 구절 '발지라제게(跋地羅帝偈)'를 한글대장경에서는 '바데카랏타게'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런 번역으로는 원래의 뜻을 파악할 수가 없다. 팔리어 원문은 밧데까랏따(Bhaddekaratta)이다. 이 말은 세 단어의 합성어이다. 즉 Bhadda+eka+ratta이다. Bhadda[Sk. bhadra]는 길조의, 운좋은, 존엄한, 훌륭한, 길상(吉祥), 현선(賢善) 등의 뜻이고, eka는 하나[一]라는 의미이며, ratta는 밤, 야(夜)의 뜻이다. 따라서 밧데까랏따는 '길조의 하룻밤', '현선일야(賢善一夜)' 혹은 '일야현선(一夜賢善)'이라고 번역된다.

 

부처님께서 설한 이 현선일야의 게송을 비구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가전연(大迦?延, Mahakaccana) 존자가 다시 자세히 분석적으로 설명한 것이 경전에 수록되어 있다. 대가전연 존자의 해석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어떻게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실로 눈이 있어서 마음으로 좋아하는 빛깔을 보고는 빛깔을 사랑하는 욕심과 어울리는 마음이 생겨 그 근본을 움켜잡는데, 그 근본은 곧 과거인 것이오. 그는 과거를 알기 때문에 욕심에 염착(染着)하고 과거를 알아 욕심에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게 되며, 그것을 즐긴 뒤에는 곧 과거를 생각하게 되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오. …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오.

둘째, 어떻게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가. 비구는 실로 눈이 있어서 마음으로 좋아하는 빛깔을 보고는 빛깔을 사랑하는 욕심과 서로 어울리는 마음이 생겨 즐기고 그 근본을 움켜잡는데, 그 근본은 곧 과거인 것이오. 그는 과거를 알고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으며, 과거를 알고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지 않고, 그것을 즐기지 않은 뒤에는 곧 과거를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오. …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오.

 

셋째, 어떻게 비구는 미래를 원하는가. 비구가 만일 눈과 빛깔과 눈의 식(識)이 있어서, 그는 미래를 아직 얻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얻고자 하여 마음으로 원하게 되고, 마음으로 원함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게 되며, 그것을 즐긴 뒤에는 곧 미래를 원하게 되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미래를 원하는 것이오.

넷째, 어떻게 비구는 미래를 원하지 않는가. 비구가 만일 눈과 빛깔과 눈의 식이 있어서, 그는 미래를 얻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얻으려고 마음으로 원하지 않고, 마음으로 원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지 않게 되며, 그것을 즐기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미래를 원하지 않게 되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오. 비구는 이와 같이 미래를 원하지 않는 것이오.

 

다섯째, 어떻게 비구는 현재의 법에 집착하는가. 비구가 만일 눈과 빛깔과 눈의 식이 있어서 그는 현재를 알기 때문에 욕심에 염착하고, 현재를 알아 욕심에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게 되며, 그것을 즐긴 뒤에는 곧 현재의 법에 집착하게 되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오. 비구는 이와 같이 현재의 법에 집착하는 것이오.

여섯째, 어떻게 비구는 현재의 법에 집착하지 않는가. 비구가 만일 눈과 빛깔과 눈의 식이 있어서, 그는 현재를 알더라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고 현재를 알고도 욕심에 염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곧 그것을 즐기지 않게 되며, 그것을 즐기지 않은 뒤에는 곧 현재의 법에 집착하지 않데 되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오. 비구는 이와 같이 현재의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오.

 

이와 같이 가전연이 동료 비구들을 위해 자세히 설명하였다는 말을 세존께서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찬탄하시었다.

"착하고 착하다. 그는 내 제자 중에서 눈이 있고 지혜가 있으며, 법이 있고 이치가 있는 사람이다. 무슨 까닭인가.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이 이치를 간략히 말해 널리 분별하지 않은 것을 그 제자는 이런 글귀와 이런 글로써 그것을 널리 설명하였다. 가전연이 설명한 것과 같이 너희들은 마땅히 받아 가져라. 무슨 까닭인가. 이 관찰의 이치를 설명한 것이 응당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고 한다.

앞에서 인용한 팔리경전과 한역경전의 게송을 비교할 때 표현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 핵심 내용은 똑같다. 이 게송의 주제는 헛되이 과거를 추억하거나 미래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다만 현재의 한 순간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에 집착하라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가르침은 과거와 미래는 물론 현재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아(無我)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과거와 미래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하니까 현재의 바깥 경계[外境]에 집착하라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현재의 외경을 인식 경험하고 있는 경우에도,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경전에서는 경고하고 있다. 특히 {대의석(大義釋)}에서는 이에 대해 명쾌하게 해석하고 있다.

 

"눈으로 색을 보아도 탐할 것을 탐하지 않으며, 성낼 것을 성내지 않으며, 혼미한 데에 속지 않으며, 노여워할 것에 노여워하지 않으며, 더럽힐 것을 더럽히지 않으며, 교만히 할 것에 교만하지 않는다.

 

귀로 소리를 들어도, 코로 냄새를 맡아도, 혀로 맛을 느껴도, 몸으로 부딪치는 것에 닿아도, 의식으로 법을 인식해도 탐할 것을 탐하지 않으며, 성낼 것에 성내지 않으며, 혼미한 데에 속지 않으며, 노여워할 것에 노여워하지 않으며, 더럽힐 것을 더럽히지 않으며, 교만히 할 것에 교만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하고, 들리는 것은 들리는 대로 하고, 깨달아지는 것은 깨달아지는 대로 하며, 인식되는 것은 인식되는 대로 하여,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들리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깨달아지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인식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 무애자재(無碍自在)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 들리는 것, 깨달아지는 것, 인식되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 무애자재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

 

이러한 경지가 곧 깨달음을 이룬 선사(禪師)들의 삶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불교도들의 이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의 초심자는 우선 과거와 미래의 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권하는 바이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생활하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모든 집착과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불교도들이 바라는 이상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 그러면 생사에도 걸림이 없을 것이다.

 

마성스님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