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라는 시호 보다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유명한 한씨는 실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왕실여성이며, 여성 지식인이다. 조선 제9대왕 성종의 어머니이자,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의 할머니로서 더욱 유명한 인수대비는 시아버지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몸소 지켜보았고, 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 자리를 대신해 자신의 어린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들면서 대비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훈(內訓)]이라는 여성 교육서를 만든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청주 한씨 가문의 딸로 태어나다
인수대비 한씨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한확(韓確, 1403~1456)의 6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청주 한씨 가문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머니 홍씨는 그녀의 나이 13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인수대비의 집안 배경은 그녀가 왕실과 혼인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녀의 고모 2명이 명나라 황실의 후궁이었던 것이다. 부친인 한확은 순창군수 한영정의 아들로 그의 누이는 명나라 공녀로 갔다가 명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여비(麗妃)이다. 말하자면 인수대비 한씨의 큰고모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된 셈이다. 한영정의 맏딸이었던 여비는 사대부가의 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 공녀가 되었으나, 명 성조의 눈에 들어 후궁까지 된 여성이다. 여비는 1424년 성조가 죽자 순절(殉節- 충절이나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하였다고 전하는데, 실제로는 처형과 다름없는 자살이었다. 그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선종(宣宗) 또한 한영정의 막내딸 즉 한확의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삼았다. [세종실록]에 보면 당시 한확이 재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모가 뛰어난 여동생을 시집보내고 있지 않다가 명나라 황실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렴결백하고 뛰어난 인품의 소유자라 전해지지만,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평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양대군의 며느리가 되다
한확은 젊은 시절 누이의 후광을 업고 출세 가도를 달렸다. 명 황실과 인척이 된 한확은 명나라와 조선의 민감한 사안을 도맡아 담당하는 비중있는 인물로 성장하였고, 실제로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는 명 황제가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벼슬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특히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했을 때에는 조선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고명(誥命- 중국 황제가 주는 임명장)을 받아 오기도 했다.
조선 정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한확의 위치로 볼 때,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437년(세종 19)에 둘째 딸이 세종의 후궁 소생인 계양군(桂陽君)과 혼인하였고, 1455년(단종 3)에는 여섯째 딸(인수대비)이 수양대군의 아들 도원군(桃源君, 성종의 부친으로 덕종으로 추존됨)과 혼인하였다. 야망이 컸던 수양대군은 훗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명 황실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확과 사돈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한씨는 1455년(단종 3)에 19살의 나이로 수양대군의 맏아들인 도원군 장(暲, 1438-1457)과 혼인하여 군부인(郡夫人)이 되었다.
수양대군은 한확의 힘과 위상을 잘 이용했다. 한확은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계유정난(癸酉靖難)과 왕위찬탈이 성공하자 그를 비롯한 청주 한씨들이 대거 공신에 책봉되었다. 도원군 또한 의경세자로 책봉되었고 한씨도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수빈(粹嬪)이 되었다. 수빈 한씨가 된 그녀가 왕비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부친인 한확이 세자 책봉의 고명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한 것은 세자빈이 된 이듬해 일이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던 한확이었지만, 객사(客死)라는 불운을 피하지는 못했다. 수빈 한씨는 부친이자 막강한 정치적 후견인을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다.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이 일을 무사히 성공시킬 인물은 중국통인 한확밖에 없었다. 명나라가 세조의 왕위를 인정하는데 공헌을 세운 한확은 1456년(세조 2)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 조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사하포(沙河鋪)에 이르러 죽었다. 부음을 듣고 놀란 세조는 압록강으로 관리를 급파하여 그의 시신을 호송하였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한확은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들의 자식들을 거두어 키웠는데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키웠다고 한다.
부친의 사망에 이어 불운은 계속되었다. 수빈 한씨는 결혼 직후 맏아들 월산대군과 명숙공주를 낳았고, 이어서 1457년(세조 3)에 둘째 아들이자 훗날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을 출산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남편인 의경세자가 갑작스런 질병으로 사망하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불행이 찾아왔다. 이때 의경세자의 나이 20세였고, 한씨는 21세에 불과하였다. 두 날개였던 부친과 남편이 1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슬픔에 젖을 사이도 없이 그녀 앞에 닥친 현실은 왕비가 될 꿈을 접고 사가로 물러나야 하는 것이었다. 불과 2년 3개월 밖에 안된 세자빈 생활이었다. 남편이 죽지 않았더라면, 아니 부친이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최소한 세자 자리는 의경세자의 맏아들이자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에게 주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8살에 불과한 시동생 황(晄,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왕비가 되지 못한 세자빈
세자 시절 건강했던 예종은 부친인 세조의 병간호와 즉위 후 정무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 못했다. 죽어서 예종라는 시호를 받고 싶다는 말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종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예종의 아들이 어리자 정희왕후는 후계자를 빨리 정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독촉 속에 한씨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서열상 장남인 월산군이 왕위에 올랐어야 하나, 월산군은 병치레가 잦고 동생인 자을산군의 도량이 왕재감이라 하여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물론 기록에는 없지만, 장인인 한명회의 정치적 위상도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른 뒷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469년 11월 28일 자을산군, 즉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가에 머물던 한씨도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청상과부가 되어 궁궐을 떠난 지 12년만이었다. 정희왕후는 학식이 깊은 한씨에게 수렴청정을 수차례 양보하였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종의 치세 기간에 인수대비 한씨가 끼친 정치적 영향은 매우 컸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의경세자의 위호(位號- 벼슬의 등급 및 그 이름)와 어머니의 위상 문제가 대두되어 성종 1년에 의경세자의 시호를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하고, 수빈의 휘호를 인수왕비(仁粹王妃)로 하여 예종비와 인수왕비를 형제의 서열로 차서를 정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인수대비는 남편이 덕종(德宗)으로 추존됨에 따라 덕종비(德宗妃)가 되었다. 사실 인수대비는 생전의 존칭이었고, 죽어서는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지금까지 인수대비는 소혜왕후라는 시호 외에도 인수왕비, 인수왕대비, 덕종비, 회간왕비(懷簡王妃)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져 왔다.
여성 교육서 [내훈]의 편찬
어려서 부모와 남편을 잃은 탓에 인수대비는 불교에 심취하였고, 성종이 도첩제를 폐지하고 불교를 탄압하자 이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녀가 왕실 여성으로 그치지 않고 여성 지식인으로 각인되는 일을 실천한 것도 이 무렵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의 이념은 여성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여성에게 요구된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남편을 잘 섬기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었다. 여성에게 유교적인 덕목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일종의 교재가 필요했다. 왕실 어른으로서 늘어가는 왕실 여성들을 교육시켜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인수대비는 1475년(성종 6) 궁중의 비빈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내훈]의 서문을 보면 왜 인수대비가 이 책을 편찬하려 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나는 홀어미인지라 옥같은 마음의 며느리를 보고 싶구나. 이 때문에 [소학] [열녀] [여교] [명감] 등 지극히 적절하고 명백한 책이 있으나 복잡하고 권수가 많아 쉽게 알아 볼 수가 없다. 이에 이 책 가운데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뽑아 일곱장으로 만들어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인수대비는 이 책에서 부인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들어 이해도를 높이고 부부의 도리, 형제와 친척 간의 화목 등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유교 덕목을 실어 여성도 유교적 도리를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폐비 윤씨와의 악연
인수대비의 일생에 있어서 며느리 윤비(尹妃)와의 관계는 불행 중의 불행이었다. 높은 여성상을 목표로 한 인수대비에게 윤비는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였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그녀가 1474년 후사 없이 사망하는 바람에 연산군을 잉태한 후궁 윤씨가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인수대비 한씨와 왕비 윤씨는 물과 기름같이 섞일 수 없는 생각과 배경을 지닌 여성이었다. 인수대비에게 막강한 친정 세력이 있었다면, 윤비는 그렇지 못했다. 가난한 대간(臺諫) 집안 출신의 딸로서 그를 후원해 줄 부친도 없는 신세였다. 또한 유교적 부덕을 완벽하게 실천하고 강요했던 인수대비와 달리 윤비는 자유 분방하고 사랑을 중요시했다.
[내훈]의 저자 인수대비는 자신의 책에서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이를 그대로 실천했다. 유학적 소양을 갖춘 엄격한 성격의 인수대비는 윤비의 행동이 자신이 강조하는 [내훈]의 내용에 저촉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였다. 인수대비는 윤비의 폐출과 사사에 깊이 관여했고 이는 평탄하지 않은 불행한 노후를 예고한 것이었다.
성종 주변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윤비는 이를 참지 못했다. 성종이 엄귀인과 정귀인을 총애하자 윤비는 왕의 총애를 되찾고자 했다. 왕실 여성들 사이에는 이른바 압승(壓勝)이라 불리는 이른바 저주행위가 있었는데, 들키게 되면 큰 화가 되었다. 윤비의 처소에서 극약인 비상과 이를 바른 곶감이 발견되자 인수대비와 성종은 이 곶감이 왕과 후궁을 죽이려는 의도라 생각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과 다투면서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도 하나, 확실치는 않다.
결국 윤비는 왕비가 된지 8개월 만에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쫓겨났고,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아 결국 1482년(성종 13) 8월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대신들은 윤비의 폐비와 사사 문제를 원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인수대비 또한 폐비 윤씨가 살아 있으면 화근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윤호의 딸 파평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파평 윤씨는 대비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인수대비는 “이제 중궁다운 사람이 들어왔으니 낮이나 밤이나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며 기뻐했다.
며느리를 죽이면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인수대비의 판단은 오판이었다. 윤씨를 죽인 이듬해 인수대비는 정희왕후와 함께 온양을 갔는데, 여기서 정희왕후가 죽고, 성종 또한 재위 2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공론화 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