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수학사전

경문수학산책 1 수학의 위대한 순간들 (3)|

후암동남산 2012. 11. 30. 21:51

21. 무질서 속의 질서 : 수학적 확률론의 탄생(1654년)
확률에 대한 수학적 이론의 기초는 1654년에 파스칼(Pascal)과 페르마의 서신왕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두 수학자에 의하여 논의된 예시적인 경우는 ‘같은 정도의 기술을 가진 두 경기자 A와 B에 대하여 A가 승리하기 위하여는 2득점이 더 필요하고 B가 승리하기 위하여는 3득점이 더 필요한 경기에서 판돈을 분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페르마는 네 번 더 경기를 시행하면 경기의 결과가 결정되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A가 승리하는 경우를 a로 표시하고 B가 승리하는 경우를 b로 표시하여 a와 b를 네 개씩 선택하는 aaaa, aaab……bbba, bbbb의 16개의 가능한 수열을 고려하였다. 여기에서 a가 두 개 이상 포함되는 경우가 11번, b가 세 번 이상 포함되는 경우가 5번이므로 판돈은 A와 B에게 11:5의 비율로 분배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파스칼은 득점의 문제를 ‘산술삼각형(arithmetical triangle)’을 사용해서 해결하였으며, n개에서 동시에 r개를 택하는 조합의 수를 C(n,r)=n!/r!(n-r)!과 같이 정확하게 설명하였다. 파스칼과 페르마는 그 서신왕래에서 세 사람 이상의 경기자가 있는 경우와 두 경기자의 기술이 서로 다른 경우와 같은 다른 문제도 고려하였다. 네덜란드의 호이겐스(Huygens)는 확률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 논문을 썼다. 


22. 활동사진과 정지사진 : 미분학의 발견(1629∼1680년대)
곡선에 대한 접선을 그리는 문제와 최대값과 최소값을 찾는 문제가 미분법의 발견을 유도하였다. 미분법에 대한 최초의 예견은 페르마가 1629년에 설명한 발상에서 나타난다. 미분법을 예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다른 사람은 배로(Barrow)인데, 그의 1669년의 책 ‘광학과 기하학 강의(Lectiones opticae et geometricae)’에 현대적 미분과 매우 근접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일반적이고 실행가능한 미분법을 최초로 발표한 사람은 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라이프니츠(Leibniz)이다. 라이프니츠는 1684년에 ‘접선 및 최대값과 최소값을 찾는 새로운 방법, 이 방법은 분수 또는 무리수에 의하여 제약을 받지 않으며, 이것을 위한 뛰어난 계산법(A new method for maxma and minima as well as tangents, which is not restricted by frational or irrational quantities, and a remarkable type  of calculus for this)’이라는 제목으로 미분법의 간결한 해설을 발표하였다. 라이프니츠는 미분과 적분에 기호를 도입하였다.
그런데 미분학(differential calculus)의 발견에는 뉴턴(Newton)의 공도 있다.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미분학을 고안하기 이전인 1665년에 ‘유율학(fluxional calculus)’을 고안하였는데, 그 논문을 1687년까지 발표하지 않았다. 뉴턴은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고안한 방법을 설명하였으며, 라이프니츠는 답장에서 자신이 고안한 방법을 설명하였다. 이후에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미분학에 대한 우선권과 표절의 논쟁이 크게 일게 되었다.  


23. 문을 열고 닫는 것과 같이 : 미적분학의 기본정리(1669∼1690년대)
미적분학의 기본정리에 대한 최초의 증명은 배로의 공적이다. 배로는 ‘광학과 기하학 강의’에서 기하적 증명을 하였다. 그러나 배로의 기하적 취급은 난해하였다.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대수적 취급에 의하여 적분을 형식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도구로서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를 활용할 수 있었다. 형식적인 미분법칙으로부터 형식적인 적분법칙을 얻음으로써, 미분과 적분 사이의 역관계를 두 사람이 발견한 이후 미분법은 기초적 연산이고 적분법은 단순히 미분법의 역과정으로 간주되었다. 기본정리에 의하여 단순하게 된 미적분학의 영향은 수학 자체의 발전 뿐만 아니라 문명의 급속한 진보에도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이 새로운 도구는 그 이전에 수학자들이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많은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의 일반적 방법은 굽은 호의 길이, 임의적 곡선으로 둘러싸인 영역의 넓이, 모든 종류의 입체도형의 겉넓이와 부피, 난해한 최대화와 최소화의 문제, 변화율과 관계되는 것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문제, 접선, 법선, 점근선, 포락선, 곡률 등에 대한 기하학적 문제, 속도, 가속도, 일, 에너지, 힘, 압력, 무게, 중심, 관성, 중력 등에 대한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제는 미적분학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면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있게 되었다. 

 

24. 강력한 급수 : 테일러 급수(1715년)와 메클로린 급수(1742년)
‘수열(sequence)’은 어떠한 정해진 법칙이나 규칙에 의하여 형성되는 항들의 나열이며, ‘급수(series)’는 그 수열의 항들의 합이다. 거듭제곱 급수와 관련하여 무한번 미분가능한 함수∮(x)x-a에 관한 거듭제곱급수로 전개한 것은 1715년에 영국의 테일러(Taylor)가 쓴 ‘증분법(Methodus incrementorum dire cta et inversa)’에서 나타났으며, 이것을 x=a에 관한 ∮(x)의 ‘테일러 전개’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a=0인 경우의 x에 관한 거듭제곱 급수로 ∮(x)를 전개한 것은 1742년에 스코틀랜드의 맥클로린(Maclaurin)이 쓴 ‘유율론(Treaties of Fluxions)’에서 나타났으며, 이것을 ‘맥클로린 전개’로 부르게 되었다. 테일러 전개와 맥클로린 전개의 유용성은 미적분학을 배울 때 인식하게 된다. 삼각함수, 로그함수, 지수함수 등의 광범위한 수표는 바로 거듭제곱급수의 도움으로 계산된 것이다.

 

25. 예이+예이+예이+예이 : 푸리에 급수(1807년)
Yea는 도지(Dodge)가 푸리에 급수에 보낸 찬사이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공학자인 푸리에(Fourier)는 1807년에 열전도에 관한 기초적 논문을 과학원에서 발표하는 동안, 유계인 폐구간 위에 정의된 임의의 그래프를 가진 어떠한 함수도 순전히 사인 함수들과 코사인 함수들의 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더 명확하게 푸리에는 구간 (-π,π) 위에 정의된 임의의 함수가 아무리 변화가 심하더라도, 그 함수는 이 구간 위에서 급수 (수식 1)로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급수를 ‘삼각급수(trigonometric series)’라고 부른다.  
이 급수를 -π부터 π까지 항별로 적분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만약에 함수∮(x)를 삼각급수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일정한 급수의 계수들이 주어지는데, 이것을 ‘푸리에 계수(Fourier coefficient)’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푸리에는 구하고자 하는 함수의 주기가 무한대인 경우에 푸리에 급수의 극한으로서 ‘푸리에 적분(Fourier integral)’이라고 불리는 가장 뛰어나고 독창적인 발견에 도달하였다.

 

26. 기하학의 해방 Ⅰ :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1829년)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등장하게 된 발단은 유클리드의 ‘원론’에 있는 제5공준 곧 “한 직선이 두 직선과 만날 때 같은 쪽에 있는 내각들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으면, 두 직선을 무한히 연장하면 내각들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은 쪽에서 두 직선은 만난다.”는 평행선 공준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유래한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 기하학의 발달에 대한 중요한 자극은 유클리드 제5공준에 대한 비판의 부활이었다.

사케리(Saccheri)는 1733년에 출판된 ‘모든 오류로부터 해방된 유클리드(Euclides 뮤 omni naevo vindicatus)’에서 평행선 공준에 대한 놀라운 정리를 보였다. 스위스의 람베르트(Lambert)는 1776년에 출판된 ‘평행선 이론(Die Theorie der Parallellinien)’에서 사케리보다 많은 정리를 유도하였다. 유클리드의 평행선 공준을 귀납법을 사용해서 증명하려고 한 세 번째의 시도는 프랑스의 해석학자 르장드르(Legendre)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그가 평행선 공준을 증명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기하학 원론(Elements de geometrie)’에 나타나 있다. 

 

27. 기하학의 해방 Ⅱ :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1829년 ∼ 계속)
평행선 공준이 유클리드의 다른 가정들과 독립적이라고 어렴풋이 알아채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예감한 최초의 사람은 아마도 독일의 가우스(Gauss)일 것이다. 그리고 헝가리의 볼리아이(Bolyai), 러시아의 로바체프스키(Lobachevsky) 등이 뒤를 이었다. 볼리아이와 로바체프스키의 새로운 기하학은 비록 유클리드 기하학의 어떠한 모순도 발견할 수 없었으나, 세월이 흘러 그 내적 모순이 없다는 것이 벨트라미(Beltrami), 케일리(Cayley), 클라인(Klein) 푸엥카레(Poincare) 등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이와 같은 증명은 상대적인 무모순성의 증명이다. 즉 만약에 유클리드 기하학이 무모순이라면, 볼리아이와 로바체프스키 기하학도 무모순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무모순성에 대한 하나의 결과는 오랜 세월 동안 문제시되었던 평행선 공준에 대한 종국적 해결이다. 이 무모순성은 평행선 공준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다른 공준들과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확립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평행선 공준은 다른 공준들로부터 유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무모순성의 결과들은 평행선 공준 문제의 해결 이상의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의 하나는 기하학을 전통적 틀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수학자들에게 있어서 기하학의 공준들은 그것의 물리적인 참이나 거짓과는 관계 없는 단순한 전제들이 되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은 ‘수학은 절대적 진리’라는 견해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직선의 경계 없음과 무한성을 바탕으로 한 두 번째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인식은 독일의 수학자 리만(Riemann)에 의하여 성취되었으며, 이를 ‘리만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부르게 되었다.  

 

28. 대수학의 해방 Ⅰ: 비가환 대수학의 발견(1843년)
대수학의 현대적 관점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영국의 피콕(Peacock)의 연구와 함께 나타났다. 피콕은 스스로 ‘산술적 대수학(arithmetic algebra)’과 ‘상징적 대수학(symbolic algebra)’이라고 부른 두 분야 사이의 차이를 명백히 하였다. 산술적 대수학에서는 어떤 연산들은 그 적용에 제한이 가하여진다. 보기를 들어 뺄셈 a-b에서 ab보다 커야만 한다. 반면에 상징적 대수학에서는 그러한 제약이 무시된다. 따라서 상징적 대수학에서 뺄셈은 언제나 적용 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산술적 대수학의 뺄셈과 차이가 난다. 산술적 대수학에서 상징적 대수학으로 규칙들의 이와 같은 확장에 대한 정당성을 ‘동치형의 영속화의 원리(principle of the permanence of equivalent forms)’라고 부른다. 피콕의 상징적 대수학은, 그것의 연산들이 산술적 대수학의 연산들과 두 대수학이 공동의 보조를 맞추면서 진행되는 한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경우에 동치형의 영속화의 원리에 의하여 결정되는 보편적인 산술적 대수학이다. 그레고리(Gregory)는 피콕의 연구를 발전시켜서 1840년에 대수학에서 교환법칙과 분배법칙이 뚜렷이 나타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29. 대수학의 해방 Ⅱ : 비가환대수학의 발견(1843년 ∼ 계속)
해밀턴(Hamilton)은 1843년에 곱셈에 관한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대수학을 창조하였다. 복소수계는 평면에서 벡터와 회전에 대한 연구를 하는 데에 매우 편리한 수체계이다. 해밀턴은 삼차원공간에서 벡터와 회전의 연구에 필요한 그와 유사한 수체계를 고안하려고 시도했었다. 이와 같은 고찰에 의하여 그는 실수가 묻히는 실수의 순서쌍이 아니라, 실수와 복소수가 묻히는 사순서수 (a, b, c, d)를 고려하게 되었다. 이를 ‘사원수(quarternion)’라고 부른 해밀턴은 사원수의 덧셈과 뺄셈에 대한 정의를 발견하였다. 사원수 (a, b, c, d)는 a+bi+cj+dk 꼴로 쓸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원수의 곱셈은 i, j, k 에 대한 다항식들과 같이 곱셈표를 이용하여 같은 꼴로 바꿀 수 있다. 이 곱셈표는 해밀턴이 로얄 운하를 산책하고 있을 때 갑자기 떠올라서 브룸교의 돌 위에 긁어서 써 놓았다고 하며, 현재 그 다리에는 그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그라스만(Grassmann)은 1844년에 출판된 ‘광연론(Ausdehnungslehre)’에서 해밀턴의 사원수의 대수학보다 훨씬 일반적인 대수학들의 모임을 전개하였다. 해밀턴이 순서 있는 네 실수의 집합을 고려한 것과는 달리 그라스만은 순서 있는 n개의 실수의 집합을 고려하였으며, 그라스만에게서도 곱셈표의 구성이 요구된다.
해밀턴과 그라스만은 서로 다른 곱셈표를 만듦으로써 서로 다른 대수학을 창조하였으며, 통상적인 대수학에서 성립되는 법칙들과 다른 법칙들을 만족시키는 대수학을 전개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대수학적 구조에 대한 연구의 길을 열었다. 통상적 대수학에 대한 공준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약화시키거나 삭제함으로써 또는 공준의 일부를 다른 공준으로 대체시킴으로써 나머지 공준들과 모순되지 않게 유지하면서도 방대한 종류의 체계를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0. 중요한 원자구조 : 군 구조(1830∼1860년)
19세기에 개발된 대수적 구조 가운데에 ‘군(group)’ 구조라고 하는 것이 있다. 군 개념은 1770년에 라그랑주(Lagrange)에 의하여 비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며, 1830년에는 갈루아(Galouis)가 그 개념을 정의하고 이름을 지었다. 원소들의 집합 G가 G 위에 정의되어 있는 이항 연산 *에 대하여 다음의 세 가지의 공준을 만족시킬 때 G를 군이라고 한다.
  G1. G의 임의의 원소 a, b, c에 대하여 (a*b)*c=a*(b*c)가 성립한다. 
  G2. 원소 i가 G에 존재해서, G의 임의의 원소 a에 대하여a*i=a가 성립한다.
  G3. G의 각 원소 a에 대하여 원소 (수식 2)가 G에 존재하며, (수식 2)가 성립한다.
 
군에 대하여는 몇 가지의 기본적 정리가 있다.
  (1) a, b, c가 G의 원소이고 a*c=b*c이면 a=b이다
  (2) G의 모든 a에 대해서 i*a=a*i이다.
  (3) 군은 단 한 개의 단위원을 갖는다.
  (4) 군의 각 원소는 유일한 역원을 갖는다.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