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수학사전

"0" 의 발견

후암동남산 2016. 4. 5. 15:52

이상한 숫자 0

새로운 세기는 2000년에 시작되었을까 아니면 2001년에 시작되었을까? 이런 해묵은 논쟁은 100년을 주기로 계속 되풀이된다. 만약 중세의 수도승들이 0에 대해 알기만 했어도 그토록 혼란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중세 시대에 수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기독교 수도승들이었다. 그들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수학이 필요했는데, 돈을 세고 시간에 맞춰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돈을 세기 위해 주판과 비슷하게 생긴, 돌 같은 것을 움직여서 계산을 하는 셈판을 사용했다. 기도를 위한 시간과 날짜를 정확히 아는 데에도 수학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하루가 시작되고 끝날 때의 기도가 달랐으며, 시간에 따라 사용하는 기도문이 달랐다. 오늘날 정오를 의미하는 영어 noon은 중세 성직자들의 한낮의 기도를 의미하는 nones에서 온 것이다. 부활절 예배 같은 각종 축일을 정확히 계산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고대에는 0이 없었기 때문에 달력은 1년부터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서기 1년에 태어난 사람은 서기 2년에는 서양 나이로 1살이 되고 3년에는 2살이 된다. 그러면 100년에는 99살이 되고 101년이 되어야 비로소 100살이 된다. 따라서 두 번째 세기는 101년에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 밀레니엄(천 년)은 2001년에 시작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1년 먼저 새로운 밀레니엄을 자축한 셈이다.

기원전 3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는 0과 비슷한 의미의 자릿수를 나타내는 기호를 사용했다. 0은 그 왼쪽에 있는 숫자에 따라 의미를 갖는 자릿수일 뿐 숫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런 값을 갖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는 0이 그 자체의 값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순히 자릿수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전화기의 다이얼이나 컴퓨터 자판 위쪽에 있는 숫자 키들을 보자. 0은 자기 자리인 1의 앞이 아니라 9의 뒤에 온다. 0은 그 자체로 고정된 값을 가지고 있으며, 양수와 음수를 구분해 준다. 0은 직선 위의 -1과 1 사이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1부터 세기 때문에 0은 전화기 다이얼의 맨 밑에, 그리고 컴퓨터 자판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

0은 다른 숫자들과는 달리 이상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0이 아닌 숫자의 경우, 어떤 숫자에 그 자신을 더하면 숫자가 바뀐다. 1에 1을 더하면 2가 되고 2에 2를 더하면 4가 된다. 그런데 0에 0을 더하면 여전히 0이다. 뺄셈에서도 마찬가지로 1에서 0을 빼면 다시 1이 된다. 0은 커지거나 작아지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 어떤 수에 0을 곱하면 그 숫자를 파괴해 하나의 점으로 만든다. 0은 크기가 없고 실체도 없지만, 곱하기와 나누기 같은 계산에서는 모든 숫자를 0이나 무한대로 만들어 버린다.

기하학 위주의 그리스 수학에는 숫자와 도형 사이의 엄격한 구분이 없었다. 하나의 수학적 정리를 증명하는 것은 종종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일처럼 간단했다. 숫자 1은 점을, 숫자 2는 선분을, 숫자 3은 삼각형, 숫자 4는 사각형을 의미했다. 그러면 0은 어떻게 생긴 도형일까? 그리스인들에게 0은 존재하지 않는 수나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와 서양에서 0을 거부하게 된 것은 0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숫자와 도형을 동일시하는 수학 체계 때문도 아니다. 0에는 서양과 기독교의 교리와 모순되는 두 가지 개념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0은 서양의 기본적인 믿음에 위배되는 숫자였다. 훗날 오랫동안 서양 사상을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파괴한 것은 바로 무(無)와 무한(無限) 같은 0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개념들이었다.

제논의 역설을 풀지 못한 그리스 철학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은 기원전 490년경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될 무렵 태어났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페르시아는 20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그리스를 침략했다. 그리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쳤지만, 그리스 철학은 제논의 역설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0의 존재 때문이다. 제논의 논리적 수수께끼는 거의 2천 년 동안 철학자들과 수학자들을 괴롭혔다.

제논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를 통해 아킬레스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절대 앞지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숫자를 통해 이 문제를 얘기해 보자. 아킬레스는 1초에 1미터의 속도로 달리고 거북이는 그 절반의 속도로 달린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거북이는 아킬레스보다 1미터 앞서 출발했다고 하자.

아킬레스는 빠른 속도로 달려 단 1초 만에 거북이가 처음 있던 곳까지 왔다. 그런데 거북이도 달리고 있었으므로 그보다 2분의 1미터만큼 앞으로 나아간다. 아킬레스는 다시 2분의 1초 만에 2분의 1미터를 따라갔다. 하지만 거북이도 같은 시간에 4분의 1만큼 또 앞서 나간다. 4분의 1초 후에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쫓아갔지만, 거북이는 또 8분의 1만큼 앞으로 나아간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아킬레스가 아무리 달려도 거북이는 항상 그보다 앞에 있다. 따라서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고 주장한 제논의 역설

그리스 철학자들은 제논의 역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수학적 논리에서 아무런 오류를 찾아내지 못했다. 논리가 완벽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잘못된 결론이 나올 수 있을까? 제논의 역설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무한'이다. 제논은 연속적인 동작을 무한한 수의 작은 걸음으로 나누었다. 무한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0의 도움이 없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없던 0이 바로 제논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다. 무한 개수의 항들을 모두 더하면 무한한 값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무한 개수의 항들이 0에 접근하면 유한값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가 바로 그렇다. 그리스인들은 0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종착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킬레스가 달린 거리를 모두 더하면 숫자 1에서 시작하여 1/2, 1/4, 1/8……처럼 항들이 점점 작아져 0에 가까워진다. 이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되는 수를 우리는 '수열'이라고 부른다.

1 + 1/2 + 1/4 + 1/8 + 1/16 + …… = 2

아킬레스가 달린 거리를 모두 합하면 겨우 2미터에 불과하다. 그저 두 걸음만 내디디면 거북이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거기까지 가기 위해 무한한 수의 걸음을 디뎌야겠지만,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는 시간은 단 2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리스 시대의 우주에는 무한도 없고 무도 없었다. 다만 지구를 둘러싼 아름다운 천체만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지구는 우주의 한가운데 위치했으며, 이러한 기하학적 우주는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고 주장함으로써 0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한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간단히 제논의 역설을 피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는 기원전 323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을 때까지 멀리 동쪽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스승의 교리를 전파했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의 제국은 여러 조각으로 분열되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는 알렉산더 제국보다 더 오래 지속되어, 중세를 거쳐 16세기 엘리자베스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인도인들이 0을 정의하다

알렉산더의 침략 덕분에 인도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숫자 체계와 0의 자릿수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 로마가 그리스를 점령했지만, 로마의 힘은 과거 알렉산더 제국의 영토였던 동쪽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 결과 인도는 기독교의 등장과 로마제국의 붕괴,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서양의 우주와는 달리 인도의 우주는 크기가 무한했고 우주 밖에는 수없이 많은 다른 우주들이 존재했다. 무는 힌두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도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아트만은 가장 작은 원자보다 작고, 광활한 우주보다 큰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의 자아를 상징하는 아트만은 우주의 어디에든 있으며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무한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한인 동시에 무를 상징한다.

인도 숫자에 관해 언급된 최초의 문헌은 662년, 시리아의 어느 주교가 쓴 글이다. 7세기경 인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는 숫자와 숫자를 나누는 법칙을 만들었는데, 이때 음수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는 0÷0과 1÷0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 후 12세기 인도의 수학자 바스카라는 '분모가 0인 분수는 무한한 양'이라고 정의했다. 이로써 0은 자릿수를 표시하는 기호로 시작되어 그 자신만의 값을 가진 숫자가 되었다.

상업적인 필요에 의해 널리 퍼진 0이 가져온 변화

12세기 이탈리아 상인들은 이집트와 시리아 상인들에게 정향, 후추, 계피 같은 향신료를 사서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에게 엄청난 가격으로 팔았다. 그 덕분에 베네치아, 제네바, 밀라노 등지의 상인들은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지중해 무역이 호황일 때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유럽의 교황과 왕들은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분 아래 황금알을 낳는 지중해 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과 자본이 몰려들면서 피렌체 같은 금융 도시들이 발달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지중해 무역과 십자군 전쟁을 통해 비잔틴 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만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만남은 그들의 잊혀진 과거, 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였다. 그들은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했던 그리스, 로마 문화를 접하는 동시에 무역과 전쟁을 통해 축적한 부를 이용해 봉건 영주들로부터 자유를 샀다.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은 이렇게 태어났다.

피보나치가 아라비아 숫자를 소개했을 때 이탈리아의 상인들과 금융업자들은 재빨리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였다. 이전에는 주판이나 셈판을 가지고 계산을 했는데, 아라비아 숫자로 계산하는 것이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각 지역의 공국에서는 숫자들이 변조되기 쉽다는 표면상의 이유로 아라비아 숫자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0을 비롯한 아라비아 숫자의 편리함을 포기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계속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했고, 심지어는 숫자를 이용해 암호화된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스 시대에는 수와 도형, 순수 논리를 통해 질서 정연한 우주를 창조했다. 당시 우주는 유리수 체계 위에 세워져 있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기독교와 결합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하지만 0을 포함한 아라비아 숫자가 유럽에 전파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수의 세계는 무리수를 포함한 실수로 확장되었으며, 이는 다시 허수를 만들어냄으로써 복소수의 영역까지 확장되었다. 수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이 미적분을 통해 0을 논리적 틀에 가둬 놓았지만, 0은 다시 열역학을 통해 그 틀을 깨뜨렸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0을 통해 우주를 설명하려 했지만, 0은 다시 빅뱅과 블랙홀의 수수께끼만 남겨 놓은 채 사라졌다. 우리가 진정으로 0을 이해할 수 있다면 시간의 시작부터 우주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물리 법칙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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