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가 천론에 이어서 교육론(敎育論)을 전개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 수순입니다. 명(命)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교(敎)를 배치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성악설(性惡說)의 위치가 바로 이곳입니다. 천명(天命)을 전제하고 성선(性善)을 전제하는 맹자의 체계에서는 그 선한 본성으로 돌아가고(復), 그 선한 가능성(善端)을 확충함으로써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성(善性)과 선단(善端)을 하늘로부터 이끌어 낼 수 없는 순자로서는 당연히 능참(能參)이라는 적극적 참여가 요구되며, 교육이라는 외적 기능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논리 속에 순자의 소위 성악설(性惡說)이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악설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고 도식적인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性)은 선악(善惡)이전의 개념입니다. 선(善)과 악(惡)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性)과 선악(善惡)을 조합하는 개념구성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천(天)과 천명(天命)을 부정한 순자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본성(本性)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교육론(敎育論)과 예론(禮論), 제도론(制度論)을 전개하는 근거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제거를 실천적 과제로 삼았던 순자가 그의 주장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천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성선설의 관념성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순자의 성악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 성악편을 읽어보기로 하지요.
人之性惡 其善者僞也 今人之性 生而有好利焉 順是 故爭奪生 而辭讓亡焉 生而有疾惡焉 順是 故殘賊生 而忠信亡焉 生而有耳目之欲 有好聲色焉 順是 故淫亂生 而禮義文理亡焉 然則 從人之性 順人之情 必出於爭奪 合於犯分亂理 而歸於暴(性惡篇)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신의가 없어진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
위의 글에 이어서 순자는 사람은 사법(師法)의 도(道)에 의하여 인도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자가 성악설을 예론(禮論)의 근거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든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든 우리는 본성론(本性論)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社會)로써 자연(自然)을 재단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천성과 천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로, 순자의 성악설은 그의 사회론을 전개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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