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빠른 것을 추구하는 시대다. "빨라야 산다"라는 명제가 세상 곳곳에 깔려 있다. 자동차, 통신, 전자 등 기술 발전에 민감한 영향을 받는
분야는 물론 식품, 서비스업 등에서도 이제는 '빠름'을 경쟁력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 반대의 개념인 '느림'은 배척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때로는 한 템포를 죽여 가는 것이 득이 될 때도 있다. 류현진(26, LA 다저스)의 메이저리그(MLB) 연착륙도 굳이 빠름을 쫓지 않는 느림의
미학이 담겨 있다.
올 시즌 빅리그에 데뷔한 류현진은 14일(이하 한국시간) 현재 4승2패 평균자책점
3.40을 기록 중이다. 부상으로 만신창이가 된 다저스의 선발 로테이션에서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와 함께 자기 몫을 하고 있는 '유이'한 선수다.
현지의 평가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이제 누구도 류현진을 MLB에 갓 데뷔한 루키로 보지 않는다. 이미 능력이 충분히 검증된 베테랑으로
분류하는 시선이 높아지고 있다.
현지 언론 사이에서도 "기대 이상의 몫을 하고 있다"라는 평가가 많다. 사실 시즌 시작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저스의 류현진 투자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다저스가 류현진을 영입하기 위해 쓴 돈은 포스팅 금액을 포함해 6년간
6100만 달러(675억 원)가 넘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연봉은 600만 달러 남짓이지만 실질적으로 쓴 돈은 1년에 1000만 달러를
상회하는 셈이다. MLB에서도 수준급 투수를 영입할 수 있는 금액을 류현진에게 쏟아 부었다. 선발 투수가 많은 다저스의 중복 투자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그런 말은 개막 이후 한 달만에 쏙 들어갔다. 잭 그레인키, 채드 빌링슬리, 크리스 카푸아노, 테드 릴리라는
다저스의 선발 요원들이 한 번씩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큰 공헌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반해 류현진은 팀 내 최다승을 올리며 꾸준히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활약에 류현진을 둘러싸고 있던 몇몇 선입견도 서서히 깨지고 있다.
가장 큰 선입견은 역시
"MLB에서는 평범한 구속을 가진 류현진이 성공할 수 있을까"였다. 류현진은 평균 140㎞ 중반대의 직구를 던진다. 구속을 끌어올릴 경우
150㎞ 이상을 던질 수 있지만 체력적인 문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한국프로야구에서야 강속구라고 해도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MLB에서는 압도적인
경쟁력을 가진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를 의식한 탓이었을까. 류현진도 MLB 진출전 "직구 구속을 더 끌어 올리겠다"라고
공언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그 반대의 양상으로 가고 있다. 직구 구속을 무리하게 끌어올리기 보다는 오히려 순간의
'느림'으로 타자들을 상대하고 있다. 류현진의 직구 평균 구속은 여전히 90마일(144.8㎞) 내외에 그치고 있지만 다양한 변화구로 상대
타자들의 템포를 뺏고 있다. 전매특허인 체인지업을 비롯, 슬라이더와 커브를 자유자재로 섞는다. MLB 진출 이후 직구 구속보다 향상된 것은
오히려 슬라이더와 느린 커브의 구사 능력이었다.
여기에 한국프로야구 시절 쌓은 노련함이 담긴 경기운영능력이 추가된다. 돈 매팅리
다저스 감독도 류현진의 이런 점을 칭찬했다. MLB에서 오랜 기간 스타 플레이어로 선수 생활을 했던 매팅리 감독은 투수들의 '빠름'에 대한
집착을 잘 알 법한 인물이다. 그러나 류현진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매팅리 감독은 류현진의 좋은 활약을 분석해달라는 이유에 "많은 사람들은
구속에 집착하지만 류현진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로케이션과 속도 변화에 주목했다.
류현진이 MLB라는 무대에 접근하는
방식을 높게 평가했다고도 볼 수 있다. 직구 구속을 향상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나 선천적인 신체 능력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류현진이
이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면 오히려 투구 밸런스가 깨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류현진은 2~3㎞의 스피드에 신경쓰기 보다는 자신의 페이스를
의도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떨어뜨리는 방법에 주목했다. 빨라지는 것은 더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하지만, 느려지는 것에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도 느림의 미학이 확인된다. 류현진은 한 경기 결과에 일희일비하지도 않는다. MLB는 물론 모든
프로리그에 데뷔하는 루키들은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에 급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류현진은 그렇지 않다. 조급하게 다음 경기를 바라보기
보다는 한 시즌, 그리고 자신의 MLB 경력이라는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천천히 가더라도 한 걸음씩을 꾸준하게 밟겠다는 의지다. 이런
느림이 류현진의 빠른 적응이라는 성과물을 도출해내고 있으니 이것도 역설적이라면 역설적이다.
'사는 이야기 > 함께하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축구에서 "한국형 전술"이란? (0) | 2013.06.30 |
---|---|
기업경영학으로 본 뮌헨의 필승 전략 '3C' (0) | 2013.05.27 |
'마음 울리는 엄마의 일생' (0) | 2013.05.08 |
요즘 뜨는 아이들...아빠 어디가? (0) | 2013.05.01 |
차범근을 메시-호날두와 비교할 수 있는 이유 (0) | 2013.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